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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 - 세계적인 법의인류학자가 들려주는 뼈에 새겨진 이야기
수 블랙 지음, 조진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영국 법의학팀을 이끌며 전쟁 범죄 수사에 참여, 2004년 인도양 쓰나미 발생 때 사망자 신원 확인에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된 최초의 법의학자였던 수 블랙은 현재 옥스퍼드 세인트존스칼리지 총장으로 재직 중인 세계적인 법의인류학자이자 해부학자입니다. 특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루기 어렵다고 소문난 어린이 뼈대 교과서를 집필하며 어린이 뼈 식별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시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생전의 이야기를 건져올리는 법의인류학자가 일하는 방식의 흐름으로 서술된 책입니다. 인체의 부위에 중점을 두고 머리, 몸통, 사지로 구분해 이야기합니다. 워낙 충격적인 범죄 사건이 많이 나와서 읽는 내내 당혹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남는 감정은 내 몸에 대한 경이로움과 소중함이었습니다.
인간의 골격은 200개가 넘는 뼈로 구성되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간에 흉터로 기록되고, 코카인 중독은 치아에 흔적을 남깁니다. 고도비만의 식단은 심장, 피부, 연골뿐만 아니라 뼈에도 자국을 남긴다고 합니다. 법의인류학자는 뼈에 기록된 그 사람의 경험을 찾습니다. 뼈로 그 사람의 사연을 알아내고 죽은 자에게 이름을 되찾아줍니다.
뼈가 발견되면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유골이 인간의 것인가, 법의학적 관련성이 있는가, 이 사람은 누구인가, 사망의 방식과 원인을 뒷받침할 수 있는가 등입니다. 법의인류학자는 온갖 종류의 동물 뼈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돼지의 갈비뼈는 인간의 갈비뼈와 흡사하고, 말의 꼬리뼈는 사람의 손가락뼈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영장류의 뼈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까운 과거의 뼈가 아니라면 고고학적인 유골로 간주되어 그의 손에서 떠나고, 사망 방식과 원인을 판단하는 것은 법의병리학자의 전문성에 속하는 영역이기에 병리학과 인류학의 파트너십이 작용해야 합니다.
법의인류학자의 순수한 역할은 뼈에 담겨 있는 정보를 추출해 내는 것입니다. 탄탄하게 교차 조사하고 과학적 해석이 철저해야 하는 과학 영역입니다. 영국에서는 공인 전문가여도 공인 자격용 시험을 5년마다 다시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해부학적 훈련을 받은 법의인류학자가 사망자의 신원 확인에 어떤 방법으로 도움 줄 수 있는지 인체 부위별로 설명합니다. 뼈에 이야기가 기록되는 방식, 그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보여줍니다. 퍼즐처럼 맞춰 나가는 스토리텔링이 압도적입니다.
2007년 백금을 주조해 만든 두개골에 8,600개가 넘는 다이아몬드와 진짜 치아를 박아 만든 작품이 공개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 작가는 두개골 원형을 박제 상점에서 구입했고, 치아만 따로 뽑아 작품에 박아 넣었습니다. 한때는 살아있었던 사람이었던 유골을 사고팔 수 있다는 점에 저자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사람의 얼굴이 차이 난다는 거 아시나요. 생기와 표정이 사라졌을 때의 모습은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과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여행가방에서 발견된 한국인 진효정 사건도 저자가 개입한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법의인류학자가 얼굴 이미지를 검토하게 되는 단계는 최초의 검시가 완료된 후, 경찰수사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지 못하고 진행이 머뭇거리기 시작할 때라고 합니다. 당시 법의학 아티스트가 사망 여성의 얼굴을 보고 그림을 그렸지만, 되려 신원 확인을 방해할 만한 그림이어서 공개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얼굴과 두개골을 살펴 인종을 판단하고, 인터폴 실종자 데이터에서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살아있을 때의 사진과 사후 얼굴 이미지를 함께 보여줬을 때 90퍼센트 이상이 동일인일 가능성을 거부했을 정도로 시신의 경우 얼굴 인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저자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하나의 뼈에는 그 주인이 특정한 누군가인지 아닌지를 밝힐 수 있는 정보가 많이 담겨 있는 때가 있다." - 책속에서
사람은 두개골과 척추라는 중심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서로 잘 맞는 다수의 다양한 분할 조각으로 구성된 겁니다. 척추뼈 33개와 연골, 디스크 등이 합해져 하나로 이어진 축을 척주라고 부르는데 개개의 척추뼈를 식별하는 것은 법의인류학자의 시험 문제에도 자주 출제될 만큼 중요한 주제라고 합니다. 뼈를 배치할 때 33개 중 정확히 무엇일 가능성이 높은지 판단해야 하는 겁니다.
이 책은 영국 범죄소설 작가 협회 논픽션 부문 수상작일 만큼 범죄소설 작가들이 특히 관심 쏟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작가들이 유독 좋아하는 뼈는 목뿔뼈라고 합니다. 목졸림 사망의 경우 등장하죠. <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에서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무시무시한 살해 방법들이 숱하게 등장합니다.
아주 작은 뼛조각이 발견되었을 때면 직소 퍼즐 중 한 조각을 찾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미제 상태인 채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도 고백합니다. 누구인지,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그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아직 살아 있을지... 노력했음에도 해결되지 못한 사건은 정의가 실현되지 못했다는 느낌으로 남게 됩니다.
성별과 사망 당시 나이를 확인하는 데 도움 주는 뼈는 많습니다. 그중 다리이음뼈 중 긴뼈는 정신적 충격의 증거를 확보하는 데 도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어요. 해리스선 덕분입니다. 긴뼈의 성장에 일시적 영향을 주는 멈칫 현상으로 생긴 흔적인 해리스선은 학대로 인한 스트레스 같은 정신적 충격의 흔적입니다. 물론 영구적인 건 아니고 성장과 재생에 의해 나중엔 지워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적 해리스선은 평생 안고 갑니다.
인체의 뼈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달되는지 설명하며 그 뼈가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기록하는지 들려주는 <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 내 몸 구석구석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200개가 넘는 뼈가 안성맞춤으로 자리 잡아 성장하는 과정이 놀랍습니다. 자동차 사고 시 무릎이 자동차 계기판에 세게 충돌하면 골반 골절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좌석을 뒤로 밀고 계기판에 무릎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조언처럼 알아두면 쓸모 있는 상식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삶은 어땠는지. 단순히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뼈, 근육, 힘줄, 섬유조직에 이미 상세히 기록된 이야기를 찾아서 이해하는 법의인류학자 수 블랙이 들려주는 이야기 <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
나에게는 문신이 없고, (내가 알고 있는) 선천적 기형도 없고, (아직 올 수 있지만) 기형도 없으며, 변형이나 절단된 곳도, 큰 부상도 없습니다. 사고로 생긴 흉터는 몇 개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어린 시절에 입은 왼쪽 손등 화상 흉터가 연하게 남아 있고, 오른쪽 마지막 손가락 안쪽에 꿰맨 흔적이 길게 남아있습니다. 역시 어린 시절 다쳤던 두개골에 금이 가서 치료된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에 이식된 수술 장치는 없습니다.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린 적도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불법 약물을 어떤 형태든 복용한 적이 없으며, 규칙적으로 먹는 약도 없습니다.
위 마지막 문단은 저자의 몸을 설명한 문장을 저도 패러디 해본 겁니다. 흥미로운 것이 있을까 해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샅샅이 뒤져야 하는 사람에게 미리 사과한다는 저자처럼 저 역시 저만하면 지극히 평범한 몸이군요. 그들은 내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를 구분하지 못하고, 내 말버릇은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성이고, 죽었을 때 나이와 키, 머리카락 색깔, 피부색, 주근깨가 있는지 없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처럼 몸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시신을 식별하는 데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는 점도 밝히고 있습니다.
뼈에 기록된 이야기를 읽어내는 수 블랙의 <나는 매일 죽은 자의 이름을 묻는다>. 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사건을 추적하는 여정이 그 어떤 범죄소설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미드 <본즈>의 열혈 애청자였던 제가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