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끄적임

 

점심을 먹다가 들은 얘기다. 어느 탁구장 사모님(즉 사장님의 부인)을 오랫만에 뵈었더니 살이 쏙 빠져서 건강해 보이길래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장사가 잘 안되어서 한동안 가스 검침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엄청 많이 걷다보니 자연스레 살이 빠지더라고 한다. 질문을 던진이는 혹시 탁구를 열심히 쳐서 살이 빠졌다는 답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이는 살을 빼기 위해 탁구장에 갔으니 말이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다보면 막혔던 어떤 생각들이 저절로 술술 풀리기도 하고, 갑자기 어떤 글감이 떠올라 머리속에서 스스로 이야기가 막 진행되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작은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끄적여 놓기도 했는데, 워낙 악필인데다 간략하게 핵심적인 단어 위주로만 기록을 해놓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 어떤 생각으로 이걸 끄적였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며칠 전 퇴근 길에 걸어가다가 마주 오던 어떤 여성과 부딪힐 뻔했다. 그리고 어떤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 메모장 자판을 두드렸다. 하루 이틀 안에 이걸 글로 옮겨야지 생각하고 핵심적인 단어와 문장만을 적었다.

 

'귀한 인상', '복', '공이 날아온다', '돌이 날아온다'

 

기록된 단어와 문장은 이렇게 4개다. 적을 때는 분명히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입부에 쓸 핵심만을 써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나니 그때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한 인상'은 아마도 길에서 행인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소외 말하는 '도를 아십니까?' 부류의 사람들이 흔히 내게 건네곤 했단 말을 기록한 것이다. '복'이란 단어도 같은 뜻이었을 것이다. 주로 '복이 참 많으세요!'하고 접근하곤 하니까 말이다. 시도때도 없이 툭툭 나타나서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는 이 사람들과 불시에 날아오는 '공'이나 '돌'을 연결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째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순발력'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 앞쪽에서 갑자기 누군가 웃으면서 다가오면 나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거나 살짝 속도를 줄여서 뒤에서 따라오던 누군가를 먼저 보내고 그 바로 뒤를 따라서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그 글의 주제가 '순발력' 이었다면 분명히 그 단어를 먼저 적어놓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좋은 글감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나 도저히 멈춰서 기록해둘 짬이 나지 않아 그냥 머릿속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출근하고 나서 점심먹기 전에 좀 여유가 생겨서 그걸 기록해놓으려고 메모장을 띄웠는데, 머릿속이 하얀 백지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맨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은 대충 생각이 났는데, 그 뒤로 한참 진행해놓은 내용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벌써 치매인 걸까?)

 

 

대화 기피

 

잘 알고 있다. 말이란 것이 얼마나 상처 주기 쉬운 무기인지. 살아오면서 적을 참 많이 만들어왔다. 내 날카로운 말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내 거친 태도로 인해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날카로워야 한다고! 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사회에서 제대로 된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날카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날카로운 시각을 유지하는 것과 입으로 내뱉는 말까지 날카로운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가능하면 날카로운 내 생각을 부드럽게 바꿔 말하려고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요즘 나는 서로간의 의견을 나누고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있다. 다른 건 별로 잘 하는게 없어도 나름 말 하나는 잘하는 편이라고, 학생운동을 할 때에도, 학원 강사를 할 때에도 자만에 빠져있곤 했는데, 요즘 들어 나는 참 말을 못하는 구나 싶다.

 

그래서 이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싫다. 그냥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하고 혼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그렇게 살았던 적이 있었다. 차비도 없고, 밥 사먹을 돈도 없어서 며칠간 자취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나오고 살았던 적이 있었고, 복수전공 때문에 혼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다른 캠퍼스로 수업을 들으러 간 덕분에 일주일 간 한마디도 안하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그땐 아마도 외롭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가 부럽다.

 

언젠가 누군가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다. 혼자 무인도에 가서 평생 책이나 읽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 물론 무인도에서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책 읽을 시간이 더 많을 것 같다. 아니면 한 달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책 읽다 돌아올 수는 없을까.

 

할 일은 많으나, 일하기는 정말 싫은 금요일 오후 한 달간 무인도에 짱박힌다면 무슨 책을 가져갈지나 한번 고민해볼까? 일단 최근 나온 책들 중에는 아래 책들을 먼저 넣어야겠지. 아! 상상만으로도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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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08-2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시에 날아오는게 공이라면 (이승엽의 홈런볼 정도는 돼야겠죠?) 잡으려 시도해 보겠고 돌이라면 무조건 피해야죠. 그리고 그 날아온 돌 집어서 내게 던진 사람에게 (무지 강하게) 패스를..... ^^. 무인도라면 평소에 엄두를 못내는 토지나 대망 같은 길고 긴 대하소설을 가지고 갈래요.

감은빛 2012-08-25 22: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공은 잡고, 돌은 피해야겠죠. ^^
그런데 그건 도입부의 얘기겠고, 뭔가 더 내용을 구상했는데,
며칠 지나고나니 도무지 생각나지 않더란 말이죠.

무인도에 간다면 역시 대하소설이겠죠!
저도 그 생각을 했었어요.

양철나무꾼 2012-09-1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핸드폰 메모장은 잘 사용 안하고,
메세지로 만들어 임시보관함에 저장해 놓곤하는데...
지금 중요하게 담겨있는 메세지는,
카톡의 애니팡이란 게임 잘하는 법이예요~--;

감은빛 2012-09-11 16:12   좋아요 0 | URL
애니팡이란 게임 한번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

예전에는 어딜가더라도 항상 볼펜과 수첩은 꼭 갖고 다녔는데,
요즘은 약속 정할때도 스마트 폰을 먼저 꺼내보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