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벼린 칼날
이사를 하고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을 불러 세 차례 집들이를 했다. 어쩌다보니 이웃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부르게 되었는데, 두레생협과 의료생협과 녹색당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로 그룹이 나뉘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두레생협분들은 아직 채 집이 정리도 안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오셨는데, 그 분들은 간단한 재료로 즉석으로 직접 음식을 만드셨다. 그 중 한 분이 우리집 칼을 써보더니 날이 잘 서있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남편을 불러 칼을 이렇게 갈아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내가 이 사람은 칼 가는 게 취미라고, 아주 제대로 자세 잡고 간다고 대답했다. 글쎄 게으르고 건망증이 심해서 칼을 자주 갈지 못했고, 내가 사용할 때마다 칼이 무디어서 불만이었는데, 의외의 반응들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물론 칼 가는 자세는 내가 좀 제대로 잡긴 한다. 대충 갈면 힘만 더 들고 날은 잘 안 서기 때문에 자세는 중요하다. 일행은 내가 아내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열심히 칼을 가는 거라고 농담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는 무척 예민했다. 자라면서 그 예민함이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졌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한없이 날카로운 칼날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날카로움이 때로는 다른 이들이 잘 보지 못하는 허점을 짚어내거나 강대한 권력에 맞서는 작은 힘이 되기도 했지만, 때때로 아니 자주 나와 내 주위 가족이나 동료들에게도 상처를 입히곤 했다. 언젠가 나는 왜 이렇게 적을 많이 만들면서 살았던가 생각을 해봤더니 날카로운 칼날을 피아 구분없이 마구 휘두르고 다닌 때문이리라 싶었다.
그래도 그때 그 판단, 나는 무조건 날카로워야 한다는 판단은 옳았다고 믿는다. 설사 틀렸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래서 과거를 붙들고 후회해봐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당시 나는 날카롭고 싶었던 것일 뿐 실제로는 무딘 칼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울리던 무리 중에 조금 더 날이 선 칼날이었을 뿐인지도.
무뎌진 칼날
요즘 나는 무난하고 무딘 삶을 살았으면 싶다. 더이상 날카롭고 싶어도 날카로워지지 않는 나 자신을 깨닫는다. 한계다. 나이의 한계인지. 직장인의 한계인지. 아비된 자로서의 한계인지. 무엇이 진정한 한계인지는 몰라도 한계는 확실히 느낀다. 더없이 날카로워질 수 없다면 차라리 날을 다 죽이고 무딘 칼로서의 삶을 사는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쁘지 않다. 무딘 칼도 나름 다 쓸모가 있다. 너무 날카로운 칼은 무서워서 손을 대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적당히 무디고 적당히 날카로운 그저 그런 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칼이 아니겠는가.
글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무언가 읽는 이의 감성을 쑤시고 휘저어, 읽고 난 후에도 한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그런 글 말이다. 요즘은 그냥 무난하고 평이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평범한 글이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작은 재미와 감동을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더 쓰기 어렵고, 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전에는 글의 소재를 어디서 찾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요즘은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고민이 많다. 당장 다음 주로 다가온 두 개의 마감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뭔가 구체화 시켜두어야 할텐데. 늘 머리로는 미리 준비를 하자고 되뇌이지만, 막상 닥쳐야 글을 쓰는 이 습관은 쉬 고쳐지지 않는다.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여유
내 작은 소망은 주말에 어느 구석에 짱박혀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올해 대략 서너번 가져본 것 같다. 무척 행복했다.
이번 주는 틀렸다. 벌써 일정이 꽉 찼다. 두 건은 겹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집안 일도, 회사 일도, 아이들과 지내는 일도, 녹색당 일도
모두 내게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바에는 적당히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해보는 거다.
놀고 싶으면 좀 놀고,
책 읽고 싶으면 아무 생각없이 책에 빠져들고
그래야 사는 거 아닌가!
제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들춰보고 싶은 책들을 고르며 잠시 즐거움을 만끽하자.
알라딘 이웃에게 선물 받았다.
(고맙습니다!! ^^)
주욱 훑어 보았는데,
예상보다 더 재미있어 보인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어도 잘 몰랐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그리운 지명들과 풍경들이 떠오른다.
서점에서 슬쩍 살펴만 보았다.
당장 손에 넣어도 집중해서 읽을 여력이 없다.
그래도 갖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 없다.
지를까 말까 요즘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책.
지난 경제학 공부모임에서 이 책의 재출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야무님의 글에서도 또 만났다.
음 역시 당장 읽을 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소유욕을 자극하는 책.
분량과 가격 모두 부담스럽기만 하다.
기다려라. 언젠가 지르고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