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파국 - 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
이택광.홍세화.임민욱 지음 / 꾸리에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처음 읽었다. 그가 직접 쓴 글을 번역한 책은 아니다. 올해 6월 일주일간 한국을 다녀갔을 때 지젝의 강연과 대담 등을 엮은 책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에게 지젝에 대한 입문서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추천을 받고 읽었다. 지젝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왠지 그의 책은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확실히 잘 읽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김종철 선생의 말씀들을 떠올렸다. 지젝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말하고, ‘환경의 위기’, ‘지적재산권 문제’, ‘생명공학의 문제’ 등을 여러 번 지적할 때마다 계속 김종철 선생이 생각났다. [녹색평론]을 읽으면서 접하거나, 직접 강연을 통해 들은 김종철 선생의 말씀들도 대개는 비슷한 내용이었다. 일찍부터 “난파 직전의 배에서 내리기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진단에는 환경의 위기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문제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지젝과 김종철 선생의 생각이 완벽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이해한 바로는 매우 비슷한 면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지젝은 주로 일상생활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면들은 김종철 선생도 종종 지적했던 부분으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등이 우리에게 작동하는 지점들을 짚어주곤 했다. 지젝이 ‘스타벅스’를 강조했다면, 김종철 선생은 ‘학교 교육’을 강조하곤 했다.

 

지젝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은 주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에 대한 것이다. 여러 가지를 설명했지만 그 중에서도 ‘믿지 않지만, 마치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 가장 공감이 간다. 예로 든 것이 ‘건물에 13층이 없는 것’이나 ‘산타클로스’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4층이 없거나, 13층이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특히 산타클로스에 대한 부분은 나도 평소에 참 우습다고 여겼던 점이라 특히 공감이 간다. 빨간 옷을 입고, 길고 흰 수염을 붙인 가짜 산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설정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산타라는 거짓 이미지를 강요할까? 동심을 지켜야한다는 말로 그런 우스운 연출을 정당화하는 현실이 한편의 거대한 코미디 같다. 어차피 아이들은 곧 산타는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다. 하지만 어른들의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맞춰 아이도 속아주는 것처럼 연극을 계속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이며, 바로 어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싶다. 이해할 수도 없고 믿는 것도 아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따르고 또 행동하는 많은 일들이 바로 이데올로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부분은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의 말을 빌어 설명한 철학적 명제이다. 약간 표현이 다르지만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나열해보자. 하나, 우리가 (무언가를)알고 있고, 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둘, 우리가 모르지만, 그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있다. 셋, 우리가 모르고, 그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도 있다. 이 마지막이 럼즈펠드가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리고 지젝은 여기서 럼즈펠드가 누락시킨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 바로 네 번째 명제로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힌 채, 갇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지젝이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 책을 추천해준 이에게 감사한다. 덕분에 지젝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앞으로 지젝의 다른 책들을 통해 더 그의 세계를 탐험해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2-12-2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힌 채, 갇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지젝이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저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읽고 있는데, 지젝 인터뷰를 실은 거랍니다. 쇼킹한 부분이 있어서 책을 읽는 재미가 있어요. (나중에 페이퍼로 올릴 예정이에요.)

반 정도 읽은 책이 네 권인데, 이번 해에 다 끝내고 싶었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내년으로 넘어가게 되었어요. 시간은 빠르게 달려 가는 것만 같습니다. 계획 실천의 발걸음은 느리기만 하고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감은빛 2012-12-27 16:01   좋아요 0 | URL
쇼킹한 부분이 뭔지 궁금하네요.
방금 다녀왔는데 아직은 안 올리셨네요.
어서 올려주시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