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끄곰이


최근 작은 아이는 웹툰의 영향을 받아 만화를 그리고 있다. 이런걸 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현세, 이상무 화백 등의 영향을 받아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의 딱 지금 작은 아이 나이였다. 그때는 소년 만화 잡지들이 종이로 출간되던 시기여서 만화책을 보면서 비슷하게 배껴그렸는데, 작은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동거의 법칙]이라는 웹툰을 보고 가족을 특정한 캐릭터로 그려서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만화를 그린다. 아마 애들 엄마가 그 웹툰을 아이에게 알려줬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이가 내게도 보여줘서 함께 봤다. 직장생활을 하는 젊은 여성의 가족들 중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시골로 귀촌하면서 할머니와 단 둘이 동거를 하게 된 계기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살구를 좋아하셔서 별명으로 살구라고 부르고, 캐릭터도 살구 모양으로 그렸다. 만화가 본인의 캐릭터는 나무늘보로 그렸고, 그의 절친한 친구는 뭐였더라, 수달이었던가 뭔가 물에 사는 작은 동물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그런 식으로 그리면서 아주 사소한 부분들에서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가는데, 그 따스한 시선과 일상의 잔잔한 재미들이 꽤 괜찮았다.


아이가 내게 보여준 부분은 앞 부분 조금이어서 나중에 시간 날때 최근 소식을 찾아보려 검색했더니 중간부터 거의 연재가 이뤄지지 않다가 얼마 가지 않아 완결이 되었던데, 살펴보니 살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마지막화 내용이었다.


암튼 그 만화에 영향을 받은 작은 아이는 엄마와 언니와 자신의 캐릭터를 각각 만들었는데, 아마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만든 느낌이었다. 엄마는 소를 귀엽게 형상화 한 캐릭터로 엄마가 소띠라서 그랬던 것 같고, 언니는 토끼로 그렸는데, 아마 언니가 귀여운 토끼 이미지를 원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자신은 다람쥐로 그렸다. 언니가 귀엽다고 다람쥐라고 부르며 볼을 잡아당기곤 했기에 그렇게 정했으리라.


그리고 아이는 내게 물었다. "아빠는 어떤 캐릭터로 할까?", 나는 아이가 애들엄마를 소로 그린 것을 보고 별 생각없이 "아빠는 용띠니까 용으로 해줘."라고 말했는데, 아이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더니, 아빠는 곰이 어울린다고 북극곰으로 그리겠다고 했다. 왜 북극곰이냐고 물으니, "아빠는 북극곰을 살리는 일을 하잖아." 라고 답했다.


기특하게도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아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아빠가 하는 에너지 운동이 지구를 살리고, 북극곰을 살린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는 아이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 이면에 숨은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덩치가 큰 남자 어른인 아빠는 아무래도 곰의 이미지와 비슷할 수 밖에 없음을. 게다가 겨울이면 집에서 군대 제대할 때 가져온 깔깔이를 입고 늘 누워서 뒹굴거리는 모습을 주로 보기 때문에 더욱 곰 이라는 이미지에 가깝게 느꼈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암튼 그래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북극곰 캐릭터를 부여받았고, 아이는 캐릭터 이름을 '끄곰이'라고 지었다. 참고로 엄마는 '움마', 언니는 '단토끼', 자신은 '람쥐'라고 이름을 지었다.


부모 참관 수업


이미 한참 지난 이야긴데, 그간 서재에 글 쓸 여유가 없어서 이제서야 끄적인다. 지난 달 중순 즈음 아이가 낮에 전화를 걸었다. 왠일인가 싶어 받았더니, 곧 학교 방과후 수업에서 부모 참관 수업이 열리는데, 엄마는 그날 바빠서 올 수 없다고 했단다. 엄마 대신 아빠가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내 기억엔 작년에도 내가 한 번 부모 참관 수업을 갔었다. 그때도 애들 엄마가 바쁘다고 했었다. 일정을 보니, 그 시간에는 비어있었지만, 앞의 일정을 마치고 가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리고 사실 무척 바쁜 시기여서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아이가 꼭 와달라고, 엄마 아빠 아무도 안 오면 안된다고 하길래, 어쩔수 없이 가겠다고 약속했다.


당일 학교로 갔더니 예상대로 아빠는 나 혼자였다. 작년에도 그랬다. 대부분은 엄마들이 왔지만, 가끔 할머니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참여하는 반 외에 다른 반에 또 거의 한 명 꼴로 아빠들이 있었다.


아이가 속한 반은 뭔가 작은 물품을 만드는 공예 수업 같은 것이었고, 그날은 손거울을 만들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하나씩 만들도록 시킨 후에 부모들에게도 따로 또 하나씩 만들라고 제안했다. 어쩔수 없이 나도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거울을 하나 만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어쩌면 참 불편한 일인데, 선생님도, 주위에 앉은 다른 엄마들도 어쩐지 나를 어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거울을 만들었고, 나중에 완성해놓고 보니 제법 잘 만들었더라. 선생님은 아마 일부러 그랬겠지만, "어머! 아버님, 너무 잘 만드셨네요!" 라고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의, 원고, 교정지, 일, 일, 일, 서류, 서류, 서류


연말부터 그 다음해 3월까지는 정말 일이 엄청나게 몰리는 시기다. 매일 야근이고, 매일 철야고, 매일 잠이 모자라고, 매일 죽을 것처럼 피곤한 날이다. 지난 주에는 주초에 좀 무리를 했다가 감기몸살에 걸려 정말 죽을 것처럼 아팠다. 살면서 그렇게 심하게 아팠던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창 바쁘고 중요한 시기에 아파 누워버리는 바람에 일이 더 밀렸다. 


사실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었을텐데,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문제다. 이번 주에도 또 이틀 연속 철야하고, 하루는 저녁 늦게 들어가고 다시 이틀을 밤샘 작업했다. 지금 또 몸과 마음의 피로가 한계치에 도달했음을 느낀다. 그래서 몸은 어쩔수 없더라도 마음의 스트레스라도 좀 풀어보고자, 이 바쁜 시기에 여기다 이 글을 쓴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히 외부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내일 오전에 잡힌 강의까지 이번 주에만 강의가 3건이다. 일주일에 3건의 외부 강의라. 이런 일이 또 생길까 싶을 정도로 강의가 몰린다. 바쁜 시기가 아니라면 강의를 하는 건 나도 좋아하는 일이고 부수입이 생기니 감사한 일이지만, 이 바쁜 시기에는 내 몸과 마음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


청탁 받은 원고와 교정지도 있고, 연말 안에 마무리지어야 할 무수한 행정서류와 기획서와 보고서들이 까마득히 멀리까지 줄을 서있다.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으면 최근 몇 주간은 거의 술도 못 마셨다.



절판도서 구매


절판도서 알림 설정을 해놓았더니 부산 어딘가의 중고 매장에 책이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나는 일을 하다말고 곧바로 배송 주문 후 결제부터 했다. 그리고 3일 후에 책을 받았다.














지난 달에 산 10여 권의 책들 중 절반은 한 번 펼쳐보지도 못했다. 이 책은 또 언제 펼쳐보려나. 어려서 나는 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곰을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다. 곰 외에도 여러 동물들이 동면을 하지만, 유독 곰을 떠올린 건 겨울잠을 자는 대표적인 동물이라서였겠지. 작은 아이가 그려준 캐릭터 그림을 보며, 차라리 진짜 북극곰이 되어 겨울 내내 잠만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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