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farewell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이젠 가늠도 잘 안 되는데, 그게 정확한 시작 시점을 기억할만한 어떤 계기 없이 차츰 나를 잠식해 들어와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슬럼프라고 해야 하나? 길고 긴 이 침체기를 좀 벗어나보려고 다양한 뭔가를 시도중이다.
영화에 몰두해보기도 하고, 잘 안 읽던 종류의 책에 손을 뻗어 보기도 하고, 꽤 오래 연락할 일이 없던 이에게 뜬금없이 연락을 해보기도 했다. 사실 제일 하고 싶은 건 운동인데, 이건 비정기적으로 이어지는 관절 통증 때문에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하고 있다. 조금씩 시동을 걸어보고 있는데, 과연 예전처럼 씻은 듯이 관절 통증 없이 운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부분이 내 우울한 감정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 다크하고 딮하고 블루한 감정의 가장 큰 원인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일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서, 일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서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주째 무겁게 내 어깨를 내리누르던 큰 일 하나를 일차 완료 했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첫 번째 고개를 넘었다 정도로 살짝 부담감을 덜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한결 살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좀 제발 이별했으면 좋겠다. 슬럼프여. 침체기여, 우울증이여, 무기력감이여, 이만하면 오래 만났으니 그만 떠나줄래? 너 때문에 인생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안녕! 굿바이! 페어웰! 아디오스! 아듀! 아우프 비더젠! 짜이찌엔! 사요나라!
승진? 활동비 인상?
어제 이사회 회의에서 실무자로서 개인적인 감정을 살짝 드러냈다. 해마다 안 힘들었던 해는 없었지만, 작년 한 해는 유난히 스트레스가 많았고, 힘들었다. 일은 훨씬 더 많이 했는데, 성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 내가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외부 요인 때문에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소모되는 것이 너무나도 싫고, 부당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과연 가능 할지는 모르지만.
시민단체에서 조금 경력을 쌓았을 때 팀장이란 직책을 얻었다. 출판사에서도 조금 일에 익숙해지고 한 사람 몫을 할 때쯤부터 팀장이란 직책을 달았다. 여기 협동조합에 와선 처음부터 팀장이었다. 그 위도 그 아래도 없다. 나 혼자 실무자로 일하는 곳이니까. 우리 법인의 모든 일을 나 혼자 다하고, 심지어 거기에 더해 실무자가 없었던 연합회 법인의 일까지도 나 혼자 다 해야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계속 팀원 없는 팀장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쭉 팀원 없는 팀장이었다.
어제 이사회에서 내 직책을 사무국장으로 하겠다는 언급이 있었다. 사실 주위에선 직책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벌써부터 내가 사무국장이 되어야 하는데,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는가 하면, 다 좋은데 결정적으로 어떤 한 가지가 부족해서 아직 사무국장이 되지 못한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사무국장이어도 관계없고, 팀장이어도 아무 상관 없다. 어차피 이 법인의 일은 나 혼자 해왔고, 지금도 혼자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확률이 높다. 게다가 밖에선 다들 나를 국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내 직책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으며, 내가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국장일거라 여기고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사실 한동안 한 명 더 있었다. 1년 간 일을 배웠고, 조금 익숙해 질 때쯤 건강 악화로 병가를 냈다가 복귀 후엔 반상근으로 일을 했다. 다만 병가를 냈던 시점부터 다시 혼자가 되었고 복귀 후에도 본인 업무 영역을 온전히 혼자 감당하지 못해서 거의 나 혼자 일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계속 건강이 나아지지 않아 곧 그만둘 예정이다. 암튼 결국 그래서 나 혼자인데 이걸 승진이라 부르기도 애매하고 그냥 직책명이 바뀌는 정도라고 여기기로 하자.
올해 지자체에 제공하는 청년 인턴 제도에 응모해, 만 39세 이하의 청년 한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인건비를 제공받게 되었다. 지자체에서 인건비의 90%를 부담하고, 우리 법인이 나머지 10%를 부담하면 된다. 그런데 인건비가 딱 정해져 있더라. 그런데 생각보다 금액이 높아서 깜짝 놀랐다. 지금 이 법인에서 일한지 5년차인데, 내 활동비보다 더 많더라.
그래서 이사장이 내게 한 마디 했다. 신입 활동가보다 내 활동비가 적을 수는 없으니, 다른 사례를 참조해서 상식적인 활동비 인상안을 만들어 보란다. 사실 해마다 조금씩 활동비가 오르긴 했다. 늘 최저임금 수준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지만, 해마다 최저임금도 늘 조금씩은 오르니 오를 수 밖에 없긴 하다. 처음 여기 들어올 때는 진짜 적은 액수를 받았다. 이사장도 그 돈 받아서 애들 키우면서 살 수 있겠냐고 걱정했다. 당시 나는 여기 일이 이렇게 많고, 스트레스가 많을 거라 예상 못하고 비 정기적으로 교정교열 알바와 영업 대행 알바 등 출판계에서 조금씩 돈을 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판사에 있을 때보다 터무니없이 낮아진 활동비에도 이 일을 선택했던 거였다. 다행히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내 활동비도 오르긴 했지만, 아이들 양육비를 보내고 나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뭐 물론 내가 쓰는 돈의 대부분은 술값으로 나가는데, 술을 조금 덜 먹으면 조금 더 안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럼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할 수 있으므로 고려하지 않겠다.
얼마가 될 지 모르겠으나, 아니 얼마나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법인의 재정 상황이 뻔하기에 큰 금액을 올리진 못하겠지만, 사실 새로 채용할 청년 인턴의 월 급여액보다 많이 받는다면 현재 보다는 그래도 제법 오르는 것이긴 하니까 큰 금액을 올리는 것이라 여겨야 하려나? 암튼 활동비가 오른다니 그건 좀 기분이 괜찮다. 직책이 바뀌는 건 정말 요즘 말로 1도 기쁘지 않았건만, 역시 돈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이 달라질 수 밖에 없나보다.
그래봐야 매달 활동비가 통장을 스쳐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찰나의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심할 경우 고작 하루도 가지 못할 그 행복을 차라리 느끼지 않으면 좋으련만.
지역 공동체 화폐
우리 지역 공동체 화폐가 출범한 지 벌써 1년 이상 지났다. 창립 회원으로 공동체 화폐의 순기능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어서 열심히 사용하려 마음 먹었으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각자 수첩을 갖고 다니며 공동에 화폐를 쓸 수 있는 가맹점을 이용하고 수첩에 기록해야 하는데, 그 수첩을 늘 갖고 다니는 일이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몇 번 이용 후엔 영수증만 챙겨놓으면 나중에 정산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영수증까지 챙기는 일조차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난 우리 법인 영수증을 챙기는 일만 해도 너무 힘들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 공동체 화폐가 진화했다.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가 가능하도록 바뀐 것이다. 일정 금액을 입금하면 거기에 소액의 적립금을 추가한 금액이 앱에 충전된다. 가맹점에서 이용하면서 앱 자체에서 가맹점을 선택해 내가 이용한 금액만큼 바로 결제가 가능했다. 와! 이거 진짜 편리하더라.
대개 5만원을 입금하면 10%가량 적립금이 붙어 5만5천원이 충전된다. 게다가 몇몇 가맹점은 이 공동체 화폐로 결제할 경우 추가 할인을 제공했는데, 이 역시 5~10% 가량 되었다. 작년에 나는 10% 추가 할인을 제공하는 식당에서 주로 공동체 화폐를 이용했는데, 그 결과 나는 충전한 금액보다 약 20% 가량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식당 뿐 생협과 북카페 등에서 쓸 수 있으니 점점 사용할 기회는 늘어났다. 재미있는 건 수제 생맥주집, 치킨집 등의 가맹점도 있어서 가끔 동네 술꾼 선배들이 술을 산다면서 오늘 공동체 화폐 충전했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물론 가맹점이 아직 적어서 더 늘려야 한다. 내 경우엔 일터 근처 식당에서 주로 밥을 먹고, 가끔 생협을 이용할 때 사용할 수 있지만, 그외에는 쓸 일이 별로 없다. 일터 근처 치킨집이 있긴 한데, 사실 치킨과 맥주가 취향이 아니다보니 그닥 갈 일이 없다. 수제 생맥주집은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거리가 있어서 역시 갈 일이 없다. 집 근처 맛있는 식당이나, 집 근처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괜찮은 술집이 가맹점에 추가된다면 아마 사용하는 금액의 단위가 바뀔 수도 있을 듯한데, 이 부분은 조금 아쉽다.
공동체 화폐가 꾸준히 성장해서 가맹점과 이용자가 더 늘어나고, 그래서 지역에서 사용하는 돈이 대기업이나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안에서 돌면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한 몫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씩 이 자본주의의 견고한 틀을 허물었으면 좋겠다. 일단 나도 활동비가 오르면 조금 더 이용 금액을 높이겠다.(공동체 화폐 담당자가 이 글을 본다면 분명 좋아하겠지)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대안화폐에 대해 종합적으로 담고 있는 듯하다. 이미 시도했다가 없어졌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사례도 많겠지만, 수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시도들이 일어나 조금씩 자본에 도전했으면 좋겠다. 전환마을로 유명한 토트네스처럼 관광객들이 기념품으로 대안화폐를 사갈 정도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사실 오늘 낮에 평소 좀처럼 갈 일이 없는 저 멀리 강남까지 회의 때문에 다녀왔는데, 그 회의가 또 정말 짜증나고, 답답하고, 암만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것이어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면서부터 계속 술이 땡겼다. 남아 있는 일은 그냥 내일로 확 미뤄버리고 이제 술 마시러 가야겠다. 오늘은 무슨 안주에 소주를 마실지 고민해보자. 일을 미룬 만큼 내일의 나는 괴롭고 힘들겠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이다. 지금의 나는 그저 술 마실 생각에 즐거우면 될 일이다. 아, 내일의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건네자.
미안! 쏘리! 꼬메나사이! 엔슐디궁! 빼르동! 뚜이부치! 제수위디줄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