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자


학생운동 시절부터 늘 회의, 회의 또 회의 이러면서 살았다. 잡지사 겸 출판사에 있을 때는 조금 덜했지만, 시민단체 시절과 지금 협동조합에 일하면서 늘 회의에 치여 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4건 이상 회의에 참석했던 날, 누군가 내게 말했다. "회의주의자!" 회의에 참석하다보면 삶에 회의가 드는 경우도 있다.


오늘 오전에 약 3시간 이상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가 있었다. 인원이 많은 회의는 힘들다. 아니 원래 회의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회의 주최자가 명확한 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를 권하되, 주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특정한 사람에게 발언이 쏠리지 않고 균등하게 발언 기회가 주어지도록, 그러면서도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논의를 잘 끌어가야 한다. 이렇게 회의가 진행되려면 주최자가 경험이 많고, 적절한 시점에 잘 개입하면서도, 각자의 발언을 요약 정리하면서, 이견에 대한 합의와 상호 이해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회의에 앉아 있으며, 대체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회의에 참가한 것 만으로 회의주의자가 되어버린 상황. 회의 자리에서 발언을 주로 하다보면 그 발언자가 그 일을 떠맡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지간하면 발언을 자제하고 흐름을 따라가는 이유다. 그러나 아침 회의에선 명확하게 요구받은 내용이 있었고, 주최자가 나를 콕 찍어서 의견을 요청하기도 해서 어쩔수 없이 회의에 젖어 멍하니 있던 상태를 벗어나 회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회의를 아주 많이 해본, 회의에 익숙한 사람이고, 회의 진행도 많이 해본 사람이고, 회의가 주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산으로 바다로 가는 상황을 무척 싫어하는 편이라, 그런 회의에 참여하는 일이 무척 괴롭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나도 모르게 회의에 개입하게 된다. 입을 여는 순간 일이 또 하나 늘어날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어쩔 수 없다.


결정적인 것 하나


위는 내가 주도하지 않는, 다른 주체들이 주도하는 회의에 참여해야 할 경우에 주로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주최하는 회의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사전에 회의자료 준비에서부터 주요 안건에 대한 설명과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일까지 맡아야 한다. 또 업무상 소위 말하는 급이 높은 사람들, 이를테면 고위 공직자나 시의원이나 국회의원 등 힘있는 사람들과 회의를 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단순히 논의에 잘 참여하는 것에 더해 뭔가 임팩트 있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결정적인 것 하나를 던지는 것이다. 논의 흐름상 중요한 어떤 의견, 반드시 짚어야 할 어떤 논점, 논의를 매끄럽게 풀어갈 수 있는 어떤 흐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 힘있는 어떤 분을 포함한 회의 참석자 전원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오늘 오전 긴 회의를 마치고 자리를 나설 때, 같이 참석했던 한 여성 참가자가 친근하게 다가오더니, 귀속말을 하듯 귀 가까이 입을 대고 살짝 속삭였다. 내가 주장했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이었고, 내가 그걸 말해줘서 고마웠다는 말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회의에 불려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회의에 참여하면 대개 일이 더 생긴다는 부작용이 있다. 그리고 회의는 야근을 부른다. 낮에 회의를 다니느라 못한 일을 남아서 해야 한다.


또 내가 주최한 회의는 회의록이나 회의결과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제일 하기 싫은 일


제일 하기 싫은 일을 하나 꼽으라면 회의록을 만드는 것이다. 몇몇 능력자들은 회의 진행 중에 노트북으로 발언들을 다 기록하고,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회의록을 만들어 내기도 하더라. 하지만 내 경우에는 논의 흐름 자체에 집중하거나, 대개 회의 안건 자료를 설명하느라 기록까지 챙기지 못한다. 대개는 핵심 내용을 적어놓고, 논의 내용은 녹음해놓았다가 나중에 녹취록을 풀어서 회의록을 만든다. 그러면 그 녹취록을 푸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만약 2시간까지 회의 녹취록을 풀려면 거의 3시간 이상이 걸린다.


게다가 그 녹취록의 흐름에 따라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핵심만 정리하는데 또 시간이 걸린다. 이건 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다. 예전엔 이런 일에 무척 능숙했다. 만약 회의에 집중했고 바로 회의록을 쓸 여유가 있을 때는 녹취록도 듣지 않고, 1시간도 걸리지 않아 회의록을 뚝딱 만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집중했기에 대부분의 중요한 발언들 핵심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과 올해는 연합회 담당자가 있음에도 경험 부족을 이유로 내가 대부분의 실무를 도와줬다. 사실 도와줬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내가 한 거이나 마찬가지다. 회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늘 회의에 들어갈 때는 담당자에게 기록을 요청한다. 나는 그 담당자를 대신해 회의 자료도 만들어주고, 회의 안건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의를 마치고 그 담당자가 보내온 기록을 보면 실망스럽다. 핵심을 놓치고 군더더기를 적어놓거나, 표현이 정확하지 않거나. 심지어 엉뚱한 내용을 기록해두기도 한다. 대략 2달 전에 들어온 연합회 담당자는 벌써 3번 연속 회의 기록을 맡겼는데 자료를 주지 않았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며 기록을 못 했다고 했다. 아니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어도,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로 하는 회의 기록을 하나도 못 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내가 회의록을 대신 만들었다. 두 번째는 앞 부분의 아주 일부분만 기록하고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번에도 내가 대신 만들었다. 세번째는 기록해놓은 파일이 실수로 지워진것 같다고 했다.


아, 아무리 잘 이해해주려고 해도 이렇게 나오면 참 곤란하다. 그래도 혹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기죽일까봐 별 말하지 않고 대신 해줬다. 그리고 내가 만들었다는 걸 연합회 다른 조합 사람들이 알면 안 되니, 모두 그 분이 공유하도록 했다. 내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계속 뺏기면서 나는 아무런 실속이 없다. 참 허무하다.


야근


회의는 야근을 부른다. 앞서 말했듯 회의를 하러 돌아다니느라 일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회의 결정사항에 따른 역할분담으로 일이 더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일은 기꺼이 즐겁게 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일은 진짜 하기 싫은데, 관계 때문에 어쩔수 없이 떠맡기도 한다. 이럴 때는 야근을 하려고 앉아는 있지만, 자꾸만 마음은 콩밭으로 가기 마련이다. 자료를 찾는 다는 핑계로 SNS 나 검색 결과를 뒤적이며 필요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


야근은 피로를 낳고, 술을 부른다. 피곤한 몸과 머리는 이상하게 더욱 쉽게 잠들지 못한다. 이럴 때 술을 한 잔 먹어야 빨리 잘 수 있다. 빨리 자야 다음날 아침에 또 출근할테니. 그런데 자려고 마신 술은 다음날 아침 숙취를 부른다.


이상하게 꼭 야근을 하고 나면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그리고 나는 저녁에 회의나 다른 일정이 없는 한 자주 야근을 한다. 저녁에 회의가 잡히는 경우도 많다. 남들 퇴근할 시간에 나는 회의 시간에 쫓겨 이동한다.


만원버스


어제가 그랬다. 6시 30분 회의였는데, 사무실에서 상담 전화를 받다가 10분 전에야 출발했다. 이동 시간이 최소 20분은 걸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꼭 급할 때 버스는 늦게 왔다. 그리고 그 버스는 완전 만원버스였다. 그 버스를 놓치면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문으로 억지로 밀고 들어갔다. 내 뒤에도 두 명 정도가 더 밀고 들어왔다. 우린 잡을 수 있는 손잡이도 없이 사람들 틈에 끼어 이리저리 떠밀리며 움직였다. 


후끈한 공기 속에 누군가의 체취가 코를 자극했다. 왼쪽 앞에 선 키 큰 젊은 남성은 자꾸 팔굼치로 내 가슴을 밀었고, 오른쪽 뒤쪽에 선 여성은 자꾸만 내 팔에 몸을 기대었다. 물론 나도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앞 뒤의 누군가에게 기대었다. 바로 서곤 했다.


문득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때 만원 버스에서 내게 푹 안겼던 인연으로 잠시 사귀었던 여성이 떠올랐으나, 계속 흔들리는 차량 안에서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손잡이를 잡고 체중을 버티기 위해 허리와 허벅지와 발목에 힘을 꽉 줘야 했다.


목적지에 다와서 버스를 내리는 순간 이미 지쳐버렸다. 하지만 나는 회의 장소로 걸어가 약 1시간 반 가량 회의에 참여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회의 뒷풀이에 참석해 맥주를 조금 마셨다. 


여성 출마 프로젝트 2020


녹색당에서 여성 출마 프로젝트 2020을 추진 중이다. 학생 운동과 시민 운동과 마을 활동 영역에서 20여년을 지내보니 대부분 일은 여성들이 다 하는데, 어디 나가서 목에 힘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더라.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딜 가나 항상 그랬다.


어쩌다 핵심 부분 일부만 읽은 이 책 [내 안의 가부장]에 그 이유를 추정해 볼만한 내용이 있긴 했다. 어쩌면 가부장제는 우리 생각보다 더 강하게 개인들을 세뇌시켜 그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어 왔을 것이다. 나도 내 주변의 활동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 안의 가부장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세상을 바꾸려면 더 많은 여성들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청년들이 정치인이 되고, 더 많은 소수자들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한 명인 정희진 선생님이 인구의 1%가 녹색당원이 된다면 99%가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동의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준연동형비례대표제, 석패율제, 권역별비례대표제, 패스트 트랙, 청소년 참정권 등등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써야 할 일도 많다. 



며칠인지 모를 기간 동안 연속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물론 어떤 날엔 가볍게 맥주 한 캔 마셨고, 또 어떤 날엔 막걸리 두어잔 마시기도 했지만, 적은 양의 술이라도 술은 술이니까 연속 음주는 맞다. 얼마나 오래 연속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니까 아마 꽤 오래 된 것 같다.


오늘은 정말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연속 기록을 끊어 버리겠다. 집에가서 운동하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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