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글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다가 서재에 들어와 다른 이들의 글을 읽었다. 언제 읽을지도 모를 책들을 부지런히 보관함에 담고, 어떤 이의 감정에 동조해 한참을 공상에 빠져 있다가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올라갔다. 햇살은 뜨겁게 내 뺨과 정수리를 데우고, 바람은 머리칼을 흐트리고, 옷 자락을 붙잡아 흔들고, 담배 연기를 멀리 흐트렸다. 


문득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 멀리 아파트 사이에서 희미한 분필 자국 같은 낮달을 봤다. 반달이다. 저 희미한 존재감. 눈을 찡그려가며 보지 않았으면 쉽게 찾지 못했을 저 달이 마치 내 처지인 양 안쓰럽다.


잠시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바람이 다 태워버린 꽁초를 바닥에 비벼끄고, 갑에서 하나 남은 담배 하나를 다시 꺼내 불을 붙인다. 지난 주에 이미 넘겼어야 할 글을 아직도 붙들고 있는 나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원망을 잔뜩 뒤집어 쓰고 있을 나는, 그냥 저 달처럼 점점 희미해지다가 문득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담배를 다 피웠으니, 이제 다시 글에 집중해야지. 이제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은 떠맡지 말아야지.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얘기해야지 생각해보지만, 또다시 무리해서 뭔가를 받아와서 괴로워하리라는 걸 안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아까 그 낮달이 어느새 밤달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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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0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6-10-10 17:04   좋아요 2 | URL
오래전에 여러 단위의 사람들이 함께 소책자를 만들기로 했는데, 공동작업이다보니 각자의 글이 수준과 톤이 제각각이어서, 편집자 출신인 제가 편집 교정을 보면서 글의 통일성을 맞추고 톤을 일정하게 맞추는 작업을 하기로 덜컥 약속을 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손을 보려고 뚜껑을 열어보니 글을 아예 다시 써야하는 상황이라,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너무너무 하기 싫어서 계속 미뤘더니 결국 이렇게 마감에 닥쳐서 괴로워고 있습니다. ㅠㅠ

cyrus 2016-10-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같은 날 옥상 위에 올라가면 찬바람 맞고 마음이 뻥 뚫릴 겁니다.

감은빛 2016-10-10 17:05   좋아요 1 | URL
마음이 너무 무거워 아직 뻥 뚫리지 못 했습니다.
좀 가벼워져야 살랑이는 바람에 뻥 뚫릴 텐데요.

samadhi(眞我) 2016-10-1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를 다 손봐야 할 글들 보면 암담하죠. 힘이 쭉쭉 빠질 것 같네요. 작업량이 어마어마할테니. 달을 치어다 보는 감은빛님 마음이 느껴져요.
일본소설 「배를 엮다」가 떠오르네요.

감은빛 2016-10-11 02:58   좋아요 0 | URL
애초에 기획의도에 맞는 글이 별로 없었어요.

결국 처음부터 끝까제 제가 다시 써야 했어요.
물리적으로 단순히 쓰는 행위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문제는 기획의도에 맞게 써야 하고,
남들이 이 글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잘 써야 하는데,
그건 쉽지 않더라구요.

말씀 남겨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