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 큐레이터 - 박물관으로 출근합니다
정명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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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 박물관. 저는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어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박물관 근처에 사는 사람이 부러워질 정도로 박물관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에서 일하며 큐레이터의 삶을 살고 있는 19년 차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정명희 저자의 에세이 <한번쯤, 큐레이터>.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에피소드와 박물관의 이모저모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는 문체부 소속 연구직 공무원으로 학예사라고 불립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만나는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서류 작업에 파묻혀 살겠구나 싶더라고요. 뭔가 우아한 느낌을 주는 큐레이터 모습 뒤에는 치열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걸 에피소드들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재 서울 용산 이촌역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데 유물을 지켜온 사람들이 만든 박물관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뭉클한 감동이 밀려듭니다. 1909년 창경궁 제실박물관 개관으로 시작한 박물관. 그냥 당연하게 그곳에 있는 줄 생각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쳐온 유물들이 모인 곳입니다. 저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자리였던 곳에 있을 때부터 근무했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 이사도 경험하게 됩니다. 박물관 이사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긴 하네요. 특히 박물관에서 유물 핸들링에 관한 태도를 알게 되면 이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입니다.


박물관의 블랙홀이라 부르는 수장고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이라고 합니다. 유물 한 점이 박물관에 등록되어 수장고에 보관되다 전시실로 옮겨져 일반인에게 공개되기까지 여러 공정을 고쳐야 합니다. 유물을 만질 땐 무조건 실리콘 장갑을 끼는 줄 알았는데, 표면이 매끄러운 도자기 같은 유물은 맨손으로 만져야만 하는 것처럼 유물마다 핸들링 방법이 제각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물에 따라 공기가 통해야 하는 것도 있고, 진공 상태여야 하는 것도 있는 등 적정 온습도가 제각각이기도 하고요. 액자도 그냥 바닥에 세우면 큰일 나는 거더라고요.


큐레이터에겐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 19년간 큐레이터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일들이 녹아있는 <한번쯤, 큐레이터>. 큐레이터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들려줄지를 고민하며 전시를 준비합니다. 유물이 경험한 시간과 사라진 사연을 찾아내어 이야기를 복원하는 즐거움을 들려줍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박물관 큐레이터는 그저 전시 그 자체에서 역할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록 원고, 오디오 가이드용 원고, 보도자료 원고 등 글쓰기의 달인이 되어야 합니다.


일정 기간마다 발령을 받는 공무원이다 보니 아이를 두고 주말엄마가 되어야 하기도 했고, 유물 구입이나 유물 차용을 위해 국내외 출장이 잦은 직업이기도 합니다. 마감의 불꽃을 피우자마자 아이를 출산하거나, 산후조리원에서 편집 마감을 하는 등 워킹맘들의 치열한 생존 세계가 펼쳐집니다. 무사히 전시를 오픈하고 막을 내리는 시간이 오면 다음을 위한 리셋 에너지조차 탈탈 털려있을 때가 많습니다. 공허함과 안도감이 물결치는 속에서 그럼에도 유물과 대화하는 큐레이터의 삶이 가져다주는 매력을 놓을 수 없는 큐레이터 정명희 저자의 이야기. 반복하는 일상을 견디는 힘이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무심한 듯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충분히 건져올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번쯤, 큐레이터>를 읽고 나면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도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찾아가 보고 싶어지고, 특별전 일정도 챙겨보게 됩니다. 전시 기간을 놓치면 다시 볼 날을 장담할 수 없는 기간 한정판인 특별전의 경우 일정을 살피다가 당시엔 그 특별전의 가치를 잘 몰라서 놓친 걸 몇 년 후에야 깨닫고 후회한 경우가 태반이긴 합니다.


무엇보다 국립중앙박물관 주변에 무척 많은 숲길이 있다는 걸 이번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집으로 돌아오기 바빠서 항상 가던 길로만 다녔는지라 놓쳤던 곳들이 수두룩하더라고요. 아이 어렸을 때만 열심히 들렸고 애가 커가면서 오히려 소홀했던 박물관 관람, 이번 겨울엔 꼭 다시 찾아가 보겠어요! 경주국립박물관은 리모델링 이후에도 갔었는데 새로운 분위기가 맘에 쏙 들었었거든요. 신라 특유의 금 유물들이 번쩍거리니 전반적으로 어둡게 분위기를 조정한 세심함도 눈에 들어왔었고요. 이제는 박물관에 찾아가면 큐레이터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게 뭘까를 생각하며 관람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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