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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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장르문학을 선도하는 다섯 작가들과 함께 만들어낸 21세기 대한민국식 펄프픽션을 정립해 보고자 기획된 앤솔로지 <펄프픽션>. 영화 '펄프픽션'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온 단어이긴 한데, 오래전 질 낮은 펄프로 만들어 저렴함으로 승부건 펄프 매거진에 실리던 단편소설을 펄프픽션이라 불렀습니다. 정형화된 틀을 깨는 허위와 가식 없는 소설을 지향한 펄프픽션은 이 시대 장르문학의 모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앤솔로지 <펄프픽션>에서는 학원괴담, 뱀파이어, 느와르, 외계인, 오컬트, 로봇 등 장르문학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소재이지만, 묘하게 더 키치하고 마이너하게 변주한 B급 감성이 묻어나는 단편들이 모였습니다.


오십 년 전통 대입 명가 기숙학원에서 벌어지는 학원괴담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어린 연인이 함께 기숙학원에서 원생과 직원으로 머물며 학원 매점에서 판매하는 전통의 합격 기운이 응축된 햄버거의 비밀을 파헤치는 여정을 다뤘습니다. 영화에서 다진 고기의 정체와 관련한 범죄를 다룬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나는데 학원괴담과 연결시키다니. 대입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에서 딱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요즘 음식은 매운맛 단계가 꽤 세분화되어 있죠. 매운맛도 옛날 매운맛과 요즘 매운맛이 미묘하게 다른데, 저는 요즘 매운맛에는 영 적응을 못하겠더라고요. 『떡볶이 세계화 본부』는 매운맛과 뱀파이어라는 전혀 생각지 못한 연결은 물론이고, 무급에 가까운 노동을 보여줌으로써 불공정과 불평등이라는 오늘날 계급 차별의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색다른 소설입니다. 떡볶이집 사장의 "더러워서"라는 한 마디가 계속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시체 버리가 딱 좋은 날에 남편 시체가 든 가방을 옮기는 아내. 저수지에 시체를 풍덩 떨어뜨리자 뜬금없이 외계인이 뾰로롱 등장합니다. "선생님께서 떨어뜨린 시체는 이 금으로 된 시체입니까, 아니면 이 은으로 된 시체입니까."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금도끼 은도끼 전래동화가 이렇게 사용되다니 완전 배꼽 빠지는 줄 알았어요. 거짓말하지 않으면 금 시체와 은 시체는 물론이고 진짜 시체까지 다시 다 받는 걸까요? 결말이 궁금해서 안 읽고는 못 배기는 『정직한 살인자』입니다.


환승역은 왜 태극무늬로 표시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 있나요?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에서 그럴싸한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묘하게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려줍니다. 우리 땅에 태극이 적절하게 활용되면 좋은 기운이지만, 무분별하게 집중이 되면 위험한 것을 이용해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이들과 지키려는 이들의 대립구도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줍니다. 지신밟기라는 민속신앙을 수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지하철로 비유한 독특한 발상과 노인 문제까지 다루는 인상 깊은 소설입니다.


인공지능 청소로봇 알옛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주인을 살해했고, 증거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알옛은 주인의 모호한 명령어가 초래한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딥러닝으로 어떤 단어를 배우게 된 알옛. 섬뜩해지면서도 그럴법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인간과 동등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은 시민 R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는 알옛은 왜 주인을 살해했고,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다섯 작가들의 단편이 끝날 때마다 수록된 작가 후기는 미처 놓친 생각을 잡아끌며 카니발적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광산을 탐험하며 황금을 캐는 고블린처럼, 들녘의 장르문학 브랜드 고블이 독자들의 감성과 취향을 존중하며 다양성의 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펄프픽션>은 고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컬트 그 자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고블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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