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의 마지막 연습
문득 날짜를 보니 벌써 8월 말이다. 바람이 부는 걸 보니 이제 곧 가을이 오겠구나 싶다. 곧 추석이 다가오고,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리라. 가을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3년 전 녹색당 창당을 위해 한창 바쁘게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아직 녹색당 창당이 정말 성공하리란 기대조차 없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창당을 시도했다가 불발로 그친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정당법이 아무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도록, 아주 견고한 장벽을 쌓아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녹색'이 들어간 이름의 "가짜" 녹색당은 있었다. 녹색 가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그런 정당. 이번 지방선거에 단 한 명의 후보를 내어 유권자들을 헷갈리게 만든 "가짜" 녹색당인 '국제녹색당'처럼 과거에도 이름에 '녹색'이 들어간 정당은 분명 있었지만, 진짜 녹색 가치를 표방한 녹색당은 없었다. 그 당시만해도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더 많았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이번 시도가 의미를 갖기 위해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설마 겨울이 지나 진짜로 창당을 할거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지난 3년간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진보 운동과는 달리 진보 정치에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내가 당 활동을 통해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 전이었다면 상상도 하기 힘든 변화다. 운동의 영역에서만 머물렀던 내가 정치의 영역으로 한발짝 더 앞으로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창당도 어렵다고 생각했고, 가까스로 창당을 하더라도 평당원으로 조용히 힘을 보태고 싶었는데, 지역 단위 운영위원이 되고, 당직 출마를 권유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벌써 8월 말. 지방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녹색당에서는 11명의 지역구 후보와 12명의 광역비례 후보를 냈지만, 모두 낙선하는 결과가 나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것을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은 컸다. 물론 높디 높은 현실의 벽도 몰랐던 건 아니다. 그래도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 특히 창당 당시 현역 기초의원으로 합류한 과천의 서형원 선배와 구미의 김수민 씨는 이번에도 무난히 당선되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선거가 끝나고, 선관위에 제출해야 할 서류들을 마무리하고, 내외부적으로 선거 평가를 시작했다. 평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평가 작업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하지만 달리 할 사람도 없었다. 선거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피할 수가 없었다. 하기 싫은 일은 능률이 오르지 않는 법이다. 대략적인 그리고 외부에 발표할 선거 평가는 허술하게나마 마무리가 되었지만, 내부적으로 제대로 평가서를 만들어보자는 계획은 아직도 다 이루지 못하고 미뤄두고 있다.
지난 7월 중순 전국 각지에서 선거에 참여했던 당원들이 모여 평가 워크숍을 가졌다. 그때 조별 토론 과정에서 나온 질문 중 하나는 "녹색당에게 지난 지방선거는 000 이다."의 빈 칸을 채우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다. 재치있으면서도 녹색당이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잘 짚어줄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여러 대답들 중에서 나는 '마지막 연습'이라는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녹색당은 2년 전 창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총선을 치뤘고, 곧바로 등록취소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재창당하면서 '녹색당'이란 당명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녹색당더하기'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등록하여, '녹색당'을 '녹색당'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허망한 상황에 처했었다. 다행히 헌법소원을 통해 당명을 되찾았고, 어렵고 힘들게 후보를 만들어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단계까지 왔건만, 다시 한번 현실이라는 쓰디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앞으로 녹색당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반정당의 정당'이라고 말하고, 기존 제도권 정당과의 차별점을 강조한다고 해도, 정당인 이상 선거를 통해 정치활동에 참여해야하고, 선거에서 일정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정치활동에 제대로 참여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음 총선과 다음 지방선거를 통해 살아남을 수 없다면, 녹색당에게 더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절박한 마음이 '마지막 연습'이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난다.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별개로 우리가 가진 녹색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한 의지와 희망도 필요하다. 당장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다보면 좀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는 희망은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 준다.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더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 현재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정당 100년의 역사
우리는 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녹색당 창당 과정에서 유럽 녹색당, 특히 독일 녹색당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에서 모든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도움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에 황소걸음 출판사에서 [사회주의 10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책을 펴냈다. 1권이 952쪽이고, 2권이 840쪽이니 2천쪽에 가까운 분량이다. 저자가 도널드 서순 이란 사실을 알고나면 이 어마어마한 분량이 조금 이해가 간다. 무려 5권짜리 [유럽문화사]를 곧바로 떠올렸을테니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현재 이 나라는 양당제의 거대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구정당과 그에 못지 않은 보수정당이 서로 대립하는 체제. 전체적인 판에서 본다면 거대여당이나 거대야당이나 그다지 색깔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 나라에서는 어째선지 보수야당이 마치 진보인 것처럼, 그것도 단 하나밖에 없는 진보이자 대안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 이런 어이없는 현상이 생긴 것일까?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분명 존재하건만 왜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그래서 녹색당을 비롯한 여러 소수정당들(그들 모두가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에는 제대로 된 진보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정당들도 있다.)이 이 거대한 늪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논의와 토론과 실천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선 과거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과거 유럽 각국의 다양한 진보를 표방한 정당들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이뤄냈는지 살펴보는 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 최소한의 도움을 얻는 방법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이 두꺼운 책을 읽는 일은 어렵다. 가뜩이나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책으로 눈을 돌릴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참담한 현실에서 책에 눈을 두는 것은 차라리 사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나는 이럴 때일수록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공부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저 필요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 몸으로 실천하는 것만큼, 고민하고, 필요한 것을 찾아보는 노력도 중요한 법이다.
도무지 혼자 다 읽을 자신이 없다면 마음 맞는 사람들을 찾아 함께 읽기를 제안해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빠짐없이 독파해야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정치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교양수준으로 전체의 흐름을 꿰고, 각 시기의 상황을 알아두면 될 일이다. 분량과 내용에 미리 겁 먹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덧붙임~~
자, 녹색당 동지 여러분, 가까운 당원들과 함께 이 책을 읽어봅시다. 또 자신이 진보정당 당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 굳이 당원이 아니라도 진보 정치를 지지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이 우리가 양당체제라는 거대한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