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아주 피곤하고 초췌한 상태였다. 벌써 2주 이상 붙들고 있던 교정원고와 프로젝트 보고서와 각종 회의자료 등 행정업무들이 엄청 쌓여있었다.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밤을 새웠던 탓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갈아입지 못한 옷에서는 담배냄새와 홀아비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니 그가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 "오빠, 진짜 오랜만인지?" 라고 묻고,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포옹하려고 팔을 벌리기 전까지, 내 상태가 어떤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거북이 자세로 목만 잔뜩 내민 채,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내 눈이 충혈되었는지 어떤지 신경도 못 쓰고 있었다.


그가 웃으며 팔을 벌려 포옹하려 할 때, 나는 순간 조금 멈칫했다. 일단 그가 이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온 것부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10년? 까지는 아닌 것 같고, 아니 거의 10년 다 된 것 같은데. 그해가 2008년이었던가? 2009년이었던가? 암튼 거의 10년만에 만난 그는 하필이면 이틀 연속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바쁜 날, 자판을 두드리느라 정신 없는 순간에, 아주 비현실적인 상황에 등장했다.


예전에 한창 친했던 시절이었다면 그가 포옹하려고 팔을 벌렸을 때, 망설임 없이 안았을 것이다. 비록 그때 그는 여성이 아니라 친한 동생이었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지금 그가 내게 여성이란 뜻은 아니고 그저 그 긴 시간의 간격만큼이나 어색함이 생겼다고 해야할까? 나는 선뜩 그를 포옹하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다. 


그 찰나의 순간, 또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혹시 내 몸에서(혹은 옷에서) 냄새가 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담배냄새라면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홀아비 냄새 같은 게 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짧은 순간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는 자세에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가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아주 짧은 순간 멈칫했을 때, 그만큼 먼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고, 두어번 어깨를 토닥였다가 떨어졌다. 어색한 내 팔만 제대로 그를 꼭 안아주지 못하고 어깨에 살짝 걸쳐졌다가 떨어졌다.


그 목소리, 그 표정, 그 웃음, 그 말투. 그는 정말 변한게 하나도 없는 듯했다. 마치 마지막으로 만났던 바로 다음 날 그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그는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내 얼굴에서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떠올랐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디어 가셨다.


"오빠, 하나도 안 변했네. 옛날 그대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가 먼저 했다. 나는 이미 흰 머리도 많고, 많이 늙었단 얘길 종종 들었던 터라 사실대로 말해도 별로 충격받지 않았을텐데, 게다가 그날 따라 더욱 피곤하고 초췌한 상태였기에, 그의 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1초가 급할만큼 바쁜 시간이어서 인사를 나누자 마자 나는 조금 초조한 기분이었다. 그와 그간의 소식을 나누며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날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잠깐 시간 내줄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지금 정말 바쁜 순간이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답했다. 그는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서 사무실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곧바로 다시 컴퓨터 화면을 향해 앉았다.


한 10분 아니 20분 정도 지났으려나, 무지 급한 건 하나를 해결하고, 그가 어디 있는지 찾아나섰다. 한 회의실에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일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 때문에 내가 일하는 사무실이 속해 있는 건물을 찾아왔고, 여기에서 내가 협동조합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랬지만, 굳이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고, 그저 여기 오는 길에 온 김에 나를 만나 같이 이 일을 얘기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암튼 단지 거의 10년 만에 만나 수다나 떨려고 나를 찾았던 게 아닌 것만은 맞다.


네 가지 이유


그가 찾아오고 며칠 후에 한 후배랑 술을 마셨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강의가 있었고, 한참을 떠들고 나왔더니 배가 고팠다. 이미 식당은 다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고, 집에 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곤하고 지친 기분이었다. 뭔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술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함께 먹고 마셔줄 사람이 필요했다. 가끔 부르곤 했던 후배들은 그날 따라 다들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바쁘겠지. 한창 바쁜 시기니까. 그러다 생각난 한 후배에게 연락했다.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형이 웬일이슈? 전화를 다 주시고." 라고 퉁명스럽게 받은 녀석에게 오늘 시간 되냐고 물었더니, 일이 있어서 멀리 와 있고, 아주 늦게 끝날 거라고 했다. 이 녀석도 안 되는구나 생각하고 포기하려다가 한 마디만 더 했다. 오늘 꼭 술을 마셔얄 할 이유가 4개 있어. 함께 마셔주면 좋겠어. 오면 그 이유를 말해줄게.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녀석은 잠시 고민했던 듯 다시 연락이 와서 곧 출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리가 있어서 오는데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우린 약속 장소를 정했다. 녀석이 도착하기까지 1시간 가량 할 일이 없었다. 어딘가 먼저 들어가서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마땅히 가고 싶은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여기저기 걸어다녔다. 그렇게 다니다가 먹고 싶은 게 보이면 그냥 들어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할 때까지 1시간 동안 나는 그저 돌아다니다가 지하철 역 앞으로 돌아왔다. 정말 배가 고파 마지막 몇 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그를 만나 연어랑 참치에 소주를 마셨다. 그는 나름 예의를 차리느라 곧바로 4가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실 짧은 순간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지만, 그 4개의 이유는 다 사실이었다. 억지로 만든 것은 아니란 뜻이다.


4개를 한번에 다 말해버리면, 녀석이 가버릴까봐 하나 말해주고, 한참 다른 얘길 하다가 소주 한 한 병을 비우고 나서야 다른 이유를 말해줬다. 밤은 깊어갔고, 접시의 연어와 참치회는 다시 채워졌고, 소주병은 쌓여갔다. 마지막까지 하나의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있었는데, 그가 이제 말해주지 않으면 가겟다고 선언해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앞의 다른 이유들은 그저 그날과 최근의 내 기분과 관련한 이유였다. 그날만큼은 꼭 먹어줘야 할 나름의 이유였다. 마지막 이유는 앞의 것들과는 좀 달랐다. 꼭 그날은 아니었지만, 그때 즈음이 이혼한 지 2년째 되는 시기였다. 


정확하게 이혼한 날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근데 그 날이 뭐 중요한가? 이미 결혼 생활의 절반 이상을 부부라는 애틋함이 없이 살아왔고, 벌써 오래전부터 별거와 이혼을 고민했고, 이혼 수속만해도 3달이나 걸렸던 것을. 사실 이혼은 이미 가정법원에 서류를 접수했던 때에 결정난 게 아닌가. 그러니 이혼 수속이 완료된 날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찬 바람이 불고, 옆구리가 시려운 어느 즈음이라 여기면 될 일이다. 그래야 술 마실 핑계가 더 생길 게 아닌가! 


그때까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같이 술을 마시던 녀석이 갑자기 진지해지더니, 나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술자늘 비웠다. 같이 슬퍼해주겠다는 의미였을까? 하지만 것도 잠시 녀석은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근데 그게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인 건 알겠는데, 같이 슬퍼해줘야 하는 거유? 아님 축하해줘야 하는 거유? 그걸 모르겠네." 녀석의 말에 나도 크게 웃으며, "글쎄 말이다! 나도 모르겠네. 둘 다 해주라!" 라고 받았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접시는 비워졌고, 술병은 쌓여갔다.



 













요즘 책을 계속 사고 있다. 읽는 속도는 엄청 느린데, 자꾸 사기만 하니, 읽지 않은 책들이 엄청 쌓인다. 매일 야근 아니면 술이니, 책 대체 언제 읽나? 어제도 책을 들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얼마 읽지도 못하고 잠들었다. 물론 당연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지 전에 술을 마셨다.


오늘은 학교 강의와 보고서 발표 때문에 정장을 입고, 그 위에 새로 산 코트를 입고 출근했다. 지난 번 제주에서 엄청 떨고 온 이후로 꼭 코트를 사리라 맘먹었었다. 옷 고르는 센스는 갖지 못한 덕분에 어지간하면 비싼 옷을 사지 않으려 한다. 비싸게 주고 샀다가 맘에 안 들면 정말 후회되니까. 그래서 싸면서도 나름 괜찮은 스타일을 골랐다.


오전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오후 늦게 모든 외부 일정을 다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어, 정장 입었네?", "무슨 일 있으세요?" 난 그저 웃으며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요." 라고 답했다.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날엔 데이트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데이트는 커녕 저녁도 못 먹고 야근하다가, 일하기 싫어서 이렇게 쓸데없는 글을 두드리고 있다. 에이, 일도 잘 안되고, 집에 가는 길에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이불 속에서 책 읽는 시늉 하다가 잠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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