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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부터 겨울 동안이, 내가 인도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때이다. 이상도 하지, 나는 분명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속이 비칠 듯 엷은 바지를 입고 인도를 돌아다녔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유독 그곳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알게 된다. 아, 벌써 겨울이구나. 하고.

10월 25일쯤이 내가 인도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갔던 날이다. 무지 더운 인도는 시월에 내가 발을 디뎠을 때도 한여름과 같았다. 두 달이던 여행이 세 달로 늘어나며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추운 인도의 겨울과, 추운 지방에서 얇은 옷밖에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일들도 경험했지만, 내 기억 속의 인도는 언제나 더운 나라다.

분명, 몸의 기억이란 게 있다. 유독, 날이 쌀쌀해지는 즈음이 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한국의 겨울과 인도에서의 겨울이 묘하게 겹쳐진다. 밍기적밍기적 따듯한 이불 속의 기운과 더러운 베드 위에 침낭을 깔고 누웠던 침낭의 그 매끄러운 감촉이. 커피빈에서 진한 드립커피를 마실 때 입안에 퍼지는 그 쓰고 고소한 맛과 달디달았던 캘커타의 짜이 맛이. 멋진 코트를 사기 위해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발걸음과 좀더 예쁜 펀자비를 사기 위해 델리를 쏘다니던 기억이.

그렇게 겹쳐진다.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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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와타나베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인도 공항에서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같이 타고, 태국 공항에서 친구가 되어 사흘 동안만 같이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중 만난 외국친구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그리고 내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나의 친구.

하지만 내가 인도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건, 히로다.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문 덕에 바라나시에 친해진 히로와 나는 다음 여행 경로가 같았다. 카주라호에서 전에 만났던 젊은 아저씨 두 명과 동갑내기 남자아이 '김군'을 만난 덕에 나는 일행을 넷이나 두게 되었다. 다섯이서 다음 여행지 '오르차'로 갔다. 오르차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숙소를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찌어찌 한 게스트 하우스에 더블룸 두 개가 남아 있었다. 가격도 적당했고. 자, 그런데 남자 넷에 여자 하나다.

아저씨 둘은 원래 일행이었으니 같은 방을 쓰고, 김군과 나와 히로는 더블룸에 사이드 베드 하나를 놓고 자기로 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이니 크게 걱정될 일은 없을 테고.

하지만 김군은 다음 날 떠났고, 나는 히로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사이드 베드가 치워진 방에는 큰 더블 베드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중요한 걸 하나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아닌 '사람의 존재' 자체가 주는 안도감이 있음을. 히로와 방을 같이 쓴 이틀 동안, 나는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어 자고 또 자고 또 잤다. 그때까지 6,7시면 눈을 떴는데 10시, 11시가 되도록 나는 졸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옆에서 들리는 쌔근쌔근 잠자는 소리, 혼자서 온전히 나를 지키지 않아도 옆에서 누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안도감. 뒤돌아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무장돼 있던 나를, 그제사 해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푹 잤다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잠들은, 사실상 나를 지키기 위해 반쯤 깨어 있었던 것이다.

히로가 상하이에 가기 위해 델리로 떠나던 날(그는 여자친구와 상하이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우리는 잔시로 갔다. 히로는 거기서 버스를 타야했고 나는 다시 오르차로 갔다가 다음 날 나와서 기차를 타야 했다.

버스 타는 걸 보고 가겠다 했더니 내가 릭샤(태국의 뚝뚝이 같은 이동수단) 타는 걸 보고 가겠다 한다. 하는 수 없이 릭샤에 올라탔는데 히로가 편지를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 하지만 '여행 중에 만났던 히로'는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일상의 그로 돌아갈 것임을, 나중에 다시 만난다 해도 내가 기억하는 그 히로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히로가 수만 가지 자신의 모습 중에서 좀 더 열린 모습을 내게 보여준 것이라는 것도, 그것이 여행 중이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 나는 또 혼자가 되어야 했다.

눈물의 작별 후, 봉투를 열었더니 낙엽 하나와 두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히로는 부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무 아래서 나뭇잎 세 장을 주었는데, 하나는 여자친구에게, 하나는 자신에게, 하나는 나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히로의 편지는 아리송했다.

너를 만나서 정말 좋았어. 너의 미소 때문에 난 행복할 수 있었어. 아마 널 만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을 거야. ......... 그녀의 웃음과 너의 웃음은 꽤 다른 의미인 것 같아. 이건 내게 미스터리야.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너와 얘기할 기회가 생겨서 좋았어....................난 정말 많이 생각했어. '내가 한국어를 할 수 있다면, 너와 더 많이 더 많이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블라블라. 끝.

재작년에 일본에 가서 히로를 만났다. 역시나 그는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착실한 일본 남자로 돌아가 있었다. 예상했으나 나는 조금 슬퍼졌다. 왜 인간은 저렇게 적응력이 빠른 걸까, 하고. 여행 때처럼 좀더 방황하고, 좀더 활기차고, 좀더 즐거우면 안 되는 거야?

***

히로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Indian river & Korean river]에 관한 것이다.

히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도의 강과, 한국의 강이었다고 했다.

흐르는 강물에서 손바닥으로 물을 퍼낸다고
그 물이 곧 강은 아닌 것처럼
인도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지만,
그게 곧 한국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퍼낸 물에서
강을 '느.낄.수.있.듯'
인도에서 만난 한국인들을 통해
한국을 느낄 수 있었다.고.
 

나는 히로가 내 긴 여행 중에 들어와 좋은 기억을 남겨준 것에 감사한다. 달콤한 잠과 즐거운 대화, 보리수 나뭇잎과 크리스마스 선물 편지, 즐거운 웃음. 그 순간이 좋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 아리가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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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 인 중국 2007-11-0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햐, 멋진 경험이었네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가져다주는 안도감,,,여행이 아니면 느낄수 있을까요. 전 중국인데, 여행이 아니라 출장중이죠.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로그인이 되지 않아 이렇게 유령으로 남겨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11-03 21:21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하-
유령의 모습과 '잉크 인 중국'이란 아이디가 너무 잘 어울려요.
이 유령 은근 귀엽네요.
잉크님 안보이신다 했는데
(역시 제 글에 답글 달아 주는 건 잉크님뿐이라는^^)
출장가셨구나.

출장임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경험 많이 하고 오세요.
갔다와서
재밌는 얘기도 해주시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