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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좋아하는 정유정 작가의 추천평에 끌려 관심 가진 책인데 미스터리 소설 읽으며 눈물 콧물 바람이 될 줄이야.
탁월한 '밀당' 능력이란 말은 다 읽고 나면 이해됩니다. 주인공이 루저 같은 모양새에 괴짜 기질을 보이지만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캐릭터입니다. 정유정 작가는 <제3의 남자>가 록발라드 같은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가파르게 치솟는 빠른 전개와 애잔함이 뒤섞인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정유정 작가 책을 읽었을 때처럼 박성신 작가의 <제3의 남자>도 무척 만족스럽게 읽었어요. 내공이 장난 아닌 작가인 듯.
의문의 여인이 처형 방식으로 살해당하는 첫 장면.
저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왜 이리 마음에 드는지. "자존심은."이라는 짧은 한 마디가 너무 생생하게 와 닿는 거예요. 인트로 장면부터 사로잡습니다.
이혼 후 변변한 직장 없이 루저로 사는 '나' 최대국.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와 인연 끊은지 오래된 아버지 최희도의 총상 소식을 들려주는데, 그 순간 30년 전 아버지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모르는 사람이 너를 찾아와 내 이름을 대면 그대로 도망가라."
하지만 평생 고서점을 한 절름발이 노인인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나'는 없던 효심이 솟아나는 일 따위 없는, 책방을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만 보여줍니다. 정말 깨는 캐릭터지만 무작정 미워하진 못하겠어요. 세 번의 자살 시도 전력이 있고, 서른아홉 살에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고 지갑엔 단돈 만 원도 채 남지 않은 '나'. 이 시대상이 처절하게 반영된 아들의 모습이 아닐까 해서 씁쓸합니다.
그런데 낯선 이는 아버지에게 맡긴 수첩을 찾아달라며 그 대가로 무려 3억을 제안하는 겁니다. '나'는 당연히 덥석 물어버립니다. 이것저것 의문을 따질 겨를 없는 형편이니까요.
<제3의 남자>는 아들 최대국의 현재 시점과 아버지 최희도의 한창 시절인 1970년대 이후 시점을 번갈아 진행합니다. 월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버지의 비밀은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어요. 바로 남파 간첩이었던 겁니다. 고정간첩으로 남한 땅에서 살며 북에서 내려온 이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월출의 인생은 형사에게 쫓기다 그에게 발견된 여대생 해경을 만나면서부터 틀어집니다. 간첩과 여대생 조합은 뻔한 레퍼토리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상상 그 이상을 보게 되니 벌써부터 식상해 하지 마시라~
청년 최희도, 월출의 삶은 파란만장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주시하던 형사와의 악연은 끈질기게 이어지고요. 월출을 갑작스레 떠난 해경이 이름을 바꾼 채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어 몇 년 만에 나타나면서 해경과 월출의 인연은 이어질 듯 말 듯 줄타기를 하게 됩니다.
아들인 '나'는 아버지의 수첩을 찾다 책방 지하에 있는 비밀 장소를 발견하게 되고, 곧 해경의 존재와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그를 뒤쫓는 의문의 사람들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하니 수첩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퍼즐을 맞추면서 드러난 진실은 외면하기엔 너무 큽니다.
최고의 가수였던 해경과 아버지의 관계, 주변 인물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총상, 거액을 제안하며 수첩의 행방을 찾는 의문의 남자, 그리고 인연을 끊을 만큼 악연이 된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비롯한 그들 각각의 스토리는 1970년대 남한과 북한이 서로 공작원을 보내며 치열한 물밑 경쟁을 했던 시대와 얽혀 있습니다.
루저 인생을 살아온 '나'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밝혀지는 진실들이 하나같이 통렬한 아픔으로 찾아옵니다. 아니 그보다는 아버지 월출의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야말로 안타까웠어요. "남한에선 돈이 있어야 아비가 될 수 있더이다."라고 내뱉은 월출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듣는 순간 제대로 울컥하더라고요.
아버지는 "나의 인질이었다."라는 아들의 말도 인상 깊었습니다. 아버지란 존재의 의미를 뒤늦게 찾은 '나'와 이념과 사랑, 자식에 희생한 아버지 월출의 인생. 둘 다 가슴 저릿하게 다가옵니다.
눈시울 붉히게 하는 장면이 곳곳에 있지만 한편으론 똘끼가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을 보며 피식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나저나 간첩은 왜 추리닝 조합을 선호할까요? 무~척 좋아하는 영화인 <은밀하게 위대하게> 김수현 스타일이 자꾸 떠올라 크큭대며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은위를 재미있게 봤다면 소설 <제3의 남자>도 취향 맞을 거예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가 술술 잘 읽히게 하고, 진지함과 똘끼의 균형도 완벽하질 않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럽게 읽어 낸 소설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것, 지켜야 할 누군가 때문에 열심히 살아가는 것, 인간은 단순한 이유로 복잡하게 살아간다." -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