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말


하필 마감일이 일요일이었다. 보통은 금요일 저녁 6시가 마감일인데, 왜 일요일을 마감일로 정했을까? 시간을 거꾸로 돌려 금요일 저녁 7시 50분 무렵 나는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어딘가 허름한 술집에 구겨진 듯 앉아 소주 잔을 들어 입에 털어넣고, 바짝 구운 고기 조각을 씹거나 매끈한 하얀 생선 횟를 입에 집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감 시간이 되기 전에 서류를 완성해서 제출해야 했고, 주말에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금요일 밤에 일을 해야 했다.


머리 속의 내가 자꾸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를 들이부어서 그런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도 마치 취한 것처럼 일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자꾸만 손가락이 엉뚱한 자판을 두드리고, 자꾸만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 튀어나오고 그러다 문득 잔뜩 두드려놓은 A4 절반 분량을 그냥 통째로 지워버렸다. 속으로 욕을 한 마디 하고 담배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웃 사무실들은 대부분 퇴근한 후로 이 건물에 불이 켜진 사무실은 서너개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며 도박을 하나 걸었다. 평소 자주 술 마시는 후배에게 연락해 만약 시간이 된다고 하면 그냥 확 술을 마셔버리고, 일은 일요일 저녁으로 미뤄버리자. 만약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억지로 머리를 짜내어 일을 마치고 밤 늦게 혼자 집에 돌아가 뭔가 폭력적인 영화를 틀어놓고 술을 마셔야겠지. 어느 쪽이 될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확률은 반반이니까.


후배는 아직 퇴근전이고 다른 일정은 없다고 했다. 즉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얘기. 녀석은 약 1시간 반 후에 내가 앉아 있는 동네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1시간 반 안에 일을 다 마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놓고 술을 마신 후 남은 건 주말에 해야했다. 시간은 총알처럼 흘러가 어느새 후배가 도착했고 우린 가끔 가는 양꼬치 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날 어쩌면 나는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건지 모르겠다. 1차에서 후배와 평소보다 술을 더 마셨고, 충분히 마셨다며 후배가 돌아간 후에도 나는 술을 더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기를 뒤져 이 늦은 시간에 연락이 가능한 사람이 누구일지 살폈다. 누군가의 이름에서 손가락이 멈췄고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은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채 다 피우기도 전에 답이 왔다. 나는 2차로 그와 술을 또 마셨다. 평소라면 아마 1차에서 이미 허용치를 넘겨 술을 마신 상태였을텐데, 그날은 스트레스와 비례해 주량도 올라가버린 것 같았다.


떠들고 웃고 잔을 비우고 소주를 또 시키고 맛도 못 느끼며 안주를 입에 집어넣고 다시 떠들었다. 해가 뜰 무렵에야 술집을 나왔다. 술동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토요일 저녁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마감이 일요일인 서류 생각이 났는데, 그 생각을 애써 떨쳤다. 마감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이었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간단한 술 안주를 만들었다. 왠지 운동을 하고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잠시 했지만, 오늘은 그냥 스킵했다. 밤새 그렇게 술을 마셔놓고 또 술이 땡겼다. 며칠전 사놓은 보드카와 토닉워터와 얼음과 냉장고를 뒤져 만든 간단한 안주 2개를 놓고 다시 술을 마셨다. 술은 술술 잘도 들어갔고, 절반쯤 남아있던 보드카는 금방 바닥났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고, 라면을 끓였다. 라면과 소주는 언제나 환상의 궁합이다. 먹고 마시고 먹고 마시고 반복하다가 소주병과 라면을 모두 해치우고 자리에 누웠다. 휴대폰 화면은 어느새 일요일이 되었음을 알렸다. 일요일이 마감인 서류를 잠시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일요일 오후 다시 눈을 떴다. 빨래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기름때가 묻어서 따로 빼놓은 빨래 두어개를 빨래비누로 문질러 세탁기에 넣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음악을 틀어놓고 설겆이를 했다. 설겆이를 마친고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 마감인 서류를 생각했다. 담배가 땡겨 우산을 쓰고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 폰을 열고 밀린 대화들을 확인했다. 중국 여성들, 인도네시아 여성, 브라질 여성, 미국 여성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받았다. "너의 주말은 어때?", "금요일 밤부터 술만 마셨는데, 벌써 주말이 다 지나버렸네." 이런 저런 말들을 주고 받은 후 빨랫대에 지난 일요일 널어놓은 빨래들을 걷었다. 매일 아침 기분에 따라 입고 나갔던 옷들과 양말들을 빼고 남은 것들이었다.


마침내 세탁기가 다 돌아가고 빨래를 널었다. 그제서야 배가 고팠다. 새벽에 먹은 라면과 소주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다. 냉동실에서 만두를 꺼내 찌면서 다시 이제 마감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서류를 떠올렸다. 금요일 밤 사무실에서 두드리다 만 상태에서 단 한 글자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누군가 나 대신 그 일을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두를 집어먹으며 노트북을 켰다. 문서를 열었는데, 너무나도 일을 하기가 싫었다. 느려터진 노트북을 보다가 사무실을 나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비도 오고 오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누웠다가, 아니 마감이 코앞이지 생각에 일어났다가, 몇 글자 두드리지도 않고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야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시간 30분 동안 나는 믿을 수 없는 집중력으로 서류를 완성했다. 만약 금요일 밤에 이 정도 집중력이 생겼다면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을텐데, 그렇게 서류에 집착하면서도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홀가분하게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적당히 취했다가 깨서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평소와 같은 주말을 보내지 않았을까?


암튼 완성한 서류를 제출하려고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첨부파일을 넣었는데, 자꾸만 전송 오류가 떴다. 이제 마감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왜 이 놈의 메일은 파일을 자꾸만 뱉어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가와서 인터넷이 문제 안 되나? 낡아 빠진 노트북이 문젠가? 그렇다고 지금 사무실을 나갈 수도 없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 자꾸만 전송 오류가 나는 메일 재전송을 누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마감 시간이 지나버렸다. 자정을 넘겨 어느새 월요일이 되어버렸다.


다시 파일을 열어서 검토하다보니 서류에 첨부한 몇몇 이미지 용량이 너무 커서 전송이 제대로 안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첨부한 이미지들 십여개를 모조리 따로 저장해 용량을 줄이고 다시 첨부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 문장을 다듬고, 몇몇 표현을 고치고, 몇몇 표의 여백과 정렬을 바로잡았다. 다시 서류를 첨부해 메일을 보내니 이번에는 제대로 전송이 되었다. 마감 시한이었던 일요일 밤 자정에서 2시간이 넘게 지나있었다. 자꾸만 술이 땡겼지만 어제 밤 다 마시고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떤 월요일


그리고 월요일 아침 접수처에 전화를 걸어 내 서류가 무사히 접수되었는지 확인했다. 담당자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확인했다고 답했다. 마감 시한을 2시간 넘게 넘겼지만 받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을 했다. 회의를 하고, 전화를 걸고 받고 또 전화를 걸고 또 회의를 참석했다. 오후가 되어 문자가 한 통 왔다.


일요일이 마감이던 서류 접수를 일주일 더 연장해 다음주 일요일까지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지만 간신히 욕을 내뱉는 건 참았다. 그저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서류 첨부가 되지 않아 조바심을 내면서 재전송을 무한 반복했던 지난 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첨부한 이미지 전부를 용량 조절해 다시 작성했던 기억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월요일이라 회의가 많았다. 낮에 회의를 두 개나 했고, 여러 기관과 여러 단체와 조율해야 할 일도 많았다. 저녁 7시 반에 시작 예정이었던 회의는 10분 늦게 시작해 1시간을 조금 넘겨 끝났다. 회의가 끝났지만 몇몇 이슈를 갖고 약 30분 넘게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이 건물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이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몇몇 밀린 일을 처리하고, 화요일 아침 강의 자료를 훑어보며 강의할 내용을 머리 속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알라딘에 접속해 몇 개의 글을 읽고 다다다 이 글을 두드렸다. 시간은 또 금방 흘러 다시 12시가 지났다. 화요일이다. 아침에 강의하러 가려면 이제 빨리 집에 가서 자야할텐데. 집 앞까지 가는 버스 막차는 아마 좀 전에 끊겼을 것이다. 중간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도중에 내려 걸을지, 처음부터 집까지 걸을지 고민해 본다. 


왠지 오늘도 술을 한 잔 마셔야 잠이 들것 같다. 과연 나는 집 근처 편의점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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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2019-07-30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술을 정말 너무 좋아하시는군요. 달달한 술맛에 한번 빠지면 기가 막히게 기분이 좋아지지요. 윗글도 보아하니 술기운의 에너지가 써낸 느낌입니다. 구라 솜씨 좋은 소설가의 소설처럼 읽는 맛이 당깁니다. 재밌게 잘 읽었네요. ^^

감은빛 2019-08-04 14:12   좋아요 0 | URL
˝구라 솜씨 좋은 소설가의 소설 처럼˝이란 말씀 칭찬으로 들리네요.

이 글은 술기운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야근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쓴 글이에요.
고맙습니다!

cyrus 2019-07-30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덜 사게 되니까 편의점에 가서 지출되는 돈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겼어요. 다음 달 휴가를 집에서 보낼 생각인데, ‘휴가 기간에 읽을 책’을 사고 싶다기보다는 ‘휴가 기간에 먹을 것’을 뭘 살지 고민 중이에요.. ㅎㅎㅎㅎ 당연히 ‘먹을 것’에 술도 포함되어 있어요.. ^^;;

감은빛 2019-08-04 14:13   좋아요 1 | URL
책을 덜 사서 지출이 늘었다니!
그렇다고 책을 더 사시라고 말씀도 못 드리겠네요.
휴가 기간엔 뭐니뭐니해도 맛있는 것 잔뜩 먹고 푹 쉬는게 제일 중요하죠!
편안하고 재미있는 휴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루스님.

카스피 2019-07-30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술을 먹으면 만사가 귀찮아져서 하던 일도 떄려지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인데 감은빛님은 참 대단하신것 같아요^^

감은빛 2019-08-04 14:15   좋아요 0 | URL
저는 술을 적당히 마셔도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뭐든 다 합니다.
오히려 어떨 때에는 평소보다 더 집중력을 발휘하게 될 때도 있어요.
가끔 일이 남아있는데 술자리를 꼭 가야 할 때도 있는데,
이런 날엔 2차 정도까지만 술을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다시 일을 하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