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일기
서윤후 지음 / 샘터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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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서윤후의 산문집 <쓰기 일기>. 일기 쓰기가 아니라 쓰기 일기라는 제목에서 한참을 머물게 됩니다. 은밀한 마음을 적는 일기라지만 들키고 싶기도 한 양가적인 마음이 드는 게 일기입니다.


쓰기에 몰두했던 나날들에 대한 기록인 <쓰기 일기>. 창작 생활을 하며 일상의 단상이 남긴 흔적입니다. 나 이렇게 시를 쓰고 있어요, 지금은 쓰고 싶지 않아요 하면서 들키고 싶은 은밀한 마음을 슬쩍 고백도 하면서 말이죠.​


스무 살에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현대시》로 등단한 서윤후 작가. 학교 다니고 군대 다녀오며 8년 만에 첫 시집을 냈고, 이후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시와 친해지는 날이 있겠지 하면서 시와 친하진 못한 저로서는 그의 시집을 읽진 못했지만 산문집 <쓰기 일기>는 마음에 쏙 와닿습니다. 고양이 집사라고 밝혀 슬그머니 애정 어린 시선으로 책장을 넘깁니다.​


<쓰기 일기>에는 2017년부터 2023년 사이의 일기가 담겼습니다. 계절의 흐름으로 엮었기에 연도는 뒤죽박죽입니다. 이런 편집 방식도 신선합니다. 몇 년 전 이맘때 쓴 기록이 올해의 일기와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치열하게 작품을 쓰고 나면 불꽃의 잔상과도 같은 글을 끄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작가는 일기를 ‘심심한 독백’이라고 합니다. 


한 편의 시가 되려고 적어둔 문장들이 있는 메모들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일로 새해를 맞이하는 작가. 작년의 문장들이 올해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하는 그의 설렘이 느껴집니다.


시라는 결과물로 완성되기까지의 여정을 성실함이라는 단어로 묶습니다. 매일 조금이라도 그날의 기록을 적는 쓰기 일기는 그렇게 탄생합니다.​


서윤후 작가의 문장은 깊이가 있는데도 담백한 어조로 이야기해서인지 단정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완성도 미완성도 아닌 어디쯤에서 나는 삶의 완벽함을 말하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고백에서는 불안하고 슬프고 헛헛한 감정이 밀려오는 창작의 고통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시인조차 때로는 시집을 읽는 데 실패하는 날이 있다는 말에서는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져 웃음이 나옵니다. 평소 잘 하던 일인데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그런 날 있잖아요. 시 읽는 재미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고백하는 그가 진실되게 보입니다.​


그렇게 일기를 쓰다가 문득 시 제목을 고치기도 하는 모습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윤후 작가의 시를 좋아한다면 <쓰기 일기>에서 그 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쓰기의 나날로 보낸 시간에는 ‘결’이 남는다.”라는 문장이 와닿습니다. 시를 쓴다는 건 홀로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녀오는 일이라는데, 가만 보니 일기를 쓸 때도 우리는 그런 마음에 다다르기 위해 애쓰잖아요. 그의 시를 읽진 않았지만 짐작건대 시든 <쓰기 일기>의 산문이든 그 결이 잘 살아있는 문장이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엔 소진하기 위해 안달 나 있었다면, 지금은 소진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서윤후 작가. 때로는 나를 잠깐 그만두게 하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해도 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 역시 몇 년 동안 해온 쓰기 일기를 통해 깨달았을 겁니다.


공감 포인트가 기대 이상으로 꽤 많습니다. 시인이라는 창작자는 딴 세상 사람 같았는데 <쓰기 일기>를 읽으며 나만의 생각거리를 많이 얻는 걸 보니 보편적 감정을 잘 끌어내는 작가입니다.​


퇴고할 때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장면을 읽다가 저는 되려 반전 매력을 선사받았습니다. 삭제된 것을 후회하지 않아야 할 만큼, 삭제하는 일로 시작해서 삭제하는 일로 끝나는 퇴고 작업의 어려움을 알고 나니 발표된 시 한 편 한 편의 아름다움이 더 빛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창작한 후 힘을 빼고 들려주는 <쓰기 일기>. 질척이는 감정 휴지통이 아니라 생각의 흔적을 담백하게 담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산문집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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