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정순임 지음 / 파람북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부장제의 정점 종갓집 둘째이자 딸로 태어난 정순임 저자. 둘째 딸이 직접 그렸다는 표지 그림이 제목이 가진 묵직함을 유쾌함으로 바꾸고 있어 책장을 얼른 펼쳐보고 싶었던 책입니다.


15대에 걸쳐 400년을 내리 한집에서 살아온 가문. 일 년에 열다섯 번 조상 제사를 지내는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상주 우복종가입니다. 태어나보니 세상을 다 가진 오빠가 있습니다. 종갓집이라는 말만으로도 갑갑함이 쏴~ 몰려오는데 가부장제의 상징과도 같은 곳에서 저자는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어떡하지! 내가 할 수 있을까? 괜찮다 괜찮다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려니 덮어두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죽는 날까지 살아질 줄 알았다." - 책 속에서


환갑을 향해 가고 있는 정순임 저자. 50년 세월 입다물고 살아왔지만 괜찮아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뭐 대단하게 살았다고, 너만큼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유난을 떠냐는 생각에서 이젠 해방하기로 합니다. 혼자에게만 일어난 일이라면 넘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두 딸을 키운 엄마의 입장에서 보니 자신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아트 회사를 차린 큰 딸은 아가씨 말고 이야기할 남자를 찾는 고객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독일에 유학 간 둘째는 혼자 사는 집에 친구들끼리 남자 구두 사주는 게 유행이라고 하니 여전히 차별은 일상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손인 오빠를 두고 태어난 가시나에게 차별이란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몇몇 에피소드가 아닌 전 생애를 관통하며 자신을 옭아맨 차별입니다. "나는 사람 정순임이다."라는 한 마디에 담긴 서글픔과 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그 아이들대로 인정할 뿐, 집에서처럼 차별하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학교에서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학생 때는 학생 운동도 치열하게 하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갈망했습니다.


사랑은 받기보다 주는 것이란 명제에 심취해 있던 그에게 급히 와버린 큰아이.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스물넷에 시댁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 하나만 믿고 한 결혼이었지만 온갖 모순과 차별이 이어졌고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헤어지기까지도 참 파란만장했습니다. 이혼을 하면서 '탈출'했다는 표현이 가슴 저립니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살았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칼날을 꺼내 드는 못난 남자들이 있습니다. 딸은 그렇게 엄마가 살아온 인생을 따라 삽니다. 저자는 여러 성차별 이슈를 꺼내들며 변화의 목소리를 드러냅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든가, '여자가 말이야'라는 말이 존재하는 한 주저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거라고 합니다.





결혼 종료 후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번역일로 밥벌이를 하며 아이들을 잘 키워낸 저자. 오빠와 남동생이 고향에 자리를 잡아가던 시점에 저자도 귀향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대대로 내려온 장 담그는 일을 배워 상품화하고 회사를 꾸려나가고 집에서만 먹는 여러 음식도 익혀 두어야 하는데, 그걸 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겁니다.


귀향 후 역시 엄마와는 계속 티격태격입니다. 그럼에도 전통이라는 힘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래된 한옥보다 더 가치있는 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조차 큰소리를 내는 법 없이 생각을 전달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뭉클합니다.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엄마가 겪어 낸 부당한 일들을 딸에게는 덜 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자신은 상처받았는지 써야만 했고, 갱년기에 가출을 감행해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와의 관계를 재정립합니다.


어린 순임이의 마음에 난 생채기들을 보듬어주면서 엄마와의 화해, 치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곳에서 이제는 상처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고향 집 산수헌을 지키며 전통의 가치와 정신을 이어가는 저자의 여정을 응원합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