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나이제이션
김덕호.원용진 엮음 / 푸른역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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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에 관한 책들이 봇물 만난 듯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 〈오바마 이야기〉, 〈오바마 시대의 세계를 움직이는 10대 파워〉, 〈검은 케네디 오바마의 리더십 10계명〉, 〈오바마 로믹스 : 오바마 정부하의 세계경제 전망〉 등 자서전에서부터 정치·경제 전망서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미국 경제의 쇠락과 세계경제의 동반 침체라는 외적 상황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그의 이력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바뀌는 해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한 관심을 감추지 않습니다. 새 대통령의 정책이 무엇이며, 그가 북한과 어떤 관계를 맺게될 것인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관해 하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렇게 한 두 달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미국에 대해 잘 안양 어깨를 으쓱거립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문제가 터지면 그제야 부리나케 몰려들어 일제히 의견을 쏟아내는 걸 두고 전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의견들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착근하려면 좀 진득한 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의견을 추동한 대상에 대해 좀 살펴보고 따져보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특히 미국에 관한 한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듯이 미국이 영원한 우방이고 그렇듯 애정 깊은 속내를 다방면에 드러내놓았다면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는 노력은 일반인이 애인을 속속들이 알려고 하는 마음처럼 당연하고 따뜻한 감정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 알기'이자 '미국 바로 알기'입니다.

 

'미국 바로 알기'에 적색을 덧칠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정당한 연구나 정당한 비판은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최근 문근영의 선행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문근영의 기부를, 좌익이 선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떠드는 사람을 용인하는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입니다. 반대편에서 그를 향해 꾸짖는 사람을 용인하는 사회 또한 민주적입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전자가 세력을 얻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고 전 얼굴색을 바로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바로 알기도 같은 색으로 덧칠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미국 바로 알기를 소리 높여 주장하는 데 제약을 받는 사회에 무슨 건전한 이상과 사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습니다.

 

이 책,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은 '미국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기획된 책입니다. 학술대회를 대비해 저술된 탓으로 읽어내기가 수월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미국이 우리의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문화, 예술, 사회, 정치, 언론, 종교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살펴본 데 의의가 있습니다. 저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이 '관련 언설은 넘치지만 체계적 연구는 부족했던 미국화 연구의 첫발'을 내디딜 전망입니다. 물론 이 책 외에도 미국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있습니다. 제 기억에 2000년에 출간된 강치원의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미국 바로 알기의 서막을 알리는 저작이 된 듯합니다만, 학술적 측면에서 미국 바로 알기를 선언한 책은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서툴기 마련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내용을 평이하게 하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쉽게 다듬는 일, 개론과 각론으로 구별해 상세하게 다룰 것은 따로 책을 기획하는 등의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알려야겠다는 의욕이 앞서 너무 많은 분야를 담아내다 보니 다소 산만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근현대사에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자리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현상과 본질을 구체적으로 캐내고 있다는 점에서 위에 말한 아쉬움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책을 시발로 보다 많은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또한 보다 많은 독자들이 협력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미국화의 어두운 측면을 이물 없이 논의하고 걷어내는 데 박차를 가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사상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사회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저자들이 규정한 미국화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미국화(Americanization)란 20세기 초반 미국의 다양한 제도와 가치가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 재편성과 (정보)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토대로 세계 각 지역에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그 결과 수용지역에서 자발적이거나 강요에 의해 그러한 것을 베끼고 따라잡는 현상과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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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공포의 게임 -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이용재 지음 / 지식노마드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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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은 내게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전공을 투자론으로 할까 고민한 적도 있고, 경제의 꽃이라고 하는 주식에 관한 관심 또한 적지 않음에도 여전히 난 주식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어느 땐 머피의 법칙이 떠올라 머쓱해지기도 했다.

 

투자론을 전공할 마음을 먹은 대학 4년 2학기 천만 원을 줄 테니 주식에 투자하라던 교수의 말을 난 이행하지 않았다. 돈은 가상으로 주어졌다. 신문에서 몇 종목의 주식을 택해 6개월 동안 투자한 후 그 결과를 리포트로 제출하는 과제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난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성적은 간신히 턱걸이를 면했고 그 후로 주식시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시원치 않은 성적 때문이었는지, 결국 투자론을 전공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주식시장이 요동을 치며 급락할 때는 주식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주식에 투자해 수억을 벌었다는 말을 들으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보면 '살인의 추억' 버금가라다. 투자론을 전공한다고 주식에서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멍석을 깔면 ‘투자론을 전공하지 못했다=그래서 주식시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그러니 그곳에서 돈이 들어올 리 없다’는 허점 많은 등식이 그럴듯하게 연관되었다. 손에 넣지 못한 살인자를 갈망하듯이 전공하지 못한 투자론에 대한 아릿한 추억을 여태 내려놓지 못한 탓이다. 강단에 서지 못한 데 따른 피해의식이 무의식 저변에 깔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떠나버린 기차와 같은 그것을 난 이와 같은 책을 만나면 어김없이 되새김질 하곤 한다. 이 책, 〈탐욕과 공포의 게임〉은 주식 관련 책이 내장하고 있는 통념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통칭 주식서적은 대부분 당장 '실탄'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은 실전 투자를 지향한다. 그래야 독자를 그러모을 수 있고 돈이 된다. 이 경우 돈은 독자가 잃고 저자가 번다는 말을 실감한다. 둘째, 각종 도표로 상징되는 전문서적이 그 뒤를 잇는다. 여기서 전문서적이란 전공서적을 뺀 나머지 서적군을 일컫는다. 대개 서너 장마다 ‘무슨무슨 곡선’과 또 ‘무슨무슨 기법’이 현란한 수식을 업고 빽빽이 들어있는 전문서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공들인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글을 읽는 독자는 독자대로 실전에 써먹을 수 있을까, 과연 다 읽어야 하나 라는 또 다른 노고로 노심초사해야 하니 그만한 고충이 없다.

 

다소 설명이 길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책이 '실전'과 '전문' 사이의 틈새를 겨냥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 틈새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보기는 이르다. 설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도표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고 특정 용어에 대한 설명은 충실하지만 독서 속도를 높이는 데 거치적거린다. 실전과 전문이 지닌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책의 장점은 맹점을 파고든 솜씨에 있다. 맹점은 환상을 심어주고 의사결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투자자는 투자금액이 많든 많지 않든 개인 또는 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자산을 운용한다는 측면에서 의사결정에 신중할 필요가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서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면 의사결정 국면을 파고든 맹점은 되도록 배제해야 한다. 책은 투자자가 종종 오류에 빠지는 맹점들과 시장에 떠도는 확신에 찬 이론들의 허구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현명한 투자를 망친 전범인양 다루는 저자의 주장을 보면 과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키워드는 다음 질문에 있다.

 

과연 투자자는 합리적인 투자자일까? 인간은 매사에 합리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주류 경제학의 인간관은 언제나 옳을까? 저자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저자는 행동주의 경제학적 기반 위에 섰다.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인 인간형을 상정한 저자는 같은 이유로 심리학과 신경과학을 경제학에 접목한 일군의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투자자는 탐욕과 공포에 의해 투자한다는 것. 이런 저자의 주장은 책제목에 고스란히 담겼다.

 


저자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산업연구원의 연구원, 동아일보기자를 거쳐 메리츠증권과 부국증권에서 주가지수 선물과 옵션을 거래했다. 이론과 실물을 두루 경험한 저자의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탐욕과 공포의 경제학〉은 요즘 반토막이 났다거나 전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 말로 화제를 몰고 온 적립식 펀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미 대박 시장의 꿈은 탐욕에 비례해서 곤두박질쳤다. 제2장, 〈시장, 바보들의 게임〉은 차트에 속고 신상품에 속는 개미군단들의 현실을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각종 통계치와 분석기법을 맹신한 투자자의 미래가 어떤 색깔을 그려낼지 돌아볼 수 있다. 장미빛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다. 제3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장에서 독특한 셈법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인터뷰를 실었다. 제목 역시 1, 2부와 전혀 다른 맛을 풍긴다. 〈시장을 이기는 사람들〉이 그 소제목이다. 


합리적 투자가설은 정보 입수 및 분석력, 경제적 의사결정을 기초로 한다. 하지만 현실은 합리적 투자가설이 기반하고 있는 토대와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 투자자가 얻는 정보는 제한적이고 그 정보마저 다른 투자자에게 열려있는 정보, 곧 공개된 정보다. 각종 데이터와 자료는 과학적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지만 속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제약 조건 내에 위치한 불완전한 데이터이자 자료다. 따라서 합리적 의사결정은 애초 불가능하다.

 

분석자료와 분석도구마저 불완전한 시장에서 투자자자 살아남으려면 '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감을 저자는 '탐욕과 공포'라는 부정적인 말로 치환해 놓고 있을 뿐이다. 책에 인용된 각종 이론들에 대한 학적 반론도 만만치 않은 터에 수익을 노리는 투자자가 감각에 기댄다한들 비합리적이라고 손가락질할 일은 아닐 것이다. 비록 제한된 정보지만 제한적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라면 분석자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외부자료와 감각이라는 정성(定性)적인 부분을 잘 버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고위험·고수익이 정설인 주식시장에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과학적'이라는 형용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주식시장과 일상생활에 '감각'이라는 부분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끈 저자의 수고는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탐욕과 공포'는 '수익과 손실'로 바꿔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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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1
츠츠미 미카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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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적당량을 투약한 안정제처럼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하고 삶에 활력을 주지만 지나칠 경우 피터팬 증후군과 같이 성장을 거부하는 이상현상으로 발전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고 그것과 크게 동떨어진 삶을 살게 만들기 쉽다. 환상은 당의정과 같다. 달듯하다가 결국 쓴맛으로 끝나는 당의정을 경험한 이라면 더 이상 당의정이 주는 맛에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이기 전에 설탕물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당의정이나 설탕물은 성장기 전 아동에게 처방된다. 어른이 당의정 맛을 버리지 못하면 어리석다. 우리에게 당의정이란 국가에 견주면 아마 미국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북괴의 남침을 막아준 미국', '못살고 어려울 때 경제원조를 아끼지 않은 미국',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행을 결심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미국' 등 우리 사회에 각인된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는 가히 절대지선의 철옹성이다.

 

최근 1, 2년 동안 그 위상에 상당 부분 타격을 입었지만 우리사회에 비친 미국은 여전히 영원한 우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을 헐뜯는 기사나 발언이 나오면 우리 일이 아닌데도 먼저 흥분하고 내 일 인양 미국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어디 그뿐인가. 아예 나서서 미국이 원하는 바를 챙겨준다. 누군 그런 우리의 행동을 일컬어 '다 퍼준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시큰둥하거나' '탐탁치 않아 하거나', '날을 세울거나' 등등의 부정적인 어구의 스펙트럼으로 이 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우선 연상해야하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어린아이가 맛본 당의정과 같은 수준의 현실인식에서 한 발짝도 앞서 나가지 못한 처지를 이 책이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지 않을지 걱정이다. 물론 이런 걱정은 우려한 바와 전혀 다른 반응을 시장이 보임으로써 나를 비웃을지 모를 일이고 설혹 우려한 바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시장이 끊임없이 당의정에 만족하려고 한다면 할말이 없기도 하다.

 

어느 경우든 나는 내가 여전히 과거 서슬 퍼런 시절의 기억 주변을 맴돎으로써 속히 벗어도 시원치 않을 피해의식을 정량 생산 또는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힐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게 전부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이 기침하면 우리는 몸살을 앓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만들어 유포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말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유효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기침하면 몸살을 앓는 나라가 어디 우리뿐이랴.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휘청하는 것을 보면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미국 바로 알기'가 반미는 아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상한 등식을 깨뜨려야 할 때다. 솔직히 말하면 벌써 오랜 전에 그랬어야했다. 그럼에도 우린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위기 때마다 속수무책 몸살을 앓았다. 어떤 문제든 그 문제의 구조를 바로 알아야 풀이를 하고 답을 얻을 수 있다. 저자처럼 꼼꼼히 따져보자. 미국의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고, 그 문제가 각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각국은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에 대처해야하는지 찬찬히 분석하고 비판해보자. 우리 힘으로 하기 거북스럽다면 남의 말에 귀나 한 번 기울여보자. 그리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자. 그래야 무언가 남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일이 벌어지고 나서 허둥지둥 해결책을 찾느라 부산떨지 말고 이제라도 그 나라 위에 분석툴을 대보자.

 

이 책은 '병든 미국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이라는 표를 달고 번역 출간되었다. 책 앞 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극단적인 민영화의 폐해와 실상, 국민의 생존권과 관계된 분야까지 시장원리를 끌어들인 미국의 현실태가 전하는 경고', '신자유주의의 메카인 미국의 경제파탄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고발' 등의 어구들이 강렬한 포스를 내뿜는다. 과연 그럴까? 세계 정치 경제를 쥐락펴락한 미국이 하루아침에 추락했다면, 추락할 수 있다면 믿어질까?

 

저자가 파헤치고 있는 미국은 기침하는 정도가 아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린 책에서 유효한 처방전을 폐기처분하고 '야매'(불법 의료행위)에 기대를 거는 미국을 필연코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점은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이 과거에 행한 정책과 현재의 정책을 어렵지 않게 비교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미국이 처한 현실의 원인을 발견해가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지 모른다.

 

미국이 처한 현실적인 고민의 전부를 신자유주의 정책에 떠넘길 수는 없지만 너무도 많은 부분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복지정책의 축소와 공기업의 민영화, 정부개입 최소화, 시장의 완전한 자기통제력으로 특징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 미국은 수십년 동안 타국과의 교역에서 비교우위를 보이며 성장했다. 공장 굴뚝이 없어도 경제가 잘 돌아가는 국가적 이상을 실현한 듯 보였다. 1, 2차 산업의 절대적 부족을 메우고 남는 서비스산업의 부가가치 창출에 기대어 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소비했다. 미국이 고안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쌍둥이 적자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든 각종 에프티에이를 통해 값싼 제품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고, 소비 저감에 따른 경제불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9.11 사태 이후 예견된 경제불안을 일거에 내몬 것도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의 결과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 정책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누가 알았으랴. 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공기업을 민영화한 후 예측 이상의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효율을 중시하는 민간기업에 효율에 앞서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 하는 국가와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뉴올리안즈에서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민영화한 '긴급사태관리국'은 상황대응에 실패했고 그 전에 정부조차 수많은 경고에 귀를 닫을 만큼 시장원리가 기반한 효율과 시장의 자기통제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안정을 찾아갈 즈음 긴급사태관리국은 이재민 중 상당수에게 보조금 지원 중지 통지를 보냈다. 검토해 보니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검토했다는 것이 고작 그들 이재민들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 신봉하는 효율의 끝이 어딜지 궁금하다. 극빈층과 다름없는 이재민들은 분노했고 더 이상 긴급사태관리국과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서 정작 미국이 우려할 것은 사회안전망의 붕괴다. 잠재적 저항세력의 양산과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와 자발적 참여의식의 붕괴 등 시민의식의 전반적인 위축을 걱정해야 한다.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그 수준은 고도화할 것이고, 장기적으로 미국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국민 없는 정책의 결말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저자의 칼날은 미국의 내밀한 부분, 즉 심장부를 향해 서서히 움직인다. 빈곤층에 대한 보조금 지원 중단이라는 조처가 상징하는 복지정책의 축소는 상류층의 소득의 일부를 징세해서 정책적으로 빈곤층에서 재분배한다는 복지국가적 이상의 붕괴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 부분은 의료보험 제도의 편중을 강도높게 비난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저자는 수년 전 개봉된 영화, 〈존 큐〉를 예로 들면서 이 영화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해 죽어가야 하는 극빈층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고 고발하고 있다. 출산입원비용으로 1천 2백 달러를 지불할 계층은 많지 않다. 계층간 불균형의 심화가 불러올 심각한 위기상황을 외면하는 미국의 장래, 글쎄다. 

 

미국의 현실은 곧 맞을지 모를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지사지로 읽을 일이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소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미국의 현실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제1장, 〈빈곤이 만들어낸 비만 국민〉, 제2장, 〈민영화에 의한 국내 난민과 자유화에 의한 경제 난민〉, 제3장, 〈단 한 번의 질환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한 사람들〉, 제4장 〈출구를 차단당한 젊은이들〉, 제5장, 〈전 세계의 근로빈곤층이 지탱하고 있는 '민영화된 전쟁'〉 등 각각의 소제목은 미국이 앓는 몸살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심하다. 하지만 그들 중 몇 가지는 우리나라의 경우라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세계경제가 결코 일국 경제의 단순합이 아님을 우린 이 지점에서도 만나게 된다.

 

미국의 현실이 남의 나라 문제라고 치부하고 고개를 돌린다면 머지 않아 같은 문제가 우리에게 닥치게 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경제 또한 세계경제에 편입된 지 오래고, 특히 미국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 경제의 현상과 본질적 측면이 모두 미국과 같을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에 경고등이 켜지자마자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휘청거린 요 며칠 새의 경험은 세계각국이 연쇄고리 형태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훤히 보여주었다. 미국의 현실을 보고 우리의 그것을 점검할 일이다. 유사한 형태는 바로잡고, 동일 궤적을 그리고 있는 부분은 급속히 보수해야 한다. 제2의 아이엠에프는 오지 않는다. 두 번째 맞는 경제위기는 공멸적 위기상황인 공황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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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영성작가들,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다 기독교 영성작가 시리즈 2
존 R. 스토트. A.W. 토저 외 지음, 최은미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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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책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으로 단순하게 구분한다면 이 책은, 한번 더 단순하게 생각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에 속할 것입니다. 240여 쪽의 책에 한사람의 글이 한쪽을 넘지 않고 다른 한쪽은 일러스트로 채워 놓았으니 120여명의 글이 실린 셈입니다. 길지 않은 글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특히 독자의 현 상태가 그 글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바로미터가 되던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되면, 글이 짧다고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쯤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더욱이 그 글이 대표적 영성작가라는 타이틀 뒤에 감춰져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글을 대할 때 작가의 이력에 전적으로 올인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어서 그런 문제에 눌릴 입장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번에 아니라고 할만큼 제 배포가 크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런 책을 낸 엮은이의 의도가 심상치 않다는 데 대해 일정부분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글이 길면 지루하다는 인상이 지배하고 짧으면 깊이가 없다는 또 다른 인상에 시달리는 출판계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후자의 위험성을 고스란히 안고 이 책을 펴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장이 무겁지 않은 책에 호감을 보인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신앙서적이라고 해서 독자의 트렌드를 비켜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이 성공하려면 깊이를 원하는 독자와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원하는 독자를 고루 끌어안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매력 수준이 낮은 후자만을 겨냥해선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 없습니다, 출판 부수 대비 수입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독자가 읽느냐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고 보면 사실 양자를 두루 포섭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서적은 아직까지 일정수준의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적인 도전과 영을 깨우는 호소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실적인 트렌드을 두고 볼 때 분명 독자의 요구에 소구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깊은 수준의 영성을 보여온 작가들의 깊이를 올곧게 반영하지 못한 원죄를 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후속작이 이 부분을 상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후속작이란 대부분 전작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정설을 염두에 두면 아쉽지만 그 수준을 크게 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잠재울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이 끌어들일 독자를 계속적으로 유인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장치 마련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 한 권 분량에 정해진 수준보다 많은 글을 담다보니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모르지 않았을 출판인의 입장을 또한 모르는 바 아니지만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은 결국 속 깊은 성찰과 깊이 있는 영성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전달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런 주문이 출판계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비아냥을 듣는다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신앙서적을 읽는 독자의 수가 일반 서적을 읽는 그것과 비교할 때 성장률이 높지 않다는 것이야 구체적인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아도 알만합니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쉬운 길만 간다면 정작 어렵게 얻은 독자마저 잃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 부분 저만의 기우로 그친다면 좋겠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이 책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있어서 주요변수는 출판사가 아닌 독자의 몫으로 남겨질 전망입니다. 단번에 이 책 내용을 전부 훑을 것이 아니라 마치 큐티를 하듯이 매일 한 장씩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살아간 삶을 매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결단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아포리즘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짧은 글은 반대급부적으로 특성상 풍부한 여백을 채울 몫이 남겨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이 책을 대한다면 필시 전과 다른 성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행간의 의미를 읽는 데 익숙한 독자라면 더더욱 이 책의 효용성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가진 단점이 독자의 풍부한 성찰로 감춰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책이 독자들을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갈망하는 단계로 인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어느 책이라고 특유의 가치가 없을까마는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기보다 이와 같은 서적의 지위가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 분야의 독자가 바라는 수준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보다 귀를 기울여 주기를 관계자분께 바랍니다.

 

기름부으심이 있는 책은 반드시 크리스천들을 불러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크리스천들이 책의 영향으로 놀랍게 결단하고 전과 다른 삶을 향해 분투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꿈을 놓지 않는 출판계를 기대하며 다소 무례한 리뷰를 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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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응원하라 - 잘되는 나 실천편 - 나는 오늘도 잘될 것이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동일하게 말의 권능을 믿고 선포할 것을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저 산에게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가복음 11:29, 우리말성경)"

 

나와 여러분이 외치는 말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외쳐 보십시오. "나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며 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음 같이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

 

이 책 〈나를 응원하라-잘되는 나 실천편〉은 시중에 떠도는 편견을 통해 보면 여느 '긍정의 힘'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처세로서의 긍정은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부정적인 행동을 삼가는 등의 변화, 즉 나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말의 능력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모든 악하고 더러운 영들을 꾸짖고 쫓을 수 있으며,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권세는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은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전혀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보지 마십시오. 생각한 만큼 기도하지 못하고 생각한 만큼 영적이지 않은 '나'를 보지 마십시오.

 

그런 '나'를 너무도 잘 알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은 그것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나와 당신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와 당신은 하나님 앞에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주신 의, 그 의를 자신의 상태를 보고 죄의식과 바꾸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이 책이 그런 당신의 지위를 확인해 줄 것입니다. 오늘 내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나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확인하십시오. 나와 당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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