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차세대 크리스천을 위한 7가지 습관
칼만 카플란.매튜 슈워츠 지음, 김정혜 옮김 / 세계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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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상만 보지 말고 이면에 담겨진 진실에 주목하라든지, 행간을 읽으라는 등의 말을 자주 듣는다.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말일 것이다. 또한 그 말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문으로도 들린다. 필요에 의한 정보의 왜곡 문제가 자주 신문지상을 메우고 있는 현실을 주목하면 누구든 자기가 믿는 바를 타인에게 무조건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여서 대부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타인에게 강제하기 일쑤다. 그것도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데 과연 내가 옳다고 믿은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심리학 교수인 저자는 성경에 드러난 7가지 죄악을 근거로 크리스천이 그 7가지 죄악을 대하는 태도에서 빠지기 쉬운 심리학적인 오류를 진단하고, 그 이유를 밝힌다. 아울러 성경은 그것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을 이해하고, 종국적으로 크리스천들이 그것들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메스를 가하듯 때론 천천히 때론 깊숙이 찔러댄다. 그렇다고 저자가 환자의 증상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수술 부위를 집도한다고 생각하면 오해. 저자는 각 장의 시작을 먼저 의문형으로 바꿔놓고 있다. 자만하지 않기 위해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가?, 질투하지 않기 위해 분별없이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자만은 서구사상에서 죄악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자만은 첫 번째 대죄이다. 이 말은 그 자체로 궁금증을 자아낸다. 도대체 자만이 뭐 어떻단 말인가? 인간은 자신이 성취한 것에 기쁨을 느끼면 안 된단 말인가?” 다소 도전적인 말로 첫 장을 시작한 저자는 ‘그렇다면 자만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자신에게 채찍을 휘둘러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본정신이 자기 비하라는 해결책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냐’고 꼬집는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자만을 극복하느라 결과적으로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순수한 ‘자존감’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분류한 각 장의 주제어가 양극단을 해결하는 처방이 되는 셈. 그런지 보자. 제1장의 주제는 자존감이다. 제2장은 지혜, 제3장은 정의다. 사랑, 건강한 식습관, 신중함, 목적의식이 다음 장을 이룬다. 제2장은 질투와 순종을 다룬다. 제3장은 분노와 인내를 다루고, 이어서 정욕과 정결, 폭식과 금식, 탐욕과 관대, 나태와 성실이 각 장의 중심 소재가 된다. 저자의 질문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에 눈을 뜨도록 촉구하는 경계의 뜻이기도 하고 바야흐로 바른 지식과 지혜의 길로 들어서도록 견인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의 도발적인 질문들로 인해 기존에 가졌던 지식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자기 부정 뒤에는 공간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렇게 드러난 빈 공간을 불안감이 엄습해 들어오기 때문에 대체로 자기 부정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바른 지식을 얻는 데 따르는 고통의 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2장(지혜)에 기록된 델포이 신전의 경구와 오이디푸스, 소크라테스의 예는 당시 사람들이 바른 지식, 곧 지혜를 얻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에 해당할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상대를 이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분수를 알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며 그 말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을 때, 이오카스테가 “불쌍한 자여! 너는 네가 누군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델포이 신전의 경구와 일맥 상통한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지식을 보유하는 순간 파멸에 이를 것을 예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오이디푸스에게 지식은 저주와 파멸이었다.

소크라테스가 태양의 신 아폴론에 의해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을 받은 것이 소크라테스 자신이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현명하지 못하고 오직 신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있고 보면 어떤 이유에서건 지혜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지식을 보유하는 것을 크게 반기고,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폴론은 소크라테스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솔로몬의 예를 보면 하나님은 솔로몬의 요청(요약하면,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에 답하고 그와 소통한다. 하나님은 지혜를 얻은 사람이 당신과 함께 일하기를 바라신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면 자기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과 가치 혼돈으로 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오히려 지혜를 얻지 못해 파멸에 이른 오이디푸스의 예는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양극단의 논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균형감각을 갖추도록 안내하는 설명서이자 처방전이다. 그렇지 않아도 좌와 우가 양극단으로 치우쳐 자기 주장만 일삼는 세태에 이 책이 ‘또 다른 길(중심)’을 제시하고, 그 길의 유익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고 있어 반갑다. 저자가 행간에 숨겨둔 말처럼 견고한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그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에 주목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 비로소 좌우를 향해 기웃거리는 불안한 행복이 아니라 성채와 같이 강풍과 폭우에 흔들리지 않는 궁극적인 행복이 찾아들 것이다. 

* 저자의 신화와 성경, 임상에 이르는 해박한 지식과 전문적 관점은 별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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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 개인과 기업의 티핑 포인트를 만드는 25가지 기술
다비 체킷 지음, 안진환 옮김 / 이른아침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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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이다 혁신이다 해서 직장인의 목숨이 파리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자조 섞인 소리가 자주 들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직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쟁이가 있다면 모르긴 해도 문 앞에 시장 하나쯤 열릴 것 같고, 살아남는 법에 관한 한 탁월한 이력을 선보인 로빈슨 크루소를 모셔와 강연이라도 열면 그런 대박이 없을 정도로 구름같이 모여든 청중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엉뚱한 상상을 말한다고 해서 실없는 사람 취급받을 오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살기가 뻑뻑하다는 얘기일텐데, 그렇다고 그런 한가한 생각을 오래할 처지도 아닌 직장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파우스트가 될 각오로 오늘도 고투한다. 그런 그들에게 요긴한 것은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무엇일 것이다. 저자가 '지렛대'를 들고 나왔다. 작은 힘으로 큰 물건을 너끈히 들어올리는 데 정말 요긴한 지렛대. 우리 시대 직장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다.

저자는 지렛대 삼아 직장과 생활에서 향상을 꾀하는 데 필요한 원리를 25가지로 정리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렛대가 그렇듯이 생활은 종종 포인트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튼튼한 지렛대라 해도 지렛대의 원리를 따라 정확한 지점에 그것을 놓지 않으면 오히려 기대 이상의 힘이 들 수 있다. 때에 따라서 들고자 하는 물체를 과소 평가해서 지렛대를 부러뜨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지렛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 도 중요하지만 어떤 지렛대를 선택하느냐, 도 그것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전자는 실용에 맞춘 사고이며, 후자는 지침과 관련된 사고로 간단하게 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침은 어떤 일의 시작에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지나온 길이 적정한지를 살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침과 같다. 가까운 곳에 두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면 살아남는 법 뿐 아니라 삶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데 요긴하다.

이루고 싶은 생활 목표를 150가지로 정리해 보라는 저자의 충고는 우리가 자주 잊는 목표의식을 분명히 하라는 일침으로 들린다. 어떻게 살다 보니까 됐어, 하는 식의 돌연한 성취는 사실 별로 없다. 목표를 세워 부단히 노력하니까 비로소 그것이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책은 밥을 떠서 먹여 주지는 않지만 지나온 세월을 잠잠히 돌아보고 여전히 많이 남은 미래를 찬찬히 계획하는 데 제격이다. 그러고 보면 동서양의 진리란 것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별 것 아닌 것들이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상자를 가져다주는 걸 보면 사실 경이롭다. 이 책이 독자에게 희망을 여는 판도라의 상자가 되기를 바란다.

-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다비 체킷, 이른 아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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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12제자를 위대한 리더로 키웠는가 - 예수의 수퍼리더십 4원칙
케네스 블랜차드.필 하지스 지음, 조천제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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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수퍼 리더십 4원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지식 하나가 필요하다. 크리스천이라면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 제자와 관련된 지식이 이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리더가 될만한 자질이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와 아무려면 예수가 아무나 제자로 택했을까 하는 의문에 관련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자의 기대는 예수 사후 제자들이 보여준 놀라운 능력 때문에 생긴 일종의 심리학적인 오류이며, 후자의 의문은 예수가 제자들을 택했을 당시 제자들의 직업만 봐도 쉽게 풀릴 의문이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당시 어부는 최하층민이었다. 교육 수준은 극히 낮았다. 예수가 죽기 전까지 그가 보여준 행적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물위를 걷는 예수를 보고 단번에 물 속에 뛰어들었던 것이나 예수를 잡으러온 군병들 사이에서 한 남자의 귀를 벤 것은 그의 다혈질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것은 아마도 거친 어부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기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베드로만 속물적 근성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니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제자들 모두 예수가 왕으로 옹립되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데 관심을 두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예수를 판 자가 그들 중에서 나왔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자도 그들 중에 있었다.

현대적 관점으로 봐도 제자들은 리더가 되기엔 싹수가 노란 사람들이었다. 그런 제자들이 달라졌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그 3년 동안 예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예수의 무엇이 형편없던 제자들을 전혀 다른 사람들로 바꿔 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의 궤적을 좇아간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발견한 리더십을 예수의 수퍼 리더십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퍼 리더십이라는 명칭에서 연상되는 독특한 카리스마라든지 무한한 지식과 경험들로 구성된 능력이라든지 하는 등의 획기적인 리더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리더십은 리더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영향력으로 가슴과 머리, 손, 습관의 전 영역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리더십은 섬김(가슴)에서 시작된다.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리더십론은 리더의 양식과 행위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다. 각종 리더십 스타일을 A형, B형, C형 등으로 유형화하고 그들 각각의 특징을 그럴듯하게 분류해낸다. 그리곤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 테스트해 볼 것을 주문하고 그 유형에 따라 리더십을 개발하라고 빳빳한 처방전을 써준다. 이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찾으면(해당 유형의 페이지를 펼치면) 어김없이 3일치의 약을 내준다. 그것이 스킬이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추종자들이 생길 것이고 한번 생겨난 추종자는 계속 따를 것이다’. 이 주술과도 같은 스킬은 하지만 그 효용이 딱 3일이다.

리더십은 머리와 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리더십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깊이 공명한다. 예수의 리더십의 대상은, 끊임없이 보여줘도 못 본 듯이 행동하고 아무리 가르쳐도 배운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며 아무리 믿어도 끊임없이 등뒤에 칼을 겨누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처럼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효율적인 리더십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다시 말해 리더십은 가슴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마음가짐이 잘못되었다면 결코 예수처럼 섬기는 리더가 될 수 없다.”

가슴으로 시작하는 리더십은 섬기는 리더십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겸손과 자신감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자기중심적 리더십은 교만과 두려움을 그 자리에 앉힌다. 추종자들을 통제하고 정보를 독점하는 행태를 보이는 자기중심적 리더십은 후계자로 보이는 싹을 자르기에 바쁘다. 중심에 자기 외의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유형의 리더십이다. 하지만 섬기는 리더십은 최고의 리더가 하나님임을 바로 알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리더십은 위임받은 것이라는 청지기적 관점을 갖고 추종자를 바라본다. 추종자가 바라는 것과 추종자에게 유익이 될만한 것에 관심을 보인다.

추종자보다 못났기 때문에 겸손한 것이 아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아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더불어 “예수는 모든 일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통해 얻은 겸손과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생기는 자신감을 갖고 임했다.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가슴의 두 번째 특징이 바로 자신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항상 느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온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와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시하고, 용서와 자비를 갖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우선 순위와 관계가 있다. 섬기는 리더십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전자와 관계된다. 후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못박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예수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예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섬기는 리더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용서하는 예수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바탕이 될 때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때때로 해를 끼치는 추종자를 너끈히 용서할 수 있다. 가슴으로 하는 리더십은 체화된 겸손과 자신감을 용서와 자비로 드러내는 것이다.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란 리더 역할을 인식하는 리더 자신의 관점이자 신념 체계다. ..... 예수의 관점에서 리더십은 먼저 남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는 이 관점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들과 3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섬기는 리더십이라고 해서 무조건 추종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리더십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예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제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직접 그 비전에 따라 살았다. 추종자들은 리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들을 어디로 인도하는지 알지 못하면 흥미를 잃고 만다. 따라서 리더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여 가려는 방향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에너지를 목적지로 집중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명확한 비전을 수립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목적과 미래상, 그리고 가치다. 목적은 구성원 개개인의 노력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상은 목적한 대로 살아가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하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도록 돕는다. 아울러 추구하는 가치는 구성원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더 큰 뜻을 품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목적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미래상을 제시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를 두 가지로 정리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목적과 미래상, 가치가 선순환할 때 조직은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모한다. 동일한 미래와 가치를 꿈꾸고 추구하는 일원이라는 동료의식이 강화되고, 그럼으로써 목적에 더욱 매진하는 연쇄효과를 거둔다. 결과야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큰 조직이든 소모임이든 당신이 리더라면 이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당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이나 모임이 지지부진하다면 그것은 리더인 당신이 추종자들에게 목적과 미래상을 제시하고 가치를 표방하는 일에 소홀한 결과일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이 비전을 수행하도록 지속적으로 돕고 계속해서 그 비전을 각인시켰다. 리더는 자신의 생각을 추종자들이 이해했는지 지속적으로 피드백할 필요가 있다. 조직의 비전 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구성원의 이해와 노력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조직 목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리더의 몸소 실천보다 빠른 것은 없다.

리더는 일일 수행 코치다.

“예수는 제자들이 조금씩 성장하는 동안 각 단계에 맞는 수행 코치 역할을 했고, 리더십 스타일을 계속 바꿔 나갔다. 이런 노력으로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계속해서 사역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예수는 손을 통해, 즉 유능한 리더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 섬기는 리더십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다.”

가슴과 머리가 준비되었다면 다음은 가슴과 머리에 품은 것을 실행한 손이 필요하다. 저자는 섬기는 리더는 ‘수행 코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수행코치는 수행계획을 수립하고, 일일 코치 역할을 하며 수행결과를 평가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추종자가 A학점을 받도록 최선을 다하는 데로 모아진다. 여기서도 목표를 명확히 밝히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다. 그래야 추종자들이 중도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후에 추종자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이 최고의 결과를 내도록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 일은 리더가 몸으로 보여주는 실천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일 수 있다.

보편적으로 조직은 일일 코치 역할보다는 수행계획을 수립하고 수행결과를 평가하는 데 주력한다. 특히 후자에 집중하는 양상을 보인다. 평가 결과를 분석하고 그것을 피드백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결과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책임자를 가려내고 추궁하는 자료로 활용한다. 말단을 문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사이 총괄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끈 리더의 책임은 자연스럽게 면책된다. 이런 형태의 구조하에서 구성원들이 창의적으로 일을 벌이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조직의 활력은 말단이 조직 목표를 향해 집중할 때 달성된다. 조직이 수행 코치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조직 구성원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노력을 부단히 펼칠 때 구성원은 감동한다. 그리고 그런 리더십에 자신의 이상을 합치시킨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젊은 피’는 그렇게 수혈되는 것이다. 리더가 본을 보이고 추종자가 그런 리더가 되기를 꿈꾸며, 그가 또 다른 추종자를 돕는 구조야말로 조직이 사는 승리의 전략이 될 것이다.

긍정적인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몰려들었을 때 예수는 멀리 한적한 곳으로 물러섰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 올랐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구세주를 열망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주 목격된 예수의 능력은 사람들의 눈을 번쩍 뜨게 했을 것이다.

리더는 추종자의 열광에 직면하면 자칫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로 그것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런 오판이 결정적이라는 데 있다. 예수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그 비전의 근원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비전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리더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끊임없이 자기를 추동하느라 지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에너지가 모두 소진돼 주저앉는 모습도 보았다. 물론 리더는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추종자들이 비전을 향해 달음질하도록 리더가 몸으로 보이는 실천에서 비롯한다.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다는 얘기다. 따라서 충전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동안 예수는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부추기거나, 친구나 적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감정적으로 대처하라는 압력과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의 다섯 가지 주요 습관을 지킴으로써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물리치고, 계속해서 사역의 길을 걸었다.
1. 혼자만의 시간 갖기
2. 기도하기
3. 성경을 공부하고 생활에 적용하기
4.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에 응답하기
5. 서로 돕는 관계 맺기“

잠잠히 음미해 보면 위에 든 습관들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성찰과 관계망 형성은 리더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유혹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게 해준다.

리더는 곁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많이 두어야 한다. 리더가 완전한 사람이 아닌 이상 리더 또한 조언이 필요하다. 리더의 잘못이 공공연하게 피드백되고 수정되어야 성장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보다 명확한 비전과 목표를 수립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런 바탕 위에 구성원들을 효과적으로 리드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보다 둘이 더 낫고 둘이 함께 노력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가 넘어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고, 리더를 일으켜 세울 수도 있다. 

예수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말하면 섬기는 리더십이다. 비전과 목표를 향해 제자들이 매진하도록 스스로 낮아져 그 비전과 목표에 헌신한 리더십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겸손한 리더십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세상과 정반대의 리더십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리더에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기대하고 특출한 능력으로 구성원들을 휘어잡아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리더를 만나면 고통스러워한다. 어떤 리더도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 구성원들의 성장만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리더는 대부분 구성원들의 응축된 힘을 이용해 자신이 두드러지기를 바란다.

리더와 구성간의 전통적인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리더십은 그것과 달랐다. 그렇다고 그가 보인 리더십이 어리석었던 것일까? 『목적을 이끄는 삶』의 저자인 릭 워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기 잡는 베드로를 섬김으로 이끈 예수는 2천년 후에도 21억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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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
김준 지음, 홍윤표 그림 / 철수와영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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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홍대리』 시리즈로 직장인들의 한을 단박에 날려버린 홍윤표와 현직 보험사 대리로 근무하는 김준이 의기투합해 걸물을 하나 만들어냈다. 이름하여 ‘소심한 김대리의 직딩일기’. 직장인의 가슴을 움츠리게 하는 무척 소심한 제목부터 남달랐지만 홍윤표가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가 누군가? 수년 전 직장인들의 애환을 만화로 훌륭하게 그려내 그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어떻게 이토록 직장생활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그가 당시 현직 대리로 근무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풀렸지만 그가 그려낸 홍대리와 홍대리가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만화로 형상화한 그의 능력만큼은 지금도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이 책에선 그의 만화가 대부분 1컷 짜리 카툰이고, 편수도 적어 아쉬움이 남는다.

글을 쓴 김준은 생소하다. 그렇다고 이물감이 들지는 않았다. 형식은 다르더라도 본령은 다르지 않다는 걸 제목만으로도 너끈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그린 직장인의 애환을 과거 홍윤표가 그린 그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적중했다.

짧은 글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는 직장인이라는 이름이 정겨웠다. 때론 가슴이 절절해져 잠시 책을 덮었다. 즐겁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선 환호성을 질렀다. 월드컵으로 뭉친 국민이 월드컵 경기에 환호하며 대한민국을 소리쳐 불렀듯 직장인이라는 이름으로 그와 어깨를 견 난 같이 술에 절기도 하고 함께 으슥한 골목을 흐느적거리며 걷기도 했다.

책을 편의상 필요에 따라 그렇게 구성해 놓았을 테지만 각 장을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하는 식으로 요일로 구분해 놓아 실제 독자가 직장생활에서 각각의 요일에 실제 겪은 일과 비교해 보면 여벌의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에겐 일과 상사에게 부대끼고 치이느라 쓰린 속을 달래줄 술이 필요하다. 술자리일 망정 맘놓고 씹을 안주도 필요하다. 화풀이할 동대문도 필요하다. 그래도 그들의 애환을 고개 끄덕이며 들어줄 사람만 할까?

직장에선 제대로 큰소리 한번 질러본 적 없는 소심한 김대리, 자기 주장 한 번 그럴싸하게 내세워본 적 없는 심장 약한 김대리, 집이라고 별로 달라질 게 없었던 고개 숙인 김대리, 나만 그런 가 싶어 한없이 서글펐던 김대리, 오늘 이 책을 펴고 드디어 한마디 외쳤다. “얘도 김대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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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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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이맘때쯤 「개미」의 저자로 잘 알려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읽고 배꼽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소재를 끌어다 소설이랍시고 이리저리 주무르고 만지기에 어떻게 하다보니 「개미」라는 작품을 건졌겠지 하고 한 수 접고 보았는데, 아니었다. 「나무」는 재미가 그만이었다. 생각할 구석도 많았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에 빛나는 김언수의 소설, 『캐비닛』은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 일치로 수상작으로 결정했다해서 벌써부터 화제가 됐었다. 그것 만이었다면 뭐 그럴 수 있겠거니 하고 대수롭잖게 넘어갔을 것이다. 채 열 장을 넘기지 않아 사단이 났다. 문학평론가 유보선의 평마따나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긴장감이 바짝 마른 나뭇가지 마냥 탁탁, 소리를 내며 빳빳이 솟구쳐 올랐다. 일찍이 성석제에 열광하여 한눈 한 번 판 적 없는 충성도 높은 독자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고도 그가 여전히 신인 축에 드는 설픈(?) 소설가라니 믿기지 않았다.

소설 『캐비닛』은 13호라 명명된 캐비닛 속에 감춰진 별 희한한 사람들의 얘기를 중심 테마로 한다. 하릴없이 놀고먹는 직장 생활에 무료해 하던 주인공은 호기심에 캐비닛을 열게 된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그 안에 있던 자료들을 읽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연구소장에게 들키고 만다. 당장 연구소에 올라와 일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고 사장의 친인척쯤 된다는 소문이 파다한 연구소장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그날로 조수 일을 시작한다. 말이 안 되는 연구 주제는 둘째치고 전화선을 타고 저쪽에서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요청이란 게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라 사실이 짜증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되게 해달라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데......

확실히 재미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에 넋을 빼앗기는 것부터 말이 안 되긴 한데 거기서 헤어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빼앗긴 넋을 되찾고 싶은 마음 하나 없다. 왜냐?....... 재밌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도무지 현실성 없는 스토리야 소설이니까 십분 이해하고 넘어가지 못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서 들어본 듯 한데 근거를 대기에 조금 민망한 전문(?) 의학 용어의 무분별한(!) 남발도 참아주지......못.....할 것 없다고 두 눈 딱 감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마지막장을 보면 그만 허걱, 하고 뒤로 넘어간다. 이유는?........... 읽 어 보 면  안다. 키득키득 웃음이 나는 건 다반사고 아예 컥컥, 하고 숨까지 넘어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 이상이라 고개라고 쉬어 가는 법이 없다. 세상일 다 잊고 소설에나 파묻혀 보자고 마음먹었다면 이 책 꼭 읽어보시라. 제격이다. 정말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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