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길. 쩌렁쩌렁 소리도 우렁차게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깜짝 놀라 가보니 그 아이,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소리로만 울고 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응? 괜찮아. 괜찮아."하고 다독여준다. 아이는 더 크게 울어댄다. 그리고 곧 뚝 울음을 멈추고 찔끔찔끔 달아난다. 멀뚱히 지켜보다 핏, 하고 웃고 만다. 소리내어 서럽게 울어대는 아이를 부러워하는 나를 봐서.

처음, 갓난아기 때를 기억한다고 말하면 다들 내가 평소 잘하는 거, 즉 '뻥의 세계'를 기어이 펼쳐댄다고 웃고만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일이 자연스럽다. 꽁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마음이 불편하니까. 그렇다고 이 한 몸 희생하여 기분을 풀어 주리라는 자각은 없다. 하는 짓이 덜 떨어지고 엉뚱하여 옆에 있는 사람을 재밌게 해줄 뿐이다. 이런 평을 직접 들을 때, 나는 참으로 기막히게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어떻든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얘길 하면서 말한다. "그래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하고. 그리고 자주, 시간 날 때마다(실은 시간을 일부러 내서) 반복해서 말한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내가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신뢰를 얻는 계략이다. 같은 말을 눈치 못 채게 질리도록 여러 번 들려주는 것이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인 것이다. 우습게도 통한다. 지금은 하도 말을 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아주 어릴 적을 기억하는 유별나고 신기한 아이로 알고 있다. 이렇게 쓰니 무슨 사이비 교주와 순진한 성도들의 관계 같기도 하다.

무턱대고, 순도 100퍼센트 진심을 터무니없는 장난처럼 흘려버릴 때가 있다. 보통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본다. 자기만의 세계가 유달리 공고하여서 쉽게 자신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누구에게나 다 친절하나 아무에게나 쉽사리 자신의 얘기를 떠벌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장난처럼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얼얼해지는, 속 깊은 진실이 끈덕지게 들어가 있다는 것을. 그 말을 얼떨결에 뱉고나서 내가 한 짓을 떠올리며 짧지만 진한 쓴웃음을 짓는다는 것을.

모든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편의에 따라 왜곡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내가 기억하는 사실을 고집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기억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해서 나는 내가 기억하는 바를 떨치지도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은 가을이고 어스름 저녁 즈음이다. 방문 앞의 찬 마루에서 포대기에 싸여 있어서 볼이 시렸다는 느꼈다. 그런데도 내가 소리를 내서 울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나를 위협하는 뭔가가 있었던가. 아닌가. 나는 그때 본 방안의 형광등 불빛도 그리고 마루의 불빛도 앞 화단의 모습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서늘함을 떠올리면 으스스하고 소름이 돋고 쭈뼛거리는 일도 여전하다.

눈물만을 뚝뚝 흘려대는 일을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킨 것도 아니다. 내가 소리내 울면 누군가가 윽박질러댔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아무 소리도 없이 눈물만을 떨궈내는 궁상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혼자 있을 때만 조용히 우는 버릇이 어릴 적 그 기억에 연유한다고 한다면 다들 의아해할 것이다. 나 자신도 우습기 짝이 없는, 허술한 인과관계이어서 더 그렇다. 하지만 어쩌랴. 진짜로 그렇다고 느끼는 내가 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 I와 같이 자취를 했다. 나는 오빠와 같은 도시에 있는 여고를 다녔으므로 1학년때 부터 오빠와 자취를 했었다. 말이 자취지 거의 날마다 부모님이 오셔서 밥을 챙겨주시고 청소를 해주시고 가셨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데는 버스 기다리고 어쩌고 하는 시간까지 해서 두어 시간 걸리나, 자가용으로는 거의 사십분 밖에 안 걸렸다. 그래서 일 마치시고 부모님은 저녁 늦게라도 자취 집에 들르곤 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오빠가 대학을 가고 옆방이 비자 나는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던 친구를 꼬셨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그 친구와 친한 정도를 봤을 때 그 아이가 전혀 마다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다만 그 아이가 주저한 것은 자기 언니가 해준 말 때문이었다. 친한 친구랑 같이 자취를 하면 열이면 열, 모두 의가 깨진다고 했던 말. 이 때문에 머뭇대고 있었다. 그때는 친구더러 너무 소심하다고 툴툴거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기우만도 아니었던 것 같다.

비록 방은 따로 쓰지만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아이가 같이 밥 먹고 학교 오고 가고 하면서, 부딪칠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옆방에 자취를 했고 우리 부모님은 고 3 자식을 둔 사람들답게 자주 집에 오셨다. 그리고 아침밥을 해주고 가셨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한 일인데 그 친구와 종종 다퉜다. 실은 다퉜다기보다는 나 혼자 화내고 화 식히고 하는 편이었다.  같은 반이기도 했던 그 아이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투덜대는 일이 잦았던 것 같다. 하지만 I는 대부분을 이해해주었고 감싸주었다.

때는 수능을 한달 하고도 보름정도 남았을 때. I의 어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태롭다는 말을 I에게서 들었다. 나름대로 I의 예민한 신경을 거슬리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썼지만 못된 습성은 어디 가랴. 지금은 기억도 못하는 사건 때문에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던 I. 그녀는 이런 나를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 대문의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아주 많이 서럽고 아팠으리라.

하지만 자취 집의 바깥방에 살았던 나는 화가 덜 풀려서 문 열어달라고 큰소리 내다가 아무 기척이 없자 내 방으로 들어가 잤다. 한참 자고 나서도 씩씩댈 만큼 화가 덜 풀렸다. 나는 굳게 닫친 대문은 애초에 열려는 시도도 않았다. 그리고 내 키를 훌쩍 넘는 담을 넘해서 안집으로 들어갔다.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고 치기만 펄펄하던 그 십대에 못할 일이, 무서울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I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나는 그제까지 울고 있던 I를 향해 대화 좀 하자고 그랬다. 화날 수록 침착해지는 나는 우리가 하는 건 대화이고 나는 네게 아무런 나쁜 감정 없다고, 다만 맺힌 게 많아서 그러니 얘기로 좀 풀자고 헛소릴 했다. 어디 제 정신이었을까 만은 나의 침착함은 그래도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했다.

I는 눈물만 흘렸고 나는 나대로 아랑곳않고 조목조목 따져가기 시작했다. I가 너무 서럽게 울었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참을 울고 조금 잠잠할 때 그리고 "SY! 니가 밉다. 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무슨 커다란 잘못을 했길래 이런 말을 들어야 했는지 그때는 정말 알지 못했으므로.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정말 이러다 애가 날 다시는 안 본다고 하면 안 되는데---.'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그때부터 눈물을 짜냈다. 엉엉 소리내 울었다. 눈물이 눈물을 부르고 우리는 얼마나 그렇게 물기를 짜냈을까? 사람 몸에 물 성분이 많다는 말을 그때 절실히 몸소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조금이라도 슬펐던 일을 생각하면서 의식적으로 울었다. I는 나의 모습에 당황해했고 그때다 싶어 나는 아직도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I의 단호한 대답. 여전히 그렇단다. 상심한 나는 네가 얼마나 저질인지 사람을 얼마나 질리게 하는지 잔인하게 읊어댄다. I는 그 새벽에 집을 나갔고 나는 차마 따라잡지 못했고 어둠을 서성이다 내 방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여전히 내 부모님이 오셨고, 아침밥을 해주시면서 둘이 싸웠냐고 물으셨다. I는 일찍 학교에 가더라며. I한테 잘 해달라고 당부하는 어머니의 말에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I가 새벽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일에 안도했고 절망스러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안하단 말을 하려고 했다. 인사치레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잘못했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는데 편지로 그런 말을 썼다. 그리고 전해주지 못했다. 그날 학교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 있는 I를 자극할 순 없어서였다. 우리가 싸운 지 하루만에 I가 말을 걸었고 나는 불안하기만 했다. 좋지 않은 징조. 내색하지 않는 고통이 더 무서워서.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을까. I의 어머니가 급기야 병상에 누우셨다고 했고 I는 고향집에서 통학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같이 살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수능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선생님과 친구 몇은 I의 집에 갔다. 상복을 입은 그 아이를 나는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독한 향냄새가 매웠고 견딜 수 없어 연신 훌쩍이다 밖으로 나와 울었다. 다시 돌아와 아무 일없는 척 있는데 I가 다가와 연신 고맙단다. 나는 뭐가 고마운지도 몰랐다. 지금도 역시 모르겠다. 

내가 소리내 울어본 게-내가 기억하는 것이- I와의 일에서였다. 슬픔을 가장하면서 울었고, 울면서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기가 막힌 일을 저질렀던지, 진심을 보이는 일이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지---. I는 이때 있었던 일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고 나는 정말 말하고 싶다. 너무 두려웠다고, 너를 잃게 되는 일이. 비록 짜내고 짜낸 그 눈물이 다 가짜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언젠가는 필히 말하고 싶다.

울 일이 있으면 나는 혼자서, 조용히 눈물만을 떨군다. 내가 그때는 몰랐지만 I를 부러워도 했을 듯 싶다. 내가 아까 소리내 오는 아이를 부러워했듯이. 엉엉 울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시끄럽게 떠들썩하게 노닐지만 어찌 울 때는 그리도 고요할까. 나에게 결핍된, 내가 상실한 그 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참 이상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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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칵 비가 쏟아지진 않을 것 같은데!"처럼 멋진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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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들어가라."

 "(푸핫) 여직 너네 동네에서는 '사랑해'랑 같은 말이 '들어가라'냐?"

 "......"

 "(제법 근엄하게)사랑해."

"어, 나는 미안해."

"......"

나의 살던 고향에서는 전화를 끊으면서 하는 인사말는 "들어가라(혹은 "그럼 들어가세요)"다. 이걸 예전에 I, 이 녀석한테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지로 그렇게 수 년을 별 의식없이 써온 말인데 왜 그러는 거냐고 빤히 쳐다보면서 묻는 아이에게 나의 대답은 궁색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처음엔 예의상 건네는 이 인사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밥 먹었냐?"와 "어디 가니?"와 같은 거라고 했다. 그래도 멀뚱히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어 보이길래, 얼굴 안 보고 전화로 대화하면서도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상대에 대한 무한한 배려와 사랑과 관심이 깃든 말이라고,(물론 어조에 따라 느낌이 상당히 달라지겠지만 이건 자연 무시!) 상대가 전화를 끊고 보호와 안식의 어떤 공간 안에서 편히 머물라는 뜻이라고 뻥의 세계를 펼쳐댔다. 물론 효과는 전혀 없었다. 대놓고 나를 한심한 듯 아래 위로 훑어봤으므로. 그런데 정말로 "들어가라."는 말의 뜻은 정말 어조나 상황에 따라 이런 의미도 들어가나 보다. '그대의 말씀을 그만 듣겠사오니 우리 전화통화를 종료하십시다'는. 이처럼 정중한 뜻이 담겨있는 것같다. 사랑 받는 게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지 모르겠다. 사랑 주고 사랑 받는 게(안 주면서도 받는 것까지 포함하야)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색하고 버겁게 다가온다. 이제 나도 지칠 줄 모르던 그 뻔뻔함에서 벗어나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 어떻든 내가 원치 않는 사랑을, 내가 취하는 거부의 포즈를 무시당하면서도 더 이상 강력히 말하진 못하고, 상대가 보여주는 마음을 보기만 하는 건 분명 상대한테 미안한 일이다. 스스로도 괴로운 일이고. 그것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아,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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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에 학교에서 MBTI를 받아 봤다. 교양으로 심리학의 이해를 듣는 친구가 조별과제로 내야하는 거라고 했고 난 재밌겠다면서 같이 갔었다. 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더 잘 어울리는 말들을 찾아서 체크하는 식이다. 가령 나는 주관적인가, 객관적인가, 하는 것들. 그걸 하면서 능글능글 맞은 근로학생 때문에 많이 웃었고,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우리의 태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다면서 친구는 발끈한 체였다. 나야 뭐 이런 거 한다는 거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가끔씩 의외의 모습에 헷갈려하는 실체를 밝힐 수 있을까해서 말이다.

두둥뚜둥! 결과! 나는 16가지 유형 중에 ENTP형이란다. 외향과 내향 중 외향적이며, 감각과 직관 중 직관적이며, 사고적과 감정적 중 사고적이며, 판단적과 인식적 중 인식적이다. ENTP유형에 따른 대표적인 표현이란 이런 거란다. 진취적인, 독립적인, 솔직한 전략적인, 창의적인, 융통성 있는, 도전적인, 분석적인, 영리한, 자원이 풍부한, 의심스러운, 이론적인.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된 걸 보면 이렇게 돼 있었다.  '민첩하고 독창적이며 안목이 넓으며 다방면에 관심과 재능이 많다. 독창적이고 창의력이 풍부하며 넓은 안목을 갖고 있으며 다방면에 재능이 많다. 풍부한 상상력과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솔선력이 강하며 논리적이다. 새로운 문제나 복잡한 문제에 해결 능력이 뛰어나며 사람들의 동향에 대해 기민하고 박식하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세부적인 일은 경시하고 태만하기 쉽다. 즉, 새로운 도전이 없는 일에는 흥미가 없으나 관심을 갖고 있는 일에는 대단한 수행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발명가, 과학자, 문제 해결사, 저널리스트, 마케팅, 컴퓨터 분석 등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 때로 경쟁적이며 현실보다는 이론에 더 밝은 편이다.'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려고 하는데ㅡ다 좋은 말이어서ㅡ 과학자나 컴퓨터 분석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탁 걸린다. 그런데는 소질이 관심도 없어서 말이다. 내가 일상적인 일을 못 견뎌하는 건 정말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는 몇날 며칠이고 밤을 샐 수 있겠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쉽게 피로해지고 지루해하고 의욕 없다.

근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다. 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여기에 끼워 맞추는 듯하다. 내가 체크한 항목이 모이고 모여서 나온 결과임에도 여기에 대한 인식이 덜 하다. 다만, 점쟁이에게 점을 치면서 맞는 말이다며 용하다고 계속 무릎을 쳐대는 꼴이다. 왜 이런 거지? 아마 피곤한가 보다. 사람이 어느 쪽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복잡미묘한 존재이고,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하고 설명해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한 거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의 당혹감을 동반한 놀라움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서 명확히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하는.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거지, 뭐.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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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

 

            퇴계로에  와서도 그  山이   보인다.  3·1로까지  걸
        어가는데,  봄바람  맞으며 가는데,  산은  흔들리는 자
        기 그림자를 발목까지 담그고 자꾸 뭔가 게워낸다.
        흙덩어리인  자기를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를
        무등 태운 山 그림자가 시내까지 따라온다. 죽겠다!
        좀  봐줘.  그래도  온다.  뻐꾹새  울음의  半音 플랫에
        실려,   山이   가까이,  멀리,  그만  따라와!  해도,  市
        외곽 시립  공원  묘지  千여  구를 싣고 淸溪川까지 흘
        러온다.


                    廣州崔氏愛淑之墓         
                    陰曆  一九五四年  九月  十四日  生 
                    陰曆  一九八O年   四月  十八日  卒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수철이  아빠

             청계천   2가.   횡단보도를   바삐   교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녀는   아이를   업
         고   나타났다.  그   山이   게워낸   異物質인 듯한  하얀
         안개꽃을   아이가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서   무슨 
         은방울  같은  소리가  났다.  맹인을  위한  신호  소리를
         들으며  쌩쌩(生生?)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저  넘어갔다.  사라지는가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자
         동차  부속품상  앞   잡상인들   틈에서   나왔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만
         두라고  했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이 땅으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그었다.   지금  보
         다시피  우리는   서로의  발등을  밟고  있다고  나는  말
         했다.  뱃속에서  아기가  죽어간다고  그녀는  화를 냈다.
         이  에 오려면  으로  을  내려야  한다고  나는 말
         했다.  나는  적십자사   헌혈차를 피해 갔다.  그리고  뒤
         로   돌아서서  그녀에게   正色하고  말했다.  그대  앞에
         내   슬픔이 좀 과했나보오. 그대  앞에  나의 심령과학적
         자의식이.

 

저번 학기 시론 시간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월요일 단 하루에  7, 8, 9 교시 연강인데다가(쉬는 시간도 오분밖에 없고.)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정해진 과제와 발표가 있었다. 월요일 힘들게 수업 마치고 나면 그 압박감에서 헤어나오면서, 토요일까진 과제를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 일요일에는 해야하는데 하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월요일 당일, 다들 공강 시간에 전산실이든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미친 척하면서 자판을 두들긴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만나면 비척거리고 있는 나의 사랑스런 동지들. 나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간혹 하다 하다 못하겠으면 아예 포기하고 마음을 비웠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서 한꺼번에 기말고사 지나고 과제를 제출하곤 했다.  

한 시간 발표 수업하고 오분 쉬고 또 두 시간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수업하신다. 사람은 생체 리듬이란 게 있다고 하는데 해거름 즈음이면 졸리기 시작한다. 세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곤욕인데가  선생님께 끊임없이 반응을 보여야하는 하는지라 고단하다. 또릿또릿한 눈망울에 눈이 마주치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든가 하는 일도 은근히 고달프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셨을까?)

 마지막 시간이었을 거다. 강의실 벽면에 있는 시계를 힐끔힐끔하는 학생들이 늘고, 이제는 애처로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지만 일찍 끝내줄 기미는 좀체 보이질 않는다.

이런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선생님은 황지우의 시 <호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이 시<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 프린트물을 나눠주셨다. 여섯시가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그쯤이면 수업 끝내주리라는 열망은 버리고  시체처럼 앉아있었을 때다. 

선생님은 먼저 <호명>을 읽어주셨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름 없는 그들의 죽음이 나열되는데, 왜, 어찌 죽어갔는지 말할 수 없는 시대의 광기가 섬뜩해졌다. 그렇게 은폐되었던 죽음, 그들의 죽음이 알려졌다가는 체제에 치명적일 그들의 죽음이 가슴을 쳤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서는 어머니와 자식의 몇 마디 대화에서의 여백 그러니까 그 침묵이 눈을 시리게 했다. 그러다가  <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을 듣는데 눈물을 참지 못했다. 산 언저리에 묻혀있는 죽은 자, 미처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죽은 자, 불임의 시대에서 한 번만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죽은 자, 그 죽은 자를 감지하는 화자. 그들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은폐되고 그러므로 그걸 까발릴 경우 불온할 수밖에 없다. 광기, 폭력 아래의 죽음. 제목이 의미상 연결되지 않고 분할되어 있는 것처럼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죽음이 있었다.

남 앞에서는 좀체 울지 않는데도 고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했다. 옆에서 졸고 있던 H는 훌쩍거리는 나 때문에 깨고 H옆에 있던 L은 울고 있는 내게 화장지를 건넬까 말까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들 말고도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끼고는, 울고 있는 내가 민망스럽고 창피해서 곁에 있는 H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H나 L도 웃고. 그때 선생님은 날 보더니 "Y야. 넌 이 시가 웃기니?"라고 말씀하신다. 시 읽는 데 몰입했던 분답게 전후 상황도 모르는 선생님이 야속했다. 이런 시를 들으면서 웃는 나를 경멸하고 있는 듯한 말투를 느꼈던 이유에서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ㅡ나 혼자 그렇다고 느꼈겠지만ㅡ 에 뭐라 말은 못하고 있고, H는 조그맣게 "Y 울었는데...."라고 말을 흐린다. 선생님께는 들리지 않고 그렇게 찝찝하게 수업을 마쳤다.

나는 곧장 과사무실에서 조교선생님에게 수업 시간에 시 들으면서 울었다는 얘기를 했고, 조교선생님은 뜻밖이라고 그러셨다. 아마 그러는 아이가 없을 거라고 하시면서. 또 그 얘길 아는 선배 Y한테 했는데 나중에 그 선배와 시론 선생님이 같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선배는 내 얘길 했단다. 선생님이 불쾌해해서 내가 서운해했다고 하면서. 선생님은 그랬냐면서 자기가 그 때 시를 좀 잘 읽긴 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던 거다.

나는 가끔씩 그렇게 분명한 시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제시대나 독재시대로. 만약 그렇다면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휘둘려서가는, 복잡하기만한 이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괴롭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싸울 거리가 명확히 정해진 그 시대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을까? 나의 눈물이 제 감정에 겨운 동정심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또 내가 과연 그 시대의, 아픔의, 절망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보지 않고서 지나간 때를 그려낸, 그리고 있는 어떤 것을 보면서 놀랍게도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창피한지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는 일, 순간적으로 찌릿찌릿 전율같은 통증을 느끼는 일, 그들의 입장에서 부르르 떨면서 분노하는 일. 이게 다 아닌가. 나는 무력하다. 무력한 나를 보는 일은 괴롭지만 그래도 이럴 때 적어도 내가 밉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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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10-0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님의 글도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그저 추천이나 한 번 누르고 갑니다.

빛 그림자 2004-10-0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감정에 겨워서 눈물을 찔끔거린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거, 그리고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참 많이 속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