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이 길뿐인가,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들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위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가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것은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게 갚기 힘든 빚이 있다.

 

   느릿하고 힘 부치는 걸음걸이를 견디어주고 힘을 불어놓어준 분들에게,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밝은 정표(精表)로 드리고 싶다. 원고를 묶어준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95년 7월

   韓 江 

한강의 작품을 겨우 이제 한 권 읽어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그녀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편한 느낌이다. 그녀가 내게 준 건, 마땅한 이유를 댈 수 없는 따듯한 위안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쉽게 말해버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존재론적인 슬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슬프기 마련이다,고 읊조리는 듯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적어도 나만이 이런 심정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면서 먼저 손 내밀어주는 기분인 거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무작정 피하거나 내처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마냥 좋아서 따랐던 사람에게서, 나에 대한 오해와 불신의 태도를 대면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상대의 시선을 곧두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묵묵부답이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다. 나를 믿어달라고 말하기엔 나를 추궁하는 듯한 그 사람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너무도 무서웠다. 이쯤에서 다시는 날 보지 않겠다고 말하더라도, 함부로 내 진심을 말하기는 싫었다. 언죽번죽 떠벌리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침묵을 택했다. 나의 마음이 전해지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나조차도 이해할 수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야 얼마쯤은 어중간한 나의 태도를 이해한다. 살풋 웃음도 나온다. 단지 나는 지쳐있었던 거라고. '나의 무기력한 젊음이 헐거워 견디지 못할 때'였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다못해 단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 외로웠던 거라고.

한강의 첫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이 내민 손을, 마주잡는다. 손의 따스함이 살얼음 낀 내 마음 곳곳을 헤집어 놓는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외롭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아프지도 않다. 적어도 그들이 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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