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SF 팬 모임에서 만난 인연으로 손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던 캐나다 소설가 아말 엘모프타르와 미국 소설가 맥스 글래드스턴. 그들처럼 소설 속 주인공이 편지를 주고받는다면, 그것도 까마득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여행 속에서?!


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단 6주 만에 하나의 근사한 이야기를 낳았습니다. 작가들이 레드와 블루라는 두 주인공을 각각 맡아 서신을 써 내려갔고, 두 이야기가 합쳐지자 환상적인 SF 소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This Is How You Lose the Time War)>가 탄생한 겁니다.


피로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증기처럼 이글거리는 숨결. 시간 전쟁 중인 레드의 치명적인 살벌함이 느껴지는 도입부. 그런데 이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발견합니다. '읽기 전에 태워 버릴 것.'이라고 적힌 크림색 편지지입니다. 불을 붙이자 글씨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레드를 약 올리는듯한 블루의 편지에 레드 역시 가만있지 않습니다. 친히 「리벗 부인의 사교 예절 및 서신 교환법 안내서」를 참고하며 답장을 보냅니다. 둘은 때로는 감미로운 승리의 맛에 취하기도, 보복해 보라며 도발하기도 합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정색하고 덤비면 곤란하다며 유머 감각도 펼치기도 하면서 말이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먼 미래. 기술과 기계가 발달한 레드의 에이전시 세계는 흔히 영화에서 보던 기계 인간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반면 블루가 속한 가든은 식물계입니다. 식물과 인간의 융합이 어떻게 이뤄졌을지는 상상력의 한계 때문에 이미지가 선명히 떠오르진 않네요.


레드와 블루가 비밀 요원으로 행하는 시간 전쟁은 수많은 시간가닥들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에이전시와 가든 간의 영역 전쟁입니다. 한 쪽이 정해진 궤도에서 역사를 탈선시켜 다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면, 다른 쪽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지되도록 전력을 다해 방어하기도 합니다.


레드와 블루가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 여행지만 해도 공룡이 있는 아득히 먼 과거에서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역사적 사건이 펼쳐지는 시대, 그리고 우주 함대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먼 미래까지 시간 전쟁의 범위는 한계가 없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편지를 남기는 레드와 블루. 편지 전달매체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불타고 남은 재, 수십 년 동안 차곡차곡 그려진 나무의 나이테, 이글거리는 용암의 붉은 빛, 찻잔 속의 찻잎, 잉크 자국 등 둘만이 눈치챌 수 있는 무언가에 글을 남깁니다. 서로가 같은 시간에 동시에 있지 않기에 글이라는 아날로그적 형태로 서로의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이 기상천외한 전달매체와 이토록 잘 어울릴 줄은 몰랐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작용, 반작용의 물리법칙처럼 연결됩니다. 편지를 읽으며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다 뿌듯할 지경이라며 '나의 가장 사특한 블루에게', '이빨도 발톱도 피로 물든 레드에게'로 시작한 편지는 점차 '나의 친애하는 무드 인디고에게', '아침의 붉은 하늘에게'와 같은 수식어로 변합니다. 이제는 세상에 붉은 것이, 푸른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압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서로를 알아갑니다.


둘은 다른 듯 닮았습니다. 이따금 고립되고 싶은 욕망,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갈구하며 생기는 허기, 공허감을 가졌다는 데서 말이죠. 서로가 허를 찌르는 임무를 맡은 정예 요원임에도 레드와 블루의 감정이 변하는 여정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누구의 편이 아닌 둘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시간의 실을 따라 위로 아래로 누비며 역사의 머리카락을 꼬았다가 다시 풀어 헤치며 세상을 만들어가고 유지하는 레드와 블루. 필사의 시간 전쟁에서 레드와 블루의 소통은 반역 행위와도 같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의 뒤를 은밀히 추적하는 자가 있음을 눈치챕니다. 레드와 블루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서술형 제목을 보자마자 처음엔 결말을 스포일러 하는 제목인 건가 싶어 의아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제목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게 한 후반부 편지 한 구절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 긴 여운을 안겨주네요.


고전문학, 노래 가사, 게임 등 레드와 블루의 편지에 인용된 구절의 빛나는 비유와 패러디도 소설의 맛을 돋우는데 한몫합니다.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장성주 역자가 1년여에 이르는 번역 작업을 거친 만큼 번역의 맛이 일품인 소설이기도 합니다.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 BSFA상, 오로라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SF상을 휩쓴 경장편 소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할리우드에서 TV 드라마로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추상적으로 다가왔던 이미지들이 어떻게 영상화될지 퀄리티가 기대됩니다. 


"둘은 너무도 오랫동안 서로를 모른 채 살았고, 시간을 누비며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따로였고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빚었고 그러는 동안 서로에 의해 모습이 빚어졌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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