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낙동강 질소비료공장 군중 정류 외 - 한국소설문학대계 12
최서해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1월
평점 :
절판


소설을 통해 민족 계급주의의 모순을 다루면서 사회를 개혁하려고한 목적의식이 뚜렷한 이른바 카프문학은 내게 퍽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예술성이 결여되었다고들 하지만, 그 안에 사회상이 있다. 작가라면, 마땅히 현실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주체적 존재로서의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회 구성체의 한 개인이므로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이나 세계를 자신과 분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실과 괴리된 작가의 존재 가치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비치어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주창하고 민중의 의식을 개조하려는 것이 적극성을 띤 사회변혁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할 수 있기에 나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초반,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의 이념을 내세우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민족이 우선시 되어야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시대가 전체주의에 입각한 일제의 식민치하였기 때문이다. 하여 카프문학에서 제시되는 바는 계급 타파를 외치고 공산주의 혁명을 실현하고자하는 강력한 의지를 내세웠을지라도, 국권상실의 식민치하의 근대였으므로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며 투쟁해야했고, 사회 전반에서 폐단으로 자리 잡고 있는 반봉건을 내세우며 투쟁해야 했던 것이다. 카프문학인 조명희의 '낙동강'에서도 이러한 점은 약점으로 뚜렷이 제시된다.

조명희의 '낙동강'은 계급의 모순을 제시하고 이에 혁명가인 성운의 삶을 제시함으로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어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혁명가인 성운의 삶을 그대로 이으리라는- 변혁에의 희망을- 로사의 결의가 성운이 그렇듯 자신을 대륙으로 이끌게 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더욱 확실하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낙동강. 어머니의 젖꼭지같은 낙동강 부근에서 무던히 살아왔다. 하지만, 봉건제적 신분사회에서는 이 어머니의 숨결이 결코 자기네 것이 될 수 없었고 더욱이 지금은 '난데없는 이리 떼 같은 무리가 닥쳐와서 물러 박지르며 빼앗아' 먹는다. 자리를 잃어버린 민중은 하는 수 없이 이 땅에서 표박하며 이국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작가의 문제인식은 비단 일제의 수탈정책만이 아니라, '놀고먹는 계급- 다스리는 계급'과 '일하며 먹여 주는 계급- 다스려지는 계급'이 생겼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운을 통해.

성운의 이러한 시대에 치열한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채. 사회주의 운동이 침체하고 쇠퇴되는 데도 어떠한 해결방안도 모색하지 않고 있는 와중, 그는 서울로 왔으나, 공연한 파벌만 만들어 동지들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며, 타지에 나가 그토록 잊지 못하던 낙동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 내려와 성운이 본 것은 분명히 제 것임에도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가 가옥이 줄어든 고향의 피폐한 모습이며, 새롭게 생긴 위압적인 동척창고였다.

이러한 민족의 현실 앞에서 '선전, 조직, 투쟁'의 계획으로 동척에 대항하며 민중을 고양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그 와중에 그는 선동자라는 혐의로 붙들러 가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나서 검사국으로 넘어가 두어 달 동안이나 있다가 병이나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비록 꿈꾸던 것을 힘써, 유감없이 발휘하지도 못한 채 그 과정 중에 죽지만, 이 죽음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행복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희생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어찌 보면 장렬하고 영광이 될 수 있는 죽음인 것이다.

그가 내세운 이념은 사회주의였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동구권은 이미 무너졌으며 현재는 완벽한 자유시장경제, 곧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모순과 부조리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 변혁을 꿈꾼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희망하면서. '낙동강'의 성운과 로사가 그랬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세전 한국남북문학100선 56
염상섭 지음 / 일신서적 / 199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염상섭의 작품을 손대기엔 참 힘이 든다. 작품 내용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 앞서 그의 만연체 문장이 쉽게 손이 가지 않을 뿐더러 지루하게, 재미없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작품의 가치를 재미있나, 없나로 판단해서는 않될 테다. 오래 두고 곰곰히 생각하면서 읽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으므로. 염상섭의 '삼대'나 '만세전' 또한 곱씹어 읽어 볼수록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여러번 읽을 수록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만세전'은 일본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인화'가 아내의 후더침으로 귀국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귀로형으로 구성된다. 그는 일본에 의해 불완전한 근대교육일지라도 근대교육을 받은 근대인으로서 조혼으로 인해 애정도 없는 아내의 병으로 자신이 귀국하는 상황을 마음 내켜하지 않는다. 또한 오로지 자기 자신의 개성과 진정성 실현에 관심을 둔 인화는 조국에 대해서도 별 인식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을 끊임없이 미행하는 감시자와 함께 동경에서 하관, 부산, 김천으로 가는 길에 업신 여기면 업신 여기는 대로 굴종을 감내하는 갓장수,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를 둔 혼혈인 여종업인이 오직 아버지를 찾아 가겠다는 말, 나어린 여자를 자신이 구제해 주겠다는 명분아래 첩으로 삼는, 일본 집이 들어서는 것에는 무관심한 채 집값이 올랐다고 마냥 좋아하는 김천 형 등의 목도를 통해 조선인들의 자아 상실감, 현실 순응적 태도에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고작 묘지 문제에 분개하는 조선인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조선의 현실을 구더기가 들끓는 묘지로 파악한 순간 이 죽음의, 퇴폐의 장소인 조선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면의 이면까지 파악하려는 작중 인물, 이인화는 조선의 실상을 핍진성있게 그려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조선의 현실에 환멸과 무기력을 느끼고 있다. 아주 멋진 인물이 아닌가. 자아와 세계의 기막힌 이 부조화가 이인화를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염상섭의 '삼대'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일컬어 진다. '삼대'에서 보여준 삶의 총체성은 어디에 내놔도 뒤쳐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어렵게 손댔던 '만세전'은 그 의미있는 '삼대'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개 (구) 문지 스펙트럼 12
이상 지음, 이경훈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이상의 작품 중에서 그나마 쉽다는 「날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본다. 「날개」의 '나'는 유곽임이 확실한 곳에서 볕도 들지 않고 옷도 없고 외출도 하지 않는, 무엇보다도 돈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이다. 전반부의 그는 아내가 매춘을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아내에게 돈이 있다는 것을 의아해하며 이러 저러한 것을 연구하고 발명하는 기이한 사내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그는 변화한다. '나'의 아내가 그에게 돈을 주면서 그의 사회성을 일깨우려고 하면서이다. 구체적으로는 그의 외출을 통해서이다.

아내가 준 돈을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싶어서 외출을 한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가진 돈 5원을 주고서 이 유곽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잔다. 돈의 유용성을 깨친 것이다. 그는 지향없다고 했지만 외출시 찾아간 곳은 자본주의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미스코시 백화점이고 이광수의 '무정'에서 이형식이 감개무량(!)해 하던 경성역으로 향한다. 이전까지 볕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무기력하고 자아분열자적인 삶을 살아온 그였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발전도 변화도 없는 매춘의 장소에서 무기력하게 살아온 그는 외출을 통해 문명을 맛보면서 이제 더이상 유곽에서 살 수는 없었을 테다. 비록 문명으로 나온 삶이 어항의 금붕어처럼 개성이 상실된 채로 살아갈지라고 말이다.

어쨌든 「날개」의 나가 다시 유곽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낮의 문명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다시 낮아지려고 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자본주의체제의 열쇠와도 같은 돈을 알려준, 자기에게 사회성을 일깨워준 ‘아내의 모가지’가 이제야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비록 아내가 감기약 대신에 수면제를 주었다는 의심이 계기가 되어서 어두침침한 방을 벗어난 것이지만, 이제는 아내가 증오의 아달린을 줬건, 사랑의 아스피린을 주었건 그건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에. 아내에게 돌아간다는 항목은 이미 배제된 선택사항이기에.

어떤 사회적인 활동 없이 낮잠을 자던 그가 드디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그의 과거의 어떤 대단한 상처가 있었던 간에 그 상처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인가? 말조차 나오지 않았고 무시되기 일쑤였을 그가 목소리을 내어서 더듬더듬이라도 말을 내뱉을 수 있을 것인가? 삶의 시시함에 무력했다던 그가 삶에 대해 이제는 뜨거워질 수 있을 것인가? 영양실조의 초라한 모습을 벗어 던지고 궁핍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인가? '나'는 한 번 일상의 그들과 섞여 보자고 하지만 이 완고한 선택도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못하다. 「날개」에서는 이제 한번 날아보자고 다짐하면서 끝맺지만 실제로 작가 이상의 삶을 통해 유추해보면 그는 추락할 것임에 분명하다. 문명의 아들이 되길 소망했던 이상이 본 것은 문명에 끼지 못한 우리 식민지 조선이었으며, 그가 겪은 바는 문명에서 개개인이 소멸되는 아픈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절망했던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이 자본주의가 더 견고해진 사회에서 또한 살고 있지 않나. 그가 느낀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흘렀지만 변함없이 자신이 가졌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현실에 처해있는 우리의 모습이 비춰지기 때문일 테다. 「날개」를 통해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이상의 좌절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는 것, 이것 하나 만으로도 읽을 만한 층분한 가치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라리 화를 낼 걸. 그러면 마음이라도 더 편했을 수도 있는데. 화가 났으면서 왜 그렇게 삭혔는지 모르겠다.

개강하면 같이 살기로 한 친구, 그 친구가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한다. 여섯달 동안이나. 그리고 돌아오면 사회복지학과로 전과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미 집도 다 구했고 어찌 어찌 살아가자고 계획도 다 세우고 있던 터였다.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내 다짐과 함께 마음은 들떴고 여기저기 이 즐거운 마음을 내보이고 다녔다. 마음 맞는 친구랑 재밌게 살 수 있으리란 생각, 문득문득 갖는 외로움, 그리고 예전에 이 외로움을 표내지 못한 것과는 다르게, 그런 외로움을 떨쳐낼 수도 있을 거란 생각. 그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평택에 있다는 친구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난인가 싶어 당장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장난질을 잘 하지 않는 진지한 내 친구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약 진짜라면 정말 내 앞날이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미안하다는 친구의 말에,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래야 그 녀석이 편할 거라는 생각 따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머릿속은 멍한데, 돌들만 데굴데굴 굴러가는데, 입은 제 혼자 주절주절 신나게 말 참 잘하더라.

차라리 화를 낼 걸, 그랬으면 마음이라도 더 편했으려나. 아무렴 어떠냐고 하기에는 그 녀석에게 마음을 참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보다. 잠이나 실컷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지려나.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의욕상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작가의 말

 

 

   이 길뿐인가,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들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위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가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것은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게 갚기 힘든 빚이 있다.

 

   느릿하고 힘 부치는 걸음걸이를 견디어주고 힘을 불어놓어준 분들에게,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밝은 정표(精表)로 드리고 싶다. 원고를 묶어준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95년 7월

   韓 江 

한강의 작품을 겨우 이제 한 권 읽어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그녀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편한 느낌이다. 그녀가 내게 준 건, 마땅한 이유를 댈 수 없는 따듯한 위안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쉽게 말해버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존재론적인 슬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슬프기 마련이다,고 읊조리는 듯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적어도 나만이 이런 심정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면서 먼저 손 내밀어주는 기분인 거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무작정 피하거나 내처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마냥 좋아서 따랐던 사람에게서, 나에 대한 오해와 불신의 태도를 대면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상대의 시선을 곧두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묵묵부답이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다. 나를 믿어달라고 말하기엔 나를 추궁하는 듯한 그 사람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너무도 무서웠다. 이쯤에서 다시는 날 보지 않겠다고 말하더라도, 함부로 내 진심을 말하기는 싫었다. 언죽번죽 떠벌리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침묵을 택했다. 나의 마음이 전해지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나조차도 이해할 수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야 얼마쯤은 어중간한 나의 태도를 이해한다. 살풋 웃음도 나온다. 단지 나는 지쳐있었던 거라고. '나의 무기력한 젊음이 헐거워 견디지 못할 때'였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다못해 단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 외로웠던 거라고.

한강의 첫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이 내민 손을, 마주잡는다. 손의 따스함이 살얼음 낀 내 마음 곳곳을 헤집어 놓는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외롭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아프지도 않다. 적어도 그들이 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