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평점 :
어릴 적에 친구들과 산에 갔다가 사소한 일로 삐쳐서 혼자 내려온 적이 있었다. 낙엽을 주워오는 숙제를 하러 갔던 터라 수풀을 헤집고 무작정 걷다가 보니 어느새 깊은 숲속이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그길로 냅다 집까지 뛰어갔다. 내가 여기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홀로 그곳을 헤매다가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낯선 곳에서 미아가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 『야시』는 그런 공포를 자극하는 소설이다.
이 책에 담긴 「바람의 도시」와 「야시」는 두 편 다 이쪽 세계에서 우연히 다른 세계로 흘러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벚꽃 놀이를 갔다가 아빠를 잃어버리고 집을 찾아가던 길에 우연히 비밀의 길 ‘고도’를 알게 된 소년. 열두 살이 되던 해 친구와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친구의 죽음을 겪게 된 소년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비의 사원’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대가를 치르고 무언가를 사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는 야시(夜市)를 배경으로 한다. 어릴 적 축제에 갔다가 동생을 팔아 야구 재능을 산 유지는 다시 야시가 서는 날, 동생을 되찾아 오기 위해 그곳을 찾는데…….
밤과 꿈과 환상이 얽힌 다른 세계, 한 번쯤 발을 들여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지만 매혹적인 만큼 두렵기도 하다. 영원히 그곳을 떠돌며 그 세계의 사람도 될 수 없고, 원래 내가 살던 곳으로도 돌아올 수 없다면? 이 이야기들이 무서운 것은 많은 신화나 옛이야기가 그러하듯 한 인간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모험을 겪으며 한층 더 성숙해진다는 해피엔딩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만 그곳을 알기 전과 삶은 많이 달라진다. 그쪽 세계의 것이 되어버린 ‘친구’와 ‘동생’을 이 세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서 ‘죄책감’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을 뿐.
‘고도’나 ‘야시’에서의 경험은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 아니라, 나에게서 소중한 사람을 앗아가고, 나도 모르게 저지른 나의 죄악을 상기시키는 ‘잔혹한 기억’에 불과하다. 금단의 영역을 호기심만으로 탐색하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큰 것은 아닌지. 하지만 저자는 「바람의 도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전함으로써 그 또한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 스스로 감당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은 성장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변화도 없고 극복도 하지 않는다. 길은 교차하고 계속 갈라져나간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미아처럼 혼자 걷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끝없는 미로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제12회 일본호러소설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오감을 자극하는 짜릿한 공포는 없다. 오히려 서정적이고 담담한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느릿한 걸음으로 다른 세계를 떠도는 듯한 몽환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저들이 겪은 악몽이 무엇인지 떠올리며 안타깝고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리는 기묘한 환상 세계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지는 다이내믹한 공간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찾고, 그리워하고, 그런 상황을 만든 자신을 꾸짖으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마주해야 하는 내면 갈등이 심화된 세계이다. 간결한 문장들 사이에서 환기되는 이미지를 비집고 나도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서본다. 나는 과연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