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일이다. 별일이 없어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인데. 밖에 나가고 싶다, 답답하다, 이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첫날 목발을 짚어보고는 아, 밖에 나가는 건 무리다라고 결론 짓고 집안에만 있어야지 했는데 그 명확한 한계가 마음을 밖으로 끌고 가지 않는 선이 되었다. 이런 마음이라면 감옥도 견딜 만할까.


오랜 불안,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방황의 마음. 이것들은 어디서 왔는가. 오은영 선생님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선택권과 경계없음은 오히려 불안을 촉진한다는 걸 알았다. 부모는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너무 많은 자유도 너무 많은 통제도 좋지 않다. 나는 엄마의 방목 아래서 컸다. 모든 것은 내 선택과 의지로 이뤄졌지만 명확한 바운더리가 없던 아이는 혼란스럽고 두렵고 불안했다. 가끔 망망대해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은 그래서였을까.


늘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어서 둘다 얻지 못했던 나인데, 밖이 아니라 안을 선택하자 밖의 하늘과 푸르름과 바람과 적당히 기분 좋은 소음들이 크게 그립지 않다. 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이 발견은 정말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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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7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22-06-0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활의 재발견이군요. 문득 소소한 일상이 눈부신 그런 날도 있죠.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6-08 13:43   좋아요 0 | URL
되게 새로웠어요 :)
 

너무도 황당한 일로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었다. 발뒷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아서 아직 깁스가 안 된다길래, 목발 짚으면 뭐 다닐 만하겠지 싶었는데.... 목발을 짚고 걷는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구나! 양손이 목발에 묶여있기 때문에 뭔가를 옮길 수 없고, 목적지에 다다르면 목발을 어딘가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계산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여러 번 왔다갔다 해야 한다. 무엇보다 무거운 내 몸을 목발에 의지하고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오로지 서있기 위해서 에너지의 70%를 쓴다는 펭귄이 된 기분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기 위해 이것을 저쪽으로 옮기기 위해 에너지의 70% 이상을 쓴다. 별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밤이 되면 녹초가 된다. 


뭐든 실이 있으면 득도 있는 법. 사소한 것들을 포기하게 되었다. 다소 깔끔쟁이인 편이라 하루에도 두세 번씩 청소기 돌리고, 설거지는 밥 먹고 나면 바로, 밥을 먹는 곳이자 이것저것 많은 일을 처리하는 식탁은 늘 잡다한 물건이 놓이지 않도록 신경써왔는데...


우리집에서 이런 걸 신경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아이는 머리끈과 패드를 식탁에 올려놓고 하루가 지났는데도 그대로. 신랑이 아침에 마신 커피 테이크아웃컵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그대로다. 바닥 여기저기에 흘린 머리카락을 보면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다. 다 할 수 없다. 안 된다. 그냥 두자. 청소해라, 뭐해라 말하는 것도 한두 번이고. 그냥 둔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뭐, 이것도 괜찮다.


당분간 사소한 일에는 눈감고 지내보자. 아무일도 없다. 아무일도. 펭귄처럼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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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5-31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육 파열이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네요.
사소한 일 소소하게 흘려보내시며 어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6-01 20:49   좋아요 0 | URL
초기라 3주 정도 걸린다는데 시간이 더딘듯 빠르네요~ 사소한 것들 내려놓기 연습 중입니다 :)
 
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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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고 있네요. 애디가 말했다. 원하는 걸 다 얻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대요? 혹시 있대도 극소수일 거예요. 언제나 마치 눈먼 사람들처럼 서로와 부딪치고 해묵은 생각들과 꿈들과 엉뚱한 오해들을 행동으로 옮기며 사는 거예요."

-143p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고쳐줄 수는 없잖아요. 루이스가 말했다.

늘 고쳐주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죠.

-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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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씨.

여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면

전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천둥씨를 앞세워

곧 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전 마음이 설레요.

당신의 존재감에

압도당하는 그 순간이

너무 기다려집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당신이 스며들면

이리저리 방황하던

마음은 당신에게 오롯이 향합니다.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의 거대한 존재감에

전 제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래요, 

하찮은 제 존재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저 거대한 폭우씨 앞에서는

너도 나도

도긴개긴이다.

뭘 그리 아등바등하니?

바람아 불어라,

천둥아 쳐라.

우리 모두

폭우씨 앞에서는

별볼일없는 인간이다!

다 똑같아.

그러니 폭우씨가 온 순간만큼

우리,

인간세계의 온갖 고민과 고통은

다 내려놓자.

뭐 이런 기분이랄까요.

오늘 너무도 잠시 왔다간 폭우씨.

또 언제 오시렵니까?

커피 한 잔 타놓고

오래도록 보고싶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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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5-1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우씨가 간만 보고 떠난 바람에 물뿌리개 들고 화단을 다섯번이나 왔다갔다 하고 말았죠.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19 09:21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화단에 식물 키우는 남자였군요!!! 어젠 바로 가버려서 너무 아쉬웠어요 :(
 
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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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노는 가난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드러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수습되어버린다. 

-15p



극복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극복이 아니라 참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다.

그 일에 매몰되어 생계를 내팽개칠 수 없으니까 잊은 척하는 것이다.

-21p



오늘의 비애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오늘의 비애가 아니다.

과거의 비애가 선을 침범해 오늘의 비애로 넘어온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그 비애와 선을 그어야 한다. 

-38p



너도 알겠지만 누군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땐 말이야.

그 일이 맞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견딜 만하니까, 단지 그 이유로 계속하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야.

-143p



"그 집이 너무 엉망인 집이었다. 외벽에 금이 죽죽 가 있고,

주변엔 쓰레기랑 개똥이 널려 있고, 나는 그때 그 사람들한테

고기 살 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

아니지. 고기를 먹는 가족의 풍경이 그 집에서 펼쳐질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

그 집은 가난의 상징 같았거든.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어.

그런데 그게 깨진 거지.

저 집도 우리집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고기를 구워 먹는 집이고, 

부부는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하루를 잘 영위하는 가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어.

그때 가난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웠어.

고기가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가난한 게 아니다."

-197p



숙모가 사랑하는 가족처럼, 나도 적지만 조금씩이라도 돈을 벌어올게요.

그러면 가족이 될 수 있죠?

가족은 그런 거니까. 불행한 미래를 함께 방어하는 존재이니까.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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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5-17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한동안 속에 남아있던 응어리를 툭 뱉어내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18 10:33   좋아요 0 | URL
터트리기보다는 감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가봐요. 희망적으로 마무리돼지만 씁쓸한 현실이 많이 반영돼 있던 소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