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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장미
정이담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6월
평점 :

뱀파이어 소재는 좋아하고, 퀴어 로맨스 소재는 낯설고. 살짝 망설이던 차에 작가 이력에 끌려 결국 읽게 된 <괴물 장미>. 심리학과 전공 출신에 가정폭력 및 아동보호 관련 전문기관에서 재직 중이라는 정이담 작가의 이력이라면 여성들의 내면 심리 묘사가 매력적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요. 브릿G 제1회 로맨스릴러 공모전 우수작에 선정되었으니 믿고 봐도 좋은 뱀파이어 퀴어 로맨스물입니다.

가정폭력을 짐작하게 하는 첫 문장. 주정뱅이의 딸로 살며 폭력의 희생양이라는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질 못해 막막한 메리 제인. 주변인이나 경찰조차도 도와주지 않으니 참고 또 참는 수렁에 빠졌습니다. 도망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꿈꿀 뿐입니다.
메리 제인에게 한 줌 위로가 되는 건 그림을 그릴 때입니다. 지하도 벽에 거대한 황금 장미를 그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을 목격합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비명과 핏물이 흥건한 현장에서 마주친 황금색 홍채. 다음날 자신의 방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을 잃은 채, 전날 사건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뉴스로 접하면서 두려움은 짙어집니다.
며칠 후 우아하면서도 당당한 바네사를 만나게 되는데, 홀린 듯 따르게 되는 매혹을 뿜뿜하는 뱀파이어였던 겁니다. 쎈 언니 기운을 풀풀 풍기는 바네사의 뱀파이어 친구 리사까지 합세하면서 뱀파이어와 인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자존감이 바닥인 메리 제인과는 달리 그들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입니다. 바네사는 특히 메리에게 호감을 나타내는데, 메리 스스로도 왜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뱀파이어의 살벌한 사냥을 목격하고 나니 더더욱 혼란스럽습니다. 괴물이란 자고로 술주정뱅이 아빠 같은 모습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어김없이 폭력의 날을 맞닥뜨린 메리 제인을 도와준 바네사와 리사. 메리는 그들과 함께 멜리니라는 새 이름을 얻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섭니다.

바네사와 리사가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었는지, 바네사는 왜 멜리니를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과거는 끔찍하게 마녀사냥 당하는 여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신의 이름을 빌어 간음하고 살인하는 인간과 그들을 응징하는 뱀파이어. 증오의 표적이자 미약한 존재였던 여성의 이름으로 이 세계에 곪은 것들을 없애려 발버둥 치는 이들의 이야기 <괴물 장미>.
오롯이 '나'로 살고 싶어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뱀파이어뿐만이 아닙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불합리한 상황에 싸우다 지친 수사관, 술자리에서 희롱을 당하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는 기자 등 존재의 증명을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소설 밖 현실의 모습입니다.
바네사와 멜리니, 리사의 행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뱀파이어물이기에 일부는 예측 가능하겠지만 <괴물 장미>는 용두사미만큼은 아니네요. 뒤로 갈수록 더 탄탄해지는 느낌입니다. 퀴어 로맨스 묘사 부분은 제 취향은 아니다 보니 감흥 없이 읽어내려가는 바람에 두근, 심쿵 요런 감정은 못 느껴 흥이 좀 덜하긴 했지만요.
자신의 상황이 비참해 '왜 하필 나야?'를 곱씹던 메리가 멜리니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힘없는 목소리를 드러내기까지의 여정에 공감하고 응원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