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세대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요즘 애들은 유전자 자체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늘 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폰으로 셀카를 찍거나 영상을 찍는 걸 보면 그렇다. 한번은 애들 밥 챙겨주느라 주방에 있었는데, 작은 아이가 내 폰으로 영상을 찍었더라. 자기 장난감이나 인형을 막 소개하고, 사탕이나 초콜렛 같은 걸 막 설명하고, 그러다 내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고 막 소개했더라. 어디서 이런 걸 배워서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늘 보던 유튜브 채널을 따라하는 거였다.


작은 아이가 자기 물건들 하나씩 보여주고, 소개하다가 뭔가 더 없어서 내 물건들을 막 뒤져서 꺼내오는데, 대학 시절부터 갖고 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예전에 아이가 뒤져봤던 거라서 거기에 예전 내 사진들이 있다는 걸 알았던 거다.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군대 때 사진들이 몇 장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신분증들. 학생증, 도서관증, 태권도 단증 등등 이런 것들에 있는 내 사진들을 막 영상에 보여주고 있었다.


아빠 여깄네


나중에 아이가 단체 사진들에서 아빠를 찾겠다고 했다. 찾아보라고 했더니 대학 시절 동기들과 찍은 사진들이나, 동아리 단체 사진에서는 금방 나를 찾아냈다. 그러다 군대에서 완전 군장에 총까지 메고 찍은 사진들에선 쉽게 찾지 못했다. 당연히 방탄모를 써서 얼굴이 잘 안 보이니 찾기 어려울 수 밖에. 결국 아이가 힌트를 달라고 했다. 그제서야 나도 자세히 살펴보니 소대 전체가 같이 찍은 사진에선 나도 나를 못 찾겠더라. 근데 가만 떠올려보니 그때 내가 분대장이었단 걸 기억해냈고, 견장과 호르라기를 차고 있는 나를 곧 발견했다.


아이에게 남들한테 없는 걸 어깨에 달고 있다고 했더니, 그래도 사진이 작아서 잘 찾지 못하더라. 그래서 아이가 다시 왼쪽, 중간, 오른쪽 중에 어디냐고 묻더라. 당시 내가 가장 선임 분대장이라 가장 가운데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중간이라고 알려줬더니. 두세번 만에 아이가 찾아냈다. 아~ 아빠 여깄네. 


아빠 책 읽어 줄게


주말 아침에 피곤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로만 애들 뭘 좀 먹여야 하는데, 피곤해서, 이불 밖이 너무 추워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있었다. 큰 아이가 깬 걸 느끼고, 작은 아이가 내 품으로 쏙 파고들어서 춥다고 속삭이는 걸 듣고 반사적으로 아이를 꼭 껴안고 토닥여줬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아이들이 배고프단 소리가 나올 때쯤에야 일어나서 먹을 걸 챙겼다.


밥을 먹이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누워있는데, 아이가 책을 읽어주겠다고 그림책을 가져왔다. 동물들과 관련한 몇 개의 짧은 에피소드가 있는 그림책이었는데, 아마도 싸구려 전집에 포함된 책이었던지, 정식 판매하는 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용도 뭐 별 내용이 없었는데, 아이는 그 별거 아닌 게 그렇게 웃기다며 막 웃었다.


예전에 아이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열심히 읽어주곤 했는데, 이젠 그 쪼그맣던 녀석이 나에게 책을 다 읽어주는 구나 싶었다. 별로 재미없었지만, 아이가 열심히 읽어주는 걸 보고 급 반성하고 열심히 들었다. 다음에 또 읽어달라고 해야겠다.


아빠 게임하자


토요일에 아이들과 동네 서점에 가서 책과 문구류 등을 샀다. 가방 속에 몇 년째 숨어있었던 5만원 상품권으로 모자라 추가로 돈을 써야 했다. 그 와중에 작은 아이랑 문구 코너를 돌다가 보드게임을 하나 샀다. <식객> 이란 게임이었고, 전국을 돌며 음식을 맛보고 포인트를 모으는 방식이었는데, 살짝 아쉬웠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허술한 느낌.


한동안은 아이들과 트럼프 카드 게임을 많이 했다. 나도 어릴때 여러 종류의 카드 게임을 자주 했고, 많이 알고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애들하고 하려니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 그래도 애들하고 어울려 제법 자주 했는데, 요새 큰 아이가 시들해하니 작은 아이랑 둘이서만 하는 건 또 별로 재미가 없더라.


또 한동안은 애들과 윷놀이도 자주 했다. 우리 지역의 어느 사회적기업에서 우리 동네 사회, 경제, 문화적 자원들을 배치한 지도로 윷놀이 판을 만들었는데, 정말 아이디어 좋게 잘 만들었다. 그걸 말판으로 놓고 윷놀이를 하면 자주 다니는 익숙한 공간들 위에서 윷놀이를 하는 것이라 애들도 좋아했다.


아이들이 오는 날이면 계속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거나, 폰으로 유튜브를 보곤 하는데, 그것보다 주기적으로 애들이 질리지 않을만한 재미있는 게임들을 찾아보고, 개발해야겠다. 예전엔 그런 궁리를 많이 하고 살았는데, 요샌 여유가 없으니 생각도 못했다.


연말


벌써 꽤 오랫동안 침체기에 푹 빠져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 정말 올해가 며칠 남지도 않았다. 일이 안 풀려도 지독하게 안 풀려서 정말 저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막판에 하나 기분 좋은 성과를 올렸다. 덕분에 칭찬도 좀 받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아주 조금은 올라온 듯하다.


그래도 연말 안에 끝내야 할 일들과 1월 초까지 마쳐야 할 프로젝트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절로 한 숨이 난다. 벌써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야근 중인 지금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하지만 참고 있다. 오늘은 공식적인 송년회 일정도 하나 있었지만, 일 때문에 포기했고, 친했던 후배로부터 따로 연락이 왔건만 그것도 거절했다.


기억해보면 작년 이맘 때는 완전 술독에 빠진 것처럼 매일 술을 퍼부으며 지냈던 것 같은데, 올해는 그래도 작년 보단 조용히 보내는 구나.


워낙 주변에서 걱정어린 시선과 건강을 염려하는 말들을 많이 받고 들어서, 이젠 좀 멀쩡한 것처럼 연기라도 해야겠다 싶다. 실제 이 긴 침체기에서 벗어나 정상 궤도를 올라올 날이 언제일 지는 몰라도 이대로 계속 가다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걱정하고, 소문이 퍼질 것 같아서 안되겠다. 과연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를 속인다는 각오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주마.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12-19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7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0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7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12-20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요즘 초등학생들은 유트브 계정이 있는 아이들이 최고 인기인라고 하더군요^^

감은빛 2018-12-27 20:13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직접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 같아요.

정말 유전자 자체가 다른 아이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자주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