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발견


어느 순간부터인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일이 정말 귀찮다. 몇 달 전에 어느 회의 자리에 가면서 가방을 안 갖고 맨 몸으로 갔는데, 그걸 본 이웃 조합 이사장님께서 혀를 끌끌 차셨다. 가방도 안 갖고 오다니! 그 분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어떻게 회의 참석하러 오면서 가방도 없이 올 수 있단 말인가? 근데 가방이 필요한 이유는 회의 자료를 담아 가는 것과 회의 자료에 기록할 필기구를 가져가는 이유 밖에 없다. 당시 필기구는 내 옷 주머니에 들어있었고, 회의 자료는 둘둘 말아서 가져가면 되었다.


암튼 한동안 서류가방을 사무실에 두고 작은 가방만 메고 출퇴근을 하거나, 아예 가방 없이 출퇴근을 했다. 저녁에 술 자리에 가방 없이 가면 다들 물었다. 가방은? 어, 사무실에. 다시 가서 일할거야? 아니. 안 가. 근데 왜 가방은 두고 왔어? 그냥. 갖고 다니기 귀찮아서. 여러 사람과 이런 내용의 대화를 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사무실에 둔 서류가방 맨 뒷면 지퍼를 열었다. 겉으로 만져보니 뭔가 봉투가 같은게 있어서 열어본 거였다. 종이 봉투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동네 서점에서 발행한 1만원 상품권이 5장이 나왔다. 이걸 언제 받았나 떠올려보니, 아마 5~6년 전쯤 지역 신문에 연재글을 쓰고 원고료 대신 받았던 거였다. 왜 이게 여기에 들어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못 쓰면 어쩌나 싶었다. 상품권을 펼쳐들고 꼼꼼히 살폈다. 혹시 기한이 정해져있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기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이걸 갖고 책 사러 갔다가 안 된다고 하면 곤란하니 미리 확인이 필요했다. 마침 그 동네서점 점장과 친분이 있었다. 메세지로 상품권을 받고 잊고 있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 발견했는데, 지금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답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딘가 숨겨뒀다가 잊어버린 비상금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고 싶은 책도 많지만, 애들을 데려가서 애들 원하는 책도 사줘야겠다. 당시 원고료 대신 이 상품권을 받을 때 쓴 글은 아이들에 대한 글이었다. 글감을 제공해준 당사자들에게도 보상이 필요하겠지.


주말에 아이들과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몰래 웃음을 지어본다.


인정 욕구 충족1


누구나 남에게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 걸 인정 욕구라고 하더라. 나 역시 인정 욕구가 있다. 아니 난 그 인정 욕구가 좀 강한 편이라 생각한다.


며칠 동안 1번의 발제와 2번의 강의를 했다. 그래서 발제비와 강의비가 통장으로 들어왔다. 물론 그 돈은 통장에 며칠 머물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난 돈이 들어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강의비 받았으니 술 한 잔 마셔야지. 발제비 받았으니 술 한 잔 마셔야지 이러며 매일 술을 마셨다. (즉, 돈이 안 들어왔어도 뭐라고 핑계를 대며 매일 마셨을 거다.)


어제 강의는 후배 부탁을 받고 급하게 수락했는데, 참여자가 무척 적었다. 강의 시작할 때는 4명이었고, 중간에 두 명이 더 들어와 마지막엔 6명이 들었다. 아마 내 강의 경력에 최소 인원이지 싶다. 그 주제로 강의를 여러번 했기 때문에 이번 강의를 위해 딱히 준비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주제는 같아도 대상이 달라서 강의 자료를 살짝 손 보면서 머리속으로 강의를 한 번 해봤다.


발제나 강의나 사회를 맡으면 항상 시작할 때 살짝 긴장한다. 그 시작을 어떻게 편안하게 잘 풀어내냐에 따라 그날의 결과가 정해진다. 욕심이 많은 편이라 내 강의자료는 늘 시간에 비해 많은 것들을 담고 있고, 나는 늘 시간에 쫓기며 빠른 말투로 정보를 쏟아낸다. 속으로는 늘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내 입은 쉴새 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강의 후에 말이 정말 빠르시군요 라는 평을 듣곤 했다.


근데 최근에는 욕심을 줄이고, 딱 필요한 만큼만 정보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생략하는 기술을 점점 익혀갔다. 이번 강의는 인원이 적어서 거의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한 강의 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한 강의라고 느꼈다. 이건 완전 자뻑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강의였다. 소수의 참여자들 한 명 한 명과 모두 눈을 맞춰가며, 적당한 시점에 질문을 던지고, 강조하기 직전에 여백을 주고, 강조점에선 확실히 효과음을 넣어줬다. 


예전에 학원 강사 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노력했던 게 한 편의 영화같은 강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강의 자료를 만들 때마다 가장 신경쓰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강의 태도도 정말 중요하다 단순히 정보만 떠들어대는 것은 지루하다. 실제 경험담과 같이 스토리가 들어가야 한다. 늘 살펴보면 확실히 실제 있었던 사건을 들려줄 때 사람들이 가장 집중한다는 것을 느낀다.


암튼 강의를 마치고 주선자였던 후배와 담배 한 대를 피울 때, 후배가 강의 정말 잘 들었다고 했다. 형님 강의 잘 하신다는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 들어보니 더 대단하네요! 했다. 나는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런 걸 인정 욕구라고 하는 구나 깨달았다.


인정 욕구 충족2


지난 주였던가 정책 개선 제안 및 현장의 어려움 등을 토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날 아침엔 학교 설명회가 있었다.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인데, 나는 학교 햇빛발전소를 설명하기 위해 교장선생님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들 엄마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남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가족이었던 사람. 그 사람이 학교측 중요한 의사결정자로 참여하는 자리라니. 그래서 사실 좀 긴장되었고, 좀 많이 신경쓰였다. 아침에 뭘 입고 갈지 고민을 많이 했다. 평소 학교 설명회를 다닐 때는 그냥 평소처럼 다녔다. 청바지에 셔츠 차림. 근데 그날 만은 왠지 정장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설명회에 임하는 나도 더 집중이 잘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정장을 입고 나갔기에 오후에 있었던 정책 개선을 위한 모임에도 당연히 정장을 입고 갔다. 여러 조합에서 각자 여러가지 어려움을 토로하고 개선 방안을 요구했다. 그런데 각자의 입장들을 들으면서 조금씩 아쉬움이 있었다. 발언을 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잘 정리해서 말하면 좋을텐데, 이야기가 자꾸 엉뚱하게 흘러가거나, 배경을 잘 설명하지 못하거나, 흐름이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앞서 여러 사람들이 요구했던 내용들에 대해 쭉 정리를 했다. 시간 순서에 따른 정리, 배경과 이유와 목표에 대한 정리, 과정과 현재와 향후 예상 시나리에오 대한 정리. 나중에 모임을 마치고 함께 참석했던 친구에게 메세지를 받았다. 오늘 진짜 멋지던데, 네 정장 입은 모습도. 회의 흐름을 한 번에 정리한 발언도. 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으며 딱 들었던 생각이. 그래, 나 정장 완전 잘 어울리지. 몸매가 받쳐주잖아. 그리고 나 완전 정리 잘 하는 편이지. 항상 핵심을 잘 깨닫는 편이고, 흐름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니까. 완전 자뻑이지만, 늘 내 일정에 회의가 많은 이유는 그 회의 마다 내가 돋보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경우가 있다. 내가 준비하고 주최하는 회의는 당연하고, 단순 참석하는 회의에서도 나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중요한 제안이나 지적을 하거나, 논의가 지리멸렬할 때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해왔다.


암튼 친한 친구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으니 그것도 무척 기뻤다. 어제 그 친구와 술을 마시는데, 그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스트레스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왜 네가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 알겠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많고 힘든 일이지만, 이 분야에서 네가 이렇게 인정받는 사람이니, 너에게 다른 일을 찾으라는 말을 못하겠다. 다들 너만 쳐다보는 것 같더라. 네가 워낙 유능하니까 더 너한테 기대고 있는 것 아니냐. 뭐 이런 내용이었다.


가끔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을까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돈도 못 버는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그 시간에 돈을 벌었으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훨씬 더 폼나게 살 수도 있었을테데. 어제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내가 인정 욕구가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인정 받고 싶으니까 부탁을 저버리지 못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떠안고 가다보니 늘 바쁘고 정신없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가 아니라 왜 이렇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었나로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다. 근데 그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자라는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관이나 태도의 문제인가? 모르겠다.


늙어간다는 것















요즘 부쩍 늙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날 학교 설명회에서 만난 애들엄마는 오히려 더 젊어진 듯한 느낌이더라. 염색한 머리는 여전히 숱이 많았고, 피부는 탱탱하고 밝았다. 연애하던 시절에 참 사랑했던 그 눈은 생기가 넘쳤다. 지금 내 꼴을 보면 그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을까? 사실 이혼하기 한참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나보다 어리게 보았다. 나도 예전에는 꽤 동안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젠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동안.


그리고 왜 이렇게 몸이 여기저기 자꾸 망가지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여기저기가 아픈지 모르겠다. 친구한테 얘기하니 늙어서 그런 거란다. 젊을 때는 절대 겪어보지 못한 증상들이 자꾸 생기는 게 정말 그냥 늙어서일까? 늙어간다는 것 그것 참 슬픈 것 같다.


내 몸에 대해 더 잘 알아야겠다. 늙더라도 이렇게 아프면서 늙고 싶지는 않다. 건강하게 늙고 싶다. 이번 주말에 아이들과 서점에 가서 살 책을 정했다. 친한 (아니 만난지 꽤 오래 되었으니 친했던 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형이 번역한 책이니 벌써부터 책 정보는 알고 있었다. 이번 주말엔 너를 읽어주마.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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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18-12-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아프냐 하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요.
어떤땐 아픈데도 술을 마시면 일종의 마취같은 현상으로 좀 나은것 같거든요.
그런데 사실 본인이 더 잘알잖아요.

감은빛 2018-12-14 05:00   좋아요 0 | URL
그래요. 마지막 말씀처럼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재미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술을 많이 줄이고 있어요.
진짜 술 때문인지 아닌지 한번 보자 싶은 마음도 있어요.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