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이 안 맞잖아
큰 아이는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패드로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 폰으로 외국어 단어를 따라하고 있었다. 몇개의 단어를 다 익히고 나면, 짧은 음악이 나왔다. 나는 외국어를 따라했듯이 그 음악 멜로디를 따라했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터키어, 인도네시아어, 힌디어, 스페인어 이렇게 여러개의 언어를 돌아가며 몇 개의 장을 따라했고, 매번 그 멜로디를 따라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 멜로디를 따라할 때마다, 큰 아이가 쳐다보며 ˝왜 그것까지 따라해?˝ 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이라고 답했다. 정말 아무생각없이 그냥 따라했으니. 아이는 매번 내가 그 음악을 따라할 때마다 한 마디씩 했고, 나는 그런 아이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 짧은 음악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따라했다.
계속 하다보니 아이가 조금 언성을 높이며 ˝아니 왜 그걸 따라하냐고.˝ 라고 했다. 듣기 싫다는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표현처럼 들리기도 했다. 제대로 말해주시 않으면 사람 생각은 알수 없는 거니까. 나는 그냥 계속 진도를 나가 다음 단어들을 따라했고, 아이도 다시 드라마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장이 다 끝나자 또 그 음악이 나왔고, 나는 또 따라했다. 아이는 ˝아니, 음이 안 맞잖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이는 맞지않는 음으로 반복해서 따라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것이었다.
큰 아이는 신기하게 어릴 때부터 한번 들은 음악의 계이름을 바로 알아내곤 했다. 절대음감이라고 해야하나? 처음 들은 노래도 바로 따라할 수 있었다. 기타를 튜닝할 때마다 음을 잘 찾지 못해 애를 먹는 나로서는 정말 부러운 능력이다. (아, 물론 기타를 거의 치지 않기 때문에 튜닝할 일 역시 거의 없지만) 아이는 음이 맞지 않는 것에 민감한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따라했던 그 소리가 거슬렸던 것이리라. 나는 아이처럼 절대음감이 아니니 아이가 얼마나 거슬려했을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수동형, 피동형 문장이나 맞춤법,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보면 거슬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음에 그 음악을 따라할 때는 최대한 음을 맞추려고 노력해본다.
이 자리 앉아도 될까요?
지하철을 여러번 갈아타고 몇 군데를 오갈일이 있었다. 붐비는 열차, 완전 만원이라 주위 사람들에게 꽉 끼어있었던 열차가 대부분이었지만, 도중에 텅 비어서 앉아갈 수 있는 열차도 있었다. 한 번은 완전 만원 열차를 탔는데, 도중에 어느 역에서 사람들이 왕창 내려서 숨 쉴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 때 내 앞에 앉아있던 분이 일어나면서 자리가 났다. 나도 앉고 싶었지만, 서있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서있기 힘든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그냥 서있었다.
잠시 후 뒤에서 어느 여성이 ˝이 자리 앉아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손짓으로 앉으시라고 답했다. 자리가 비면 말도 없이 앞에 있던 사람을 밀치고 앉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렇게 물어보고 앉는 사람은 처음보는 것 같다. 심지어 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각도 상 그 분이 내 귀를 못 봤을리 없었는데, 그렇게 물었다. 다행히 내가 듣던 음악 볼륨이 작아서 그 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분이 자리에 앉고 일행인 여성들이 함께 와서 서느라 나는 옆으로 조금 물러나야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눴고, 그 소리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음에도 내게 들렸다. 음, 자리를 양보한 대신 나는 서있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소음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계단
가끔 무릎이 아픈 날이면, 계단과 내리막길이 정말 두렵다. 무릎이 아프기 전에 나는 계단을 좋아했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부실했던 나는 따로 하체운동에 시간을 투여할 여유가 없으니 뜀박질과 계단 오르기로 하체 운동을 대신했다.
지하철 6호선은 계단이 높고 가파른 역이 많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르며 그걸 타고 오르는 사람들보다 먼저 계단 끝까지 올라가는 걸 즐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도 걸어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 사람들보다 빨리 가는 일은 쉬울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근력을 바탕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계단을 올라야한다. 매일 퇴근길 계단이 높고 가파른 역에서 계단을 오르며 연습을 했다. 몇일이 걸렸는지 몇달이 걸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결국 계단을 오르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오르는 사람들보다 항상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계단 오르기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계단을 오르며 근육을 쓰고 나면 그 감각이 좋았다. 뜀박질 후 가쁜 호흡 속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근력운동 후 약간의 통증과 함께 느끼는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무릎이 아픈 이후로는 계단을 예전처럼 빠르게 오르내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예전처럼 뜀박질을 즐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예전처럼 빠르게 에어 스쿼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거울
몇 년 전이었다. 한창 운동을 즐기던 때였고 매일 아침 공복에 속을 비우고 샤워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아름다웠다. 근육이 크지 않으면서도 선명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내 몸을 보는 일이 이 재미없고 힘든 세상을 견디는 작은 만족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무릎을 비롯한 관절 통증으로 운동을 못한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
먹는 양과 횟수가 줄어서 살이 빠졌고, 그래서 날씬한 몸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근육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거울로 내 몸을 보는 일이 즐겁지 않다. 오히려 자꾸 줄어드는 근육 때문에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도 최근에는 관절이 안 아픈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서 조금씩 다시 운동을 시작해보고 있다. 워낙 오래 쉬어서 당장 예전처럼 힘을 쓸 수는 없었다. 이렇게 조금씩 하다보면 다시 운동을 즐기던 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관절들이 다시 운동을 버텨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을거라는 절망감이 들 때도 있고,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부딪히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냥 한 번 해보는 것. 그게 필요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