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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외국인
이시백 지음 / 레디앙 / 2015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전에 이야기의 배경이 이 나라가 아닌 저 멀리 어딘가의 이름도 생소한 나라가 되어버린 이유를 들었다. 아니 근데 까멜리아라는 나라가 있기는 한가? 글을 쓰려고 검색해보니 없다. 아니 저자가 글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새로운 나라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니 어쩌면 '실제로 있는지 알수 없지만 검색한 결과에는 없었다!'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서두에 나오는 까멜리아의 역사를 읽으면서 역시 이시백이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짧은 글에 이시백 선생의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해학의 정신이 모두 잘 담겨 있었다. 아 정말 이래서 이시백 선생의 글은 무조건 읽을 수 밖에 없다.
역대 독재자들을 외국 이름으로 바꿔 놓았는데, 쓱 보면 누굴 말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승만은 '세이만'으로, 박정희는 '다사오 준장'으로 표현했다. 글머리에는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언급도 있다. "대머리가 벗겨진 군인 출신이 제 동기와 번갈아 대통령 자리를 해먹다가 쫓겨났다."는 문장이다. 본문에는 이름도 나온다. 낯선 이름이고 전두환과 노태우의 이름과 직접적인 연관을 쉽게 찾지 못해 그냥 넘어갔는데, 내용 중에 제 식구를 잘 챙겨서 절과 감옥에 잠시 갇혀 있어도 주위 측근들이 끝까지 충성하는 누군가와 아무도 챙기는 이 없이 늙고 병들어 있는 누군가를 비교하는 부분이어서 이들이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로구나 싶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노조원으로 은행 매각을 반대하다가 해고당해 이리저리 구르다가 현재 사채업자가 된 주인공 루반의 일상에서 시작한다. 실제 사채업자가 이렇게 돈 없이 궁상맞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반은 참 찌질하고 궁상맞게 살아간다. 이혼 당해 아이와 떨어져 살면서 양육비와 생활비를 제때 챙겨주지 못한다고 전처에게도 잔소리를 듣는다. 이야기의 배경은 IMF로 어려운 시기인데, 그 시기에 사채업자들도 저렇게 어려웠으려나? 오히려 합법적인 금융권보다 훨씬 더 형편이 좋지 않았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뭐 실제로 어떠했는지 지금 알 수 없으니 넘어가자.
루반과 같이 은행을 다녔던 옛 동료들을 중심으로 은행 매각에 앞장섰던 이,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이, 반대하지만 행동하지 못하고 동료가 해고당할 때 속으로 미안한 감정만 느꼈던 이 등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실체를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들 각자는 권력과 탐욕 그리고 정의와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 이런 이야기 전개 역시 이시백 선생이 가진 장점이라 볼 수 있다. 개성이 강한 다양한 인물들, 평면적이 아닌 입체적인 인물들, 그들이 이리저리 얽혀서 예측할 수 없게 진행되는 이야기 덕분에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
미국계 사모펀드이자 산업자본인 유니온페어가 재정상태가 건실한 까멜리아 은행을 BIS(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 수치를 조작하고, 주가를 조작해 헐 값에 날로 먹은 이야기, 그리고 나중에 엄청난 이득을 취한 뒤 팔고 빠지는 이야기, 그래놓고 유니온페어가 국가를 상대로 ISD(투자자-국가 소송) 소송을 걸 예정이라는 이야기, 초기 은행 매각 승인 당시에 외자 유치라고 떠들어댔지만 사실 매각에 쓴 돈은 국내 재계 유력 인사들의 비자금이었다는 이야기
이거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까멜리아라는 어디있는지도 모를(아니 존재하는지도 모를) 나라 이야기가 왜 론스타 이야기와 똑같지?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꿀꺽 했다가 다시 엄청난 시세차익을 챙겨 도망간 후,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ISD 소송을 걸었다. 그 1심 재판이 최근(2015년 5월) 있었지만, 정부는 모든 정보를 통제해 국민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당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자금이 외국 자본이 아닌 국내 유력 인사의 돈이었다는 이야기와 뭐가 다른가?
긴장감 있는 전개와 두껍지 않은 분량 덕분에 책을 손에 쥔 후, 거의 쉬지 않고 단숨에 읽었다.(중간에 아이들 밥 챙겨주느라 한 20여분 손에서 놓았다.) 한 3시간 쯤 걸렸던 것 같다. 읽는 중에 어려운 경제 용어와 개념들 덕분에 조금 머리가 혼란스럽긴 했다. 그래도 큰 줄기를 따라가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이시백 선생도 원고 쓰시면서 많이 어려웠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덮고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떠다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딱 뭐라고 할만큼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도 그 상태에서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담배만 땡길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 재계 유력 인사들(바로 검은머리 외국인들)이 각각 누구를 모델로 등장하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매각 저지 공대위에 속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대략 모델이 되는 사람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설령 작가가 그렇게 현실의 인물을 모델로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위기 상 매치되는 인물들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죄 외국 이름이라 게다가 문학에서 흔히 접하는 익숙한 영미권 이름이 아니라서 좀 거슬렸다. 나라 이름과 기업이름 등도 낯설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맨 앞에서 말했듯 왜 가상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상정하고 글을 썼는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이건 그냥 우리 이름으로 썼으면 훨씬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겠다 싶다. 예를들어 아까 말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내용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자칫 그게 군부독재 절친들 이야기라는 걸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아직도 이시백 선생의 이름을 보면 지하철에서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를 읽다가 난데없이 웃음보가 터져 주위로부터 일제히 묘한 시선을 받았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아, 정말 이 책을 공공장소에서 읽는 것은 '나 미친 사람이오!' 하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절대 공공장소에서 읽지 않고, 집에서 야금야금 읽었다. 이런 류의 책은 단번에 읽어줘야 맛인데, 야금야금 찔끔찔끔 읽으려니 도무지 맛이 나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이시백 특유의 해학 코드가 숨어 있어서 반가웠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는데, 옆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던 큰 아이와 동화책의 그림을 보고 있던 작은 아이가 "왜?", "아빠 왜 웃어?"라고 물었다. 왜 웃긴지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 녀석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아빠가 너희들을 위해 이 책을 잘 보관해둘테니 나중에 읽어보거라. 왜 웃을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