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솜씨

 

음식을 잘 만드는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딱히 요리라고 부를만한 대단한 음식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음식을 만드는 데 나름 재주가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전형적인 경상도 집안에서 나고 자라 부엌일을 해볼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몸이 약한 어머니께서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가끔 공장에 일을 나가셨는데, 그때 동생 밥을 챙겨주느라 계란을 굽고, 라면을 끓이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어린 내가 할줄 아는 건 뻔했다. 맨날 라면과 김치와 계란만 먹는 것이 지겨워서 라면을 끓일때마다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대부분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혼자 생각하고 해봤는데, 의외로 맛은 괜찮았다(고 기억한다.).

 

본격적으로 내가 음식을 좀 하는데 라는 잘난척이 시작된 건 자취생활을 하던 때였다. 앞서 말했듯, 딱히 잘하는 음식을 꼽기는 뭐하지만 대부분 내가 만든 음식은 괜찮았다. 대학 시절 어느 날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냉장고에 콩나물이 있길래, 아버지께 콩나물 국을 끓여드렸는데, 드시기 전에는 미심쩍어 하시더니, 드신 후에는 '니가 너거 엄마보다 낫다.'고 말했다. 그날 난 콩나물 국을 처음 끓여본 거였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그냥 혼자 생각한 대로 끓인 거다. 알고 있던 사실은 딱 하나였다. 콩나물이 다 익기 전에 뚜껑을 열면 콩나물 비린내가 나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거였다. 물론 아버지가 그냥 아들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 평생 내공을 쌓아온 어머니께 내가 비교나 되겠는가! 그저 비기너스 럭(초심자의 운)일 수도 있다. 어쩌다 소 발에 쥐 잡은 격으로 말이다.

 

한때 농사짓는 마을에 살 때는 옆집 형님이 놀러왔길래 김치찌개를 대접했다. 그 형님은 고향인 평택을 떠나 이곳저곳 떠돌며 여러 사업을 전전했고, 그 중엔 식당 운영도 있었다고 했다. 형님은 아무래도 못미더운 표정으로 내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찌개를 먹기 직전까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거 내가 못먹을 음식에 손을 대는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그 형님도 내 솜씨를 인정. 사실 다른 재료가 없어 멸치 다시 국물에 김치만 넣고 끓인 거였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각종 쌈채소를 잘게 썰어 넣은 게 나름 독특한 승부수였다. 형님은 아주 만족해하며 내 음식 솜씨를 인정했다.

 

이번에 세 차례의 집들이를 하면서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몇 가지 음식을 떠올리긴 했지만, 막상 집들이 때는 재료를 준비하지 못했다. 두번째 집들이 때, 아내가 김치전 재료를 준비해뒀는데 그게 내 실력을 발휘할 유일한 기회였다. 전부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얘길 여러 차례 들었다. 내공이 뛰어난 주부들에게 들은 칭찬이라 조금 우쭐했다.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음식을 만들지 않아서 솜씨가 많이 녹슬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기본은 하는 구나 싶었다.

 

한밤의 김장

 

한때 내가 자신있었던 메뉴 중 하나는 부추 무침, 부추 오이 무침이었다. 고춧가루와 소금으로 간을 보고 마늘과 각종 양념들로 맛을 내는 무침 류의 음식에 자신있었다. 김장을 직접 해보기 전에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결혼 후 해마다 가까이 계시는 장모님의 지도로 김치를 담가보니, 내가 자신있었던 그런 류의 음식이었다. 김장을 한번 해보니 다음에는 혼자 소량의 배추로 겉절이 김치를 뚝딱 만들수도 있었다.

 

우리 집은 아내가 채식을 하기에 젓갈류가 안들어간, 남들과는 다른 김치를 담근다. 작년까지는 년중 행사이니만큼 장모님과 아내가 일정을 조절해서 주말 하루 날을 잡아 김장을 했는데, 올해는 아내와 장모님 모두 바빠서 그랬는지, 계속 날짜를 잡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결국 주문해놓은 절임배추가 평일인 어제 도착했고, 아내는 저녁에 퇴근 후 둘이서 김장을 하자고 했다.

 

밤 10시 반이 넘어, 아이들을 재워놓고(사실은 방에 불끄고 문 닫아두고, 떠들지 말고 자라고 윽박질러놓고)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를 할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둘 다 피곤해서 그냥 오늘은 준비만 해놓고 잘 생각이었다. 아내는 꼼꼼하게 재료들을 구해놓았는데, 그것들을 다듬고, 씻고, 물을 빼기 위해 채반에 받쳐두는 것까지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무를 채칼로 가는 일은 약간의 기술과 힘을 필요로 한다. 김장때 늘 내가 하던 일이다. 난 쪽파를 다 다듬고 씻은 후에 무를 채칼로 갈기 시작했다. 무채가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더니,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무채를 미리 만들어놓으면 맛이 없다는데, 그냥 지금 양념을 만들어 둘까요?' 난 그러자고 했고 우린 또 바삐 움직였다. 채칼로 배를 갈고, 갓과 쪽파를 썰고, 찹쌀을 쑤는 등 바빴다. 이때까지만해도 양념만 만들어 놓고 김장은 내일 할 생각이었다. 시간은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때 다시 아내가 아예 그냥 지금 김장을 해버리자고 제안했다. 조금 피곤했지만 이왕 손을 댄거 그냥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절인 배추의 소금물을 빼기 위해 넓은 채반에 받쳐두고 다른 재료들을 장만했다. 아내가 30분만 물을 빼도 된다고 들었다 했는데, 거의 한 시간이 지나도 물이 덜 빠졌길래, 내가 손으로 하나씩 짰다. 배추에 속을 넣는 일은 내가 했다. 여러 해 반복해서 하다보니 동작이 손에 익었다. 장모님도 늘 손이 빠르고 잘 한다고 칭찬해주셨다. 어제는 워낙 피곤해서 손이 더 빨라졌다. 배추도 양이 적었기 때문에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잽싸게 김장을 끝내고 한 포기는 겉절이를 만들고, 남은 갓과 쪽파를 함께 버무려서 또 한 종류의 김치를 만들었다. 여기까지 하고나니 시간은 새벽 3시가 조금 넘었다.

 

정말이지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도구들과 재료들을 모두 치워야 했다. 크기가 제각각인 큰 다라이와 채반들을 깨끗하게 씻어서 포개놓고, 각종 그릇과 통들을 씻고, 바닥을 닦고 어쩌고 하다보니 시간은 4시를 넘었다. 이제부터 잠을 자도 얼마 못자고 출근 준비를 해야하는 구나. 김장을 하느라 아픈 허리와 무릎을 두드리고 주무르며 다시는 한밤에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냥 밤에 잠을 못자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거늘, 고된 육체노동까지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으랴. 나는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을 잘 못자는 편인데, 딱 그 순간이 그랬다. 아내는 씻고 곧 뻗었으나, 난 씻고 나오니 다시 정신이 말똥해졌다. 이럴때 방법은 하나다. 술을 한 잔 하고 눕는 거다. 술을 꺼내 안주도 없이 세 잔을 거푸 마시고 누워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한참을 뒤척였는데 어떻게 잠들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마 기절하듯 순간적으로 잠이 들지 않았을까?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참 싫다! 따뜻한 이불 아래서 딱 한 숨만 더 자면 안될까? 오늘 아침엔 추위와 피로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미친 짓 같았지만 그래도 어제 김장을 끝내둬서 다행이다. 오늘 퇴근해서 김장을 해야 한다 생각하면 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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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11-2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남편은 음식은 아니고 청소 전문이라는, ㅋ~.
난 나 앉을 곳만 깨끗하면 된다는 주의여서,
이리저리 밀춰놓고 앉는데...
울남편은 창문 틈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가며 검사를 한답니다.
덕분에 이젠, 각자의 몫이 완전히 정해져서...
우리집은 음식은 내가, 청소는 남편이 하는 완전 분업화된 가족입니다여, ㅋ~.

날도 추운데 고생하셨네요.
어제라서 다행이예요, 오늘은 더 추워요~^^

감은빛 2013-11-28 15:49   좋아요 0 | URL
분업이 잘 되어있군요! ^^
저희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요즘은 집에서 음식을 거의 안 하거든요.
재료와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건지,
귀찮아서 안 하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음식을 안 하니, 설겆이나 청소라도 열심히 해야죠. 뭐.

라주미힌 2013-11-28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장 배우고 싶네요 ... ㅎ

감은빛 2013-12-02 12:43   좋아요 0 | URL
전 사실 배우고 싶어 배운 건 아닙니다.
어머니와 장모님 두 분께 번갈아 배우셔요!

단발머리 2013-11-29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완전 멋지세요.
일단 올해 자체판단 대김장기여도 7.8에 성공한 저의 객관적인 판정에 의하면,
감은빛님은 대김장 기여도 8에 육박하시네요.
아, 아내분은요.
아내분은, 대김장 기여도 9.2세요.
이건 전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점수 받는 거거든요.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부추 무침, 부추 오이 무침 레시피 좀 올려주실 수 있어요?
저, 주부인데, 여기서 레시피 물어봐도 되나요? @@

감은빛 2013-12-02 12:4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저의 기여도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근데 저보다는 단발머리님께서 더 고생하신 듯한데,
제가 좀 더 낮게 나와야하지 않을까요?

레시피는 따로 없어요.
글에도 적어놓았는데, 저는 따로 공식처럼 음식을 만들지 않아서요.
그냥 그때 그때 기분내키는대로,
즉, 손이 가는대로 만든답니다.

게다가 제가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단발머리님보다는 못 할 것 같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