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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이웃
박애진 지음 / 들녘 / 2021년 3월
평점 :
구미호, 뱀파이어, 늑대인간. 결코 인간과 어우러질 수 없다고 생각한 존재들이 이웃이라면? 그동안은 인외의 존재로만 바라봤다면, <우리가 모르는 이웃>에서는 사람이지만 조금 다른 피를 타고난 존재로 시각을 바꿔봅니다. 판타지 장르 소설의 단골 소재인 만큼 흔히 생각했던 뻔한 전개를 뻥 차버리는 기막히고 멋진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이웃>은 환상웹진 거울 창단 멤버로서 참여한 100호 특집 단편소설에서 출발해 세 편의 연작소설로 완성되었고, 2017년 교보문고 출판 브랜드 마카롱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1년 들녘 출판사에서 미스터리, 서스펜스, 로맨스 장르를 아우르는 미스터 아일랜드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되어 종이책 마니아인 저는 이번에야 이 멋진 스토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우리가 모르는 이웃>.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다 이십 대 중반이 되면 그 모습 그대로 백 년간 나이를 먹지 않는 특이한 핏줄의 이야기 「나, 너와 함께」로 시작합니다.
백 살이 되기 전에 젊은 남자의 간을 먹으면 천 년을 더 살 수 있습니다. 단, 백 살이 될 때까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시간은 평범한 인간처럼 흘러갑니다. 젊음을 유지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있다면 천년의 삶을 살지 못해도 괜찮을까요. 백 살이 되기 전 아이를 낳고 천 년의 삶을 포기할 것인가, 간을 먹고 천 년을 살 것인가의 선택인 겁니다.
지금의 '나'가 있다는 건 내 윗대가 천 년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직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사고사 이후 홀로서기한 '나'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팍팍한 생활고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1년 반만 지나면 백 살이 되어 뒤늦게 인연이다 싶은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지만, 그 남자는 영 뭉그적대기만 합니다. 이제는 아이를 낳고 천 년의 삶을 포기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핏줄을 타고났음에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림살이가 팍팍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물먹은 솜을 이고 걷듯이 힘겨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나'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도 않고 세상에 치여 살아왔습니다. 할머니는 임종 직전 "너는 천 년을 살거라."는 말을 하셨지만 이렇게라면 천 년의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세 편의 연작이 수록된 <우리가 모르는 이웃>중 첫 번째 이야기 「나, 너와 함께」는 결말에 이르러 슬며시 드러나는 반전과 감정선이 정말 예술이더라고요. 이 한 편만으로도 장편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정말 좋겠다 싶을 정도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첫 편부터 감정선에 푹 파묻혀 허덕였는지라 다음 이야기들은 심드렁해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우였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늑대라고 네발로 뛰지는 않는다」는 마음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 설레며 읽게 됩니다.
어린 시절엔 작고 초라한 신체로 자신감이 없었던 '나'. 하지만 다쳐도 순식간에 낫고, 일 년에 두 번 마음껏 힘을 발산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독특한 핏줄을 타고났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늑대인간으로 알고 있지만, 네발로 뛰지도 않고 털도 자라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있습니다. 반년 동안 40센티미터가 넘게 크고 나서는 그 여자애와 사귀게 됩니다. 초라했던 과거의 나에 대해 다 알고 난 뒤에도, 이런 핏줄을 타고난 나를 좋아해 줄지 걱정스럽습니다. 초라한 신체로 자존감이 없었던 '나'는 이제 남들보다 우월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여전히 걱정과 의심이 솟구치기 일쑤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붉은 오렌지 주스」는 언제나 착한 막내딸 이미지를 유지하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는 사람을 홀릴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흔히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핏줄입니다. 붉은 오렌지 주스를 잘 마시고 너무 예쁘게 웃지만 않는다면,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탈 많은 언니들에 비해 착실하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으며 살아왔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나타나고부터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굳건했던 이미지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성장통은 견디기 너무나도 힘겹습니다. 그저 다 지나갈 거라는 말에 한 줌 희망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상처는 봉합되어도 흉터는 남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척할 수는 없습니다.
"넌 넘어진 거야. 누구나 넘어질 수 있어." - 우리가 모르는 이웃
다른 이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기만의 속사정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모르는 이웃>. 남들과 다른 핏줄을 타고난 이들의 관계가 얽혀 서로의 이야기에 스며든 세 편의 연작은, 언제나 다수에 속하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슬며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특별한 핏줄 운운하지 않더라도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읽게 되는 건,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은 내 쪽이 소수가 될 수도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는 초반에는 왜 이런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우월함을 발휘하지 못하고 억누르려고 드는 걸까 싶었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다수에 속하기 위해 처절히 애쓴 소수자들 앞에는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들을 철저히 외면하려 드는 다수의 인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이웃>은 그 지점을 건드립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다름'을 가진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라고 말이죠.
"이건 그저 체질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 우리가 모르는 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