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두 병

 

 

그 날 저녁엔 정말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면서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서 아이들 밥 먹이고, 씻기고, 재워야지.
그 생각 밖에 없었다.

하나 변수는 큰 아이가 의료생협 소모임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
아이에게 시간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숙제를 끝마치고 저녁을 다 먹지 못하면
모임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약속 받았다.

당연히 아이는 약속시간을 넘겼지만,
워낙 가고 싶어하는 눈치라서 
서둘러 아이들 손을 붙잡고 집을 나섰다.
추울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더 추웠다.
작은 녀석의 바지가 딱 맞는데,
안았더니 바지 아랫단이 자꾸만 올라가서 
맨 종아리가 찬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안그래도 감기 기운이 살짝 있는 녀석인데......
큰 아이에게 날씨가 너무 추운데 그냥 집에 돌아가자고 했더니,
안된다고 가고 싶다고 한다.

작은 녀석의 여벌옷을 챙겨나오긴 했는데,
종아리를 가릴 담요 같은 걸 챙기질 못했다.
할 수 없이 내 잠바 지퍼를 열고 녀석을 잠바 속에 쏙 집어 넣고,
그 상태로 안고 다녔다.
자세가 부자연스러워서 더 힘들고 불편했지만 어쩔수 없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큰 아이가 학교 준비물로 병뚜껑 두 개를 가져가야 한단다.
플라스틱 뚜껑이 아닌, 금속 뚜껑.
아무래도 맥주병 뚜껑을 말하는 것 같은데,
맥주병 뚜껑 두 개를 어디서 구하나?
어디 술집에서 달라고 해볼까?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에 아이 손을 붙잡고
술집에 가서 병뚜껑을 구걸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술 생각이 없었음에도,
집 앞 슈퍼에서 병맥주 두 병을 샀다.
서둘러 아이들을 씻기고, 재운 다음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잠들었다.
사실 이렇게 찬바람 부는 때에는 맥주보다
따뜻한 정종이 더 땡기는데......

 

 

 

그래서 결론은?

술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찬바람 맞으며 돌아다니다보니  갑자기 정종이 땡겼으나,

아이의 학교 준비물 때문에 결국 맥주 두 병 마시고 잤다는 거.

 

 

정종 한 병

 

 

그리고 그 이틀 뒤,

여전히 바람이 차가웠던 저녁.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놓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땅한 찬거리가 없었다.

큰 아이에게 동생이랑 놀고 있으라고 해놓고,

집 근처 슈퍼로 뛰어갔다.

 

그냥 간단하게 햄이나 소세지 정도로 밥을 먹일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오뎅과 곤약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 속에서 오뎅탕에 따뜻한 정종 한 잔이 떠올랐다.

얼른 장을 봐서 집으로 달려왔다.

 

급하게 오뎅탕을 한 냄비 끓이면서,

아이들부터 먼저 밥을 먹였다.

나도 밥은 후다닥 먼저 해치우고,

정종을 한 주전자 데웠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정종 한 잔을 마시고,

따끈한 오뎅탕 국물을 한 모금 마시니,

뭔가 소원성취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열심히 밥 그릇을 비웠고,

나는 느긋하게 주전자를 비웠다.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면서 나도 기분좋게 잠이 들었다.

 

요즘 여러가지 일들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잠들기는 또 오랫만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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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2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춥다, 춥다를 내뱉고 있었거든요. 출근길도 그랬지만 사무실도 그랬어요. 그런데 따뜻한 정종이라니, 오늘 퇴근길에 당장 마셔줘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어제 새벽 내내 가위 눌리느라 잠을 못잤는데, 정종 한 잔이면 잠을 푹 잘 수 있을것 같아요. 아, 따뜻한 정종이 꽤 필요해지네요. 지금은 점심시간인데..

감은빛 2012-10-24 14:06   좋아요 0 | URL
혹시 어제 저녁에 드셨을까요?
다락방님과 함께 정종잔을 부딪히는 영광을 누리고 싶네요! ^^

야클 2012-10-2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뎅국물'에는 '어묵국물'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어요. 아무리 일본말이라고 남들이 뭐라 해도요.

감은빛 2012-10-24 14:07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최근에 알게된 일인데,
이 '오뎅'은 단순히 '어묵'을 뜻하는 일본어가 아니래요.
실제로는 어묵과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간 음식 이름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