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림


학창시절에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모두 책받침을 갖고 다녔다. 하나가 아니라 몇 개씩. 아름다운 여성 연예인들의 사진 때문이었다. 흔히 책받침 4대 여신이라고 불리는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왕조현, 브룩 쉴즈 뿐 아니라, 최진실, 이상아, 김혜수 등 한국 언니들도 있었다. 나는 정작 필기할 때 책받침을 받치면 필기감이 썩 좋지 않아서, 실제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책받침은 늘 갖고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름다운 언니들의 사진을 보고도 누군지 잘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날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마구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같은 연예인의 다른 사진들을 들이밀며, "이 사람과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야?" 묻고 내가 틀린 대답을 하면 다같이 책상을 쾅쾅 내리치며 크게 웃는 것이다. 나는 그게 부끄럽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했다. "어떻게 이 사람과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야? 분명 다른 사람이잖아!" 그러면 친구들은 다시 크게 웃으며 놀려댔다. "안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냐? 눈 갖다 버려라!"


그 시절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친구들은 저 사진들을 보며 죄다 구분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확인


학창시절에는 인간관계 폭이 좁고,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 강제로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수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을 만나며 누가 누구인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잘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간혹 유난히 사람을 잘 기억하고 알아보는 친구들이 눈에 띄긴 했다. 그들이 독특한 것이고 대부분은 나와 비슷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여러번 만나도 쉽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여러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말을 걸거나 아는 체를 하면 그제서야 떠오르긴 했지만, 아주 가끔 오랜만에 만나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말을 걸어와도 그가 누구인지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곤란한 상황을 몇 차례 겪으면서 내가 남들과 달리 유난히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는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했다.


화장


내가 잘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었다. 간혹 남성들의 경우도 그랬지만, 대부분 여성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장법과 머리 스타일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추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가족도 못 알아본 경험 때문이다.


언젠가 우연히 티비에서 전유성 씨의 딸이 아빠가 길에서 만나면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얘길 하는 걸 봤다. 그게 마치 한 두번이 아닌 것처럼 말했던 것 같다. 그 순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긴 하구나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엄마를 한 번, 동생을 두세번 못 알아본 적이 있다. 그 모든 경우 길에서 마주쳤는데, 내게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바로 화장의 유무, 미용실, 화장법의 변화 등이 이유였다.


어느날 동생은 버스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들었는데, 내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도 지나쳐서 뒤쪽 어딘가에 서서 가더라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떻게 동생을 못 알아볼 수 있냐고 따졌다. 나는 동생이 나를 붙잡고 말을 거는 순간까지, 즉 동생의 목소리를 듣기 직전까지 이 여성이 왜 나를 붙잡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낯선 여성이 내게 무슨 볼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익숙지 않은 얼굴이 입을 열자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나는 이 사람이 나랑 2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동생이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어느날 엄마도 길에서 자신을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나를 보고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그냥 스쳐 지날때는 얼굴을 보고도 못 알아봤지만, 나를 붙잡고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즉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엄마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 엄마는 내가 생각에 잠겨 걷느라 자신을 못 본거라 여기는 듯 했다.


이때 나는 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 내가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느낀 것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저 위에 언급했던 전유성 씨와 딸의 경우를 나도 겪는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뻔 했다.(다행히 '뻔'에 그쳤다!)


큰아이는 중학생이 되어서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요즘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자신만의 화장법을 찾고,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화장법이 자주 바뀌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어떤 화장법을 주로 사용하는 것 같고, 볼 때마다 일정한 즉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 전 어느 단계의 어느 날, 나는 아이와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이가 가까이 올때까지 나는 아이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아이를 알아보았고 전유성 씨와 같은 경우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아이는 아직 중학생일 뿐이고, 점점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알수 없는 것이니까. 게다가 나는 아직은 어린 작은 아이도 있지 않은가. 그 아이가 자라서 또 어떤 화장을 하고 나타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초성게임


그런데 최근 조합원 캠프를 다녀와서 내가 단지 사람 얼굴만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나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 같다. 정말 사람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살아가는 걸까? 과연 내가 아는 내가 정말 내가 맞는 걸까? 어쩌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1박2일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무척 힘들고 피곤했는데, 뭐 그런 일이 한 두번도 아니어서 익숙하긴 했다. 익숙한 것과 힘들고 어려운 건 분명 다른 문제다. 익숙하다고 해서 그 일이 힘들지 않다거나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면서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다행히 마지막 조합원 교류 프로그램은 따로 준비하고 진행하실 분들이 있어서 나는 하루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여러 행사에서 자주 초성게임을 접했다. 아마 매년 두세번은 이 게임이 포함된 행사에 참여한 것 같다. 보통 팀을 나눠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느 단위에서 하더라도 보통 나와 같은 팀이 된 사람들은 안심하는데, 내가 아는 게 많아서 이 게임을 잘 할거라고 여기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 게임을 못하는 편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분명히 잘 아는 단어여도 초성만으로 제시된 시각 정보를 나는 그 단어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나중에 게임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진행자나 문제 출제자가 내게 와서 넌지시 묻기도 했다. "일부러 안 맞춘거야? 금방 맞출줄 알았는데.", "아니, 나는 전혀 몰랐어. 그 단어를 모른 것이 아니라 그 초성이 그 단어라는 걸 몰랐어."


여러차례 초성 게임을 겪으며, 문제나 힌트를 읽어주는 류의 게임과 달리 유난히 맞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번 캠프에서는 혹 이게 내가 늘 '불치병'이라 여기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추리


단서1. 나는 텍스트를 읽고 푸는 문제나 듣고 푸는 문제에서는 크게 어려움 없이 아는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

단서2. 같은 답이어도 초성만으로 단서가 주어지면 전혀 연결시키지 못한다.

단서3. 초성만으로 답을 맞추지 못해 힌트가 제시되면 단서1의 경우에 해당하므로 문제를 맞출 수 있다.

단서4. 어려서부터 유난히 숨은 그림 찾기나 틀린 그림 찾기 등의 게임도 잘 하지 못했다.

단서5. 내가 누군가를 잘 알아보지 못한 몇몇 경우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의 얼굴, 머리 스타일, 키나 체격 같은 정보들을 내 기억 속의 어떤 누군가와 매치 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단서6. 이 경우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떠올린 경험이 있다.

단서7. 인터넷 보안을 위해 이상하게 왜곡된 숫자나 문자 인증을 자주 틀린다. 난 분명히 내 눈에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입력했는데, 자꾸 시스템은 틀렸다고 한다.

단서8. 내 기억으로 이런 현상은 적어도 중학교 때부터였고, 잘 떠올려보면 이전에도 사소하지만 비슷한 경험으로 엮을 수 있는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나는 이런 현상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거나 경험을 쌓아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단서9. 앞으로도 시각 정보만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해결해야 할 상황이 오면 과연 이 판단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쉽게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서10. 어쩌면 이 증상은 내 시력이 난시와 근시로 매우 나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임1. 마흔이 넘어서부터 노안이 왔다고, 내게 아직 노안이 안 왔냐고 묻던 선배들 이야기를 흘려 들었는데, 요즘 가끔 책을 읽다가 촛점이 잘 안 맞는 것 같은 증상을 겪는다. 이게 그 노안인건가? 이제 곧 다촛점렌즈 안경을 맞추거나 돋보기 안경을 하나 더 맞춰야 하는 건가? 아니 왜 난시에 근시에 겹쳐 노안까지 찾아오는거냐구!


불치병


언젠가부터 나는 이 증상 혹은 현상을 불치병이라 여겼다. 하나의 글에는 다 언급도 할 수 없을만큼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자신을 못 알아본 사실에 크게 화를 냈고, 어떤 이들은 당황한 후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후에 나를 무시하는 방식의 복수(?) 택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적도 수없이 많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지금도 누구였는지 궁금한 한 사람이 있다. 내 기억에 분명 한 때 그와 친하게 대화를 나눴던 시간이 있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그를 마주쳤을 때 그가 누구인지, 이름은 뭔지, 어떻게 만났고, 함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그와 함께 있었던 기억의 조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가 다가와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을때, 나는 그가 선배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후배인지를 얼른 떠올릴 수 없어서 무척 당황했다. 아! 정말 우리말과 문화는 왜 이렇게 사람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그에 따른 대응을 다르게 만들었던 말인가! 만약 영어였다면 그저 태연하게 "Hi" 한마디 했을면 괜찮았을텐데. 너무 당황했던 나는 그에게 아무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고, 반갑게 웃던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싹 가시더니 이내 황당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내게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돌아서버렸고, 이후 그를 아주 가끔 마주쳐도 그는 나를 무시하고 못 본 척 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과연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여러번 곱씹어 떠올려본 기억으로, 그는 아마 우연한 기회에 친해진 친구였던 것 같다. 짧은 기간에 빨리 친해졌고, 그러다 꽤 오래 서로 마주치지 못했고, 그날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내가 그를 못 알아본 것이다.


만약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날 내가 널 무시하거나 일부러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라고. 널 금방 떠올리지 못한 건 분명 잘못일 수 있지만, 내가 늘 그럴 수 밖에 없는 증상을 가졌다는 걸 설명해주고 싶다. 이외에도 길에서 마주쳤다가 내가 금방 알아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싶다.


어떤 특정한 훈련을 통해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길에서 내 소중한 가족들을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지하철역 캠페인에서도 잘 아는 선배의 익숙한 얼굴을 보았는데, 한순간 그 얼굴이 너무 낯설어보여 혹시 아닌가? 잘 못 본가 싶어서 인사를 망설였는데, 문득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약 한 달 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오늘 아침 일을 계기로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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