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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어느새 박완서의 수다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십 년이 넘게 그녀의 글을 읽지 않았다.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박완서의 어느 소설을 읽곤 다시는 이 여자의 책을 읽지 않으리 결심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제목도 내용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이, 그녀의 삶이 참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서 나는 그 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굳은 결심과 의지를 담아 내뱉던, 펄펄 끓던 청춘은 굴곡지고 구차한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던 듯하다.
삶이 그러한 것을.
내가 다시 박완서의 글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건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이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박완서의 <그리움을 위하여>편을 들었고, 감동했다. 박완서란 이름은 소박하고 정겨운 글의 대표주자가 아니었던가? 내 이미지와는 달리 그녀의 글은 솔직하고 신랄하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차마 내가 남세우스러워서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내 안의 음습함을 그녀가 대신해서 까발려주는 느낌이 들었다. 사촌동생을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으로 부리면서 느끼는 상전의식이나 자기합리화, 사촌동생이 사랑에 빠져 재혼했을 때 느끼는 질투의 감정 등 아름답고 멋지진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볼 법한 감정의 질곡이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돼 있던지.
안전한 둥지를 찾아 그 남자를 버리고 맞선 봐 시집가 버린 <그 남자네 집>의 그 여자나, 시어미에 대한 분노를 시아비의 팬티에 한껏 담아 패대기치는<마흔아홉 살>의 그 여자, 고국의 피붙이들에게 미제 선물을 보내는 맛으로 생기를 유지하던 <후남아, 밥 먹어라>의 그 여자, <촛불 밝힌 식탁>의 똑부러지게 집에 없는 척 가장하는 며느리...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람이면서 '나는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야'라고 말하는 거부하고 싶은 내 안의 그림자, 에고들.
결혼하기 전엔 늘 '남의 일'이었던 것 같던 일들이 이제는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 건 내가 아줌마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박완서의 수다가 맛깔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