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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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잘 안다’는 말과 통하지 않는 경우를 우리가 일본에 갖는 인상처럼 제대로 짚어주는 예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자각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십수년 전에 ‘일본을 알자’는 논의가 활발히 일었다. 그간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던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뒤로하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적극적인 자세가 바탕이 됐다.

 

그 때부터 일본에 관한 책들이 다양하게 출간되었던 듯하다.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정도의 정보전달 위주의 책이 양산되었지만 일부 문화적 측면의 분석서도 있어 당시 출판시장에 다양한 시각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던 일반 독자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본격서가 출현했다고 보기란 일렀다. 대부분 찬양일색 또는 무조건적인 비판 등 양극단과 극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특정 지점에 그 책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없다〉의 출간으로 그런 흐름이 전기를 맞았다. 그 책을 통해 비로소 일본과 일본사회에 대한 이성적인 시각과 성찰적인 비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일본 탐구의 붐이 일었다.  등등의 책은 그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은 없다’ 가 모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책 또한 지나치게 비분강개한 면이 있었고 책 제목에서 보듯이 고작 몇 년에 걸친 관찰을 근거로 ‘일본은 없다’고 단정적으로 규정할 만큼 관찰과 분석, 비판, 수용이라는 프로세스에 기반한 본격서로서의 특질을 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후로 십수년이 지난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배용준이 결정적으로 촉발한 한류의 물결을 따라 최근 개그우먼이 방송시장에 진출하는 등 심심치 않게 화제를 몰고 오고는 있지만 그런 사실이 과거와 달리 우리가 일본을 많이 알고 있음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별개로 여전히 정치·경제·문화계 각각에 일본에 정통한 인물을 손에 꼽기가 수월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는 한 특정 국가에 대한 시각은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관성을 어느 정도 배제하기 위해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한다든지 제3자의 판단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3자의 시각이라고 해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편견을 온전히 배제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런 경우 당사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최근 몇 년 새 그런 움직임이 탄력을 받고 있다. 이 또한 문제는 있다. 자국 내에서 자국을 제대로 비판하는 당사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이 점에서만 보면 이 책의 저자가 환영받을 이유로 충분하다.

 

저자 기타노 다케시는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학생운동에 참여한 전력으로 중퇴했고 신랄한 독설로 인기를 모은 ‘투 비트’를 경성해 개그맨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영화배우로도 데뷔했다. 그가 감독한 영화, ‘하나비’가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투 비트‘에서 보인 신랄한 독설은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장소를 옮겨 현재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낸 책이 〈위험한 일본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의 현 정치·가정·사회의 문제를 직설적 화법과 각인도가 높은 단문을 사용해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다. 때때로 허무맹랑한 주장에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그가 개그맨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비판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로서의 반어법으로 읽히기에 큰 무리가 없다.

 

그의 비판은 일반적인 비판론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는 사실에 기초한 비판과 주관적인 판단을 뒤섞어 얼마간 독자의 얼을 빼놓는다. 그런 탓에 ‘경청할만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뭐지?’ 하는 의문부호를 날리게 하는 그의 화법과 언술에 익숙해지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가 당초 제기하려했던 '언제나 불행은 우리 눈앞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행복은 늘 아주 먼 과거에만 있는' 일본의 현주소를 피해가려는 의도는 아니니 오해하지 않아도 된다. 개그맨의 자질이 그런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자국민이 자국을 비판하는 데 전통적·정서적 한계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지점에 균열을 일으키는 기제가 '주관의 객관화'법이다. 낯설게 하기, 비틀기, 거리 두기와 유사하다. 그는 그런 장치를 통해 독자가 보다 효과적으로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때론 개그다운 비판에 웃기도 하고 분석적 시각에 감탄하는 동안 일본의 현실과 그 현실을 대하는 일본인의 관점에 관한 정치한 시각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 학술적인 비판서는 많았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고, 여행지의 골목길을 걷듯이 내밀한 곳을 관찰하는 묘미를 주는 책은 많지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이 그런 것이다. 반면 이 책에 대해 희화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종종 보이는 어이없는 주장과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 그런 비판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의도한 '일본 벌거벗기기'의 본질적 측면을 송두리째 거부할 만큼 그 결점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책은 대부분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할애되고 있다. 일본의 총리조차 그의 필봉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밀입국한 김정남을 고스란히 돌려보낸 후 "적절한 조치였다"고 한 고이즈미를 정신나간 총리라고 일갈했다. 반면 우린 풀려나기는 했지만 쓴 글이 문제가 되어 미네르바가 구속된 바 있다. 글을 쓰는 데도 건드리지 말아야할 성역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런 이유로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거침없는 행보가 새삼 부럽다.

 

그의 글에 담긴 함의는 반대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유효한 프레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니는 우리 정치는 대내외적 측면에서 이렇다할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가정은 저자가 그린 일본의 파괴적인 양상과 같이 관계의 해체가 가속화하고 있다. 사회는 각종 병리현상을 부산물처럼 쏟아놓고 있다. 과연 탈출구는 없는 걸까? 저자의 다소 과격하고 어이없는 주장에 깔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문제를 추적하는 날카로운 지성, 정치·사회적 권위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가 어두컴컴하다고 해서 과거 어느 한 때의 행복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더욱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되는 것일 게다. 과거라고 다 좋았던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좋게 기억하는 때의 기분과 분위기를 불러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그 때의 추억을 되살려 오늘 닥친 고통을 이겨내기도 하고 내일을 새롭게 준비할 수도 있다. 과거는 '지나갈 내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 앞서 과거와 현재에 가교를 놓으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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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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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통일한국. 꿈꾸었던 이상적인 통일의 모습이 아니다. 폭력과 암투가 난무하는 사회. 남한의 환락과 북한의 경직이 좋지 않은 부산물을 퇴적해놓은 사회는 출구 없는 궤도 위를 시속 5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열차처럼 그 끝을 향해 불안한 가속을 계속하고 있다. 암울한 미래.

 

우리는 이 소설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린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기존의 코드와 다른 시각에서 미래를 주시했다. 리플리컨트(Replicants: 복제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생명의 존엄성은 용인 받지 못했다. 색감은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카메라 워킹은 현실을 반영하듯 자주 고통스럽게 떨렸다. 불안과 스트레스가 화면을 가득 메운 영화는 시종 관객을 불안의 도시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마찬가지로 현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미래를 그리고 있는 소설 〈국가의 사생활〉은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과 유사한 궤적을 좇아간다. 심장이 없을 것 같은 리플리컨트 대신 냉혈한처럼 보이는 인민군 출신 폭력배가 등장하고 화면을 지면이 대체하고 있을 뿐 스토리 액자와 시선은 가깝게 공명하고 두텁게 중첩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리플리컨의 실존을 긍정하고 사랑으로 견인하듯이 주인공 '리강'이,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을 정부로 삼은 '최영환'에 대한 복수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윤상희'를 뜨겁게 지켜보는 것도 닮았다.

 

물론 완성도 면에선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영화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꽉 찬 구도와 고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스토리 구성, 탄탄한 인물설정을 중심 축으로 주제의식을 뚜렷이 좇아가는 것과 달리 소설은 인물들, 특히 '동철'의 느닷없는 등장과 개연성 없는 행동, 체제 전복의도를 드러낸 '오남철'의 갈등의 발단과 이후 전개과정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허술한 처리, 인물들 사이의 갈등 고리의 느슨함, 종국적 파국에 이르는 긴장의 부족, 희망을 끌어내는 복선의 허술한 배치 등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어둡게 채색하고 있다고 해서 이 소설의 지향이 현실도피적이라고 단정하기엔 이르다. 저자가 그린 미래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비루하게 내걸린 달력만 2016년을 가리킬 뿐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양식과 사고패턴, 주변 환경 모두 '지금 여기'로 대표되는 현실이다. 그 바탕 위에서 소설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통일한국의 '비용'을 가감 없이 쏟아낸다. 마치 통일독일이 통일 후 비용 문제로 홍역을 치렀듯이 우리 또한 그와 유사한 형태의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 비용의 최전선을 형성한다. 결론 난 통일.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이 표류하는 인간군상의 어두운 그림자와 권력을 향한 인간 욕망의 마스터베이션만이 그 해의 외곽을 표표히 떠다닌다. 희망이라곤 전혀 없는 현실 그대로의 미래를 욕망할 수 없는 현재의 곤란을 이 소설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한다.

 

통일을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경우의 오류를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통일 전 남한과 북한, 양 체제의 장단 중에서 단점만을 선택하고 그 위에서 '봐, 통일하면 이렇게 돼'라는 식의 주장을 대놓고 펴는 것이 좋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든 그 부분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다. 사적 공간에서 어떤 말과 행동이든 할 수 있을 때 사생활이 보장된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든 특정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에 딴지를 걸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사생활 또한 그 특성상 어떤 외부인도 침해할 수 없다. 아마도 그런 차원에서 비판의 예봉을 피하고자 제목에 사생활이라는 용어를 삽입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을 국가로 치환했을 뿐 의미는 개인의 사생활이 풍기는 뉘앙스와 다르지 않다. "내가 어떤 선택과 태도를 보이든 그건 전적으로 내 자유다." "사생활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저자는 그 점을 분명히 하려는 듯하다.

 

느닷없이 닥친 통일로 해체된 인민군은 사회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그중 일부가 폭력배화한다.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 더 이상 그 특권을 향유하지 못하고 중하층 계급으로 전락하는 동안 인민군출신 폭력집단과 중하층 계급으로 전락한 특권층 양자가 사회적 불안요인의 키워드로 부상한다. 언제든 터질 뇌관을 소설 배경으로 갖춘 스토리는 빠르게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살인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을 계기로 통일한국 내부에서 필연코 충돌이 예정된 북과 남측의 대결구도는 차츰 무르익는다. 어느 누구도 종국적 결말을 깨닫지 못한 채. 이는 곧 지리적 통일이 정서적 통일을 담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정서적 통일이 선행되지 않은 단선적 차원의 지리적 통일은 내부 충돌의 싹을 키우는 근인(近因)이 됨을 보여준다.

 

아픔의 폭발적 발산이 카타르시스를 가져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적용될 여지가 없는 공간 속에서 충돌은 보다 격렬한 형태를 갖추고 종말적 결론부에 마지막 수분를 공급한다. 암울하다. 출구가 없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마저 놓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서일화의 독백('그러고 보면 통일이 온통 부정적인 일들로만 점철된 것은 아닌 셈이었다. 환난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기 쉽다.')이 복선임을 깨닫는 순간 국가가 표방한 사생활의 일부가 해체되어 사회 안으로 흘러든다. 이제 그 부분이 사회적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과연 통일은 선한가? 통일 후의 미래는? 하지만 소설은 향방 잃은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조차 ‘봄이 오지 않는 들’처럼 빼앗는다.

 

저자가 그린 반쪽의 미래는 또 다른 반쪽, 곧 희망적인 미래 통일한국을 서일화의 독백에 잔영처럼 숨겨놓았다는 측면에서 암울하게 읽히는 것만은 아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새벽이 가까움을 알듯이 암울한 현실 배면에 희망의 현실이 맞대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통일을 장밋빛 환상처럼 볼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만도 않다는 것, 비록 결말이 그것들 중 어느 한쪽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그것이 고정불변의 결정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것, 언제든 그 배면의 것을 취할 여지가 있다는 것, 그 모두를 〈국가의 사생활〉이 겨누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층위는 다층적이다. 사생활과 공동생활의 혼재, 이상과 현실의 공존, 개인과 사회의 파괴적 결합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 사자의 입자에서 볼 때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다. 사회 내부의 결렬한 대결구도에 깃든 사회적 함의를 읽어낼 독자라면 더 이상 이 소설에 대해 팽팽한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든지, 재미없다는 말로 일축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통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독창적으로 돋을새김 되길 바란다. 오늘 이 소설이 그런 마당을 마련했다는 의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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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꿈이다 - 찬양사역자 김명식의 노래와 삶의 이야기
김명식 지음 / 가치창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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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달리 찬양사역에 대한 시선이 크게 달라진 느낌이다. 교계의 보수적 흐름에 따라 복음성가가 교회 내에서 불려지는 데 수십 년에 걸린 것과 대조적으로 요즘 성가의 대부분은 파격 그 자체다. 음악적 스펙트럼의 폭이 전 보다 크게 넓어졌고 악장의 변화도 전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변모했다.

 

대학생 시절, 모 교회에서 진행한 찬양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선교단체에 몸담고 있던 따라 개인적으로 복음성가에 대한 이물감이 상당부분 희석되었으리라는 평소 자신감과 달리 원인을 알 듯 모를 듯한 어색함이 집회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번에 걸친 참석 이후 내게 맞지 않는 집회라는 인상만 굳힌 채 집회 참석을 접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물감은 대부분 몸에 맞지 않는 데 기인한다.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기 마련인 일반인의 특성상 새로운 것에 대한 이물감은 상당한 시일 동안 극복의 대상으로 남는다. 박수를 치고 손을 쳐드는 것 이상의 경험이 없던 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찬양을 보조적인 수단 정도로 치부하던 관행이 계속됐다. 무의식적으로 예배, 기도와는 조금 격을 달리하는 찬양,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 보다 확연히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찬양을 규정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그런 인식은 깨어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찬양과 찬양사역자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같은 기회를 얻을 때까지 상당한 시일 동안 성경적이지 않은 자기규정을 별 문제의식 없이 몸 속에 지니고 다녔을 것이다.

 

난 이 책의 저자인 김명식이 유명한 찬양사역자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그의 글에 더욱 집중하게 했을지 모를 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찬양사역자로 헌신한 후 줄곧 그 길을 걸은 20여 년의 삶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청년기에 컨티넨탈 싱어즈의 자유로운 찬양에 경도된 저자는 그들과 음악적 입장을 같이 했다. 이후 그가 자신의 팀 '자비량 단기음악선교 훈련팀'을 창설하고도 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찬양을 부르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목적을 다했다고 생각한 당시 보편적인 찬양팀과 달리 그는 훈련에 보다 무게중심을 두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크리스천들이 성경공부와 기도를 통해 나날이 성장해 가는 꿈을 꾸었다. 생활 전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 받기를 소망했던 그는 30명이 넘는 팀원들이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만을 바라도록 훈련했다. 

 

한가지 일화가 눈길을 끈다. 찬양 음반의 판매실적이 좋지 못했던 한 자매가 무척 어려웠었나 보다. 찬양과 돈을 좋고 나쁨의 양극단으로 생각했던 자매에겐 당연한 결과였을 터. 자매는 사역을 하려고 왔는데 왜 자기에게 장사를 시키느냐고 볼멘 소리를 했다. 그는 "우리가 앞에 서서 거룩한 노래를 부르고 거룩한 말을 하는 것만이 사역이 아니라고, 결국 우리의 삶이 산 제사로 드려져야 하며, 그렇게 드려진 우리의 삶이 우리 믿음의 증거가 되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의미의 사역"이라는 인상적인 답변을 던졌다. 그제서야 자매의 얼굴이 환해졌고, 다음날부터 열심히 음반을 판매했단다. 종종 사역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치부 또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번은 찬양팀과 떨어져 미국의 한 서점에서 쇼핑을 하던 중 어린 시절 집 안에 쌓여있던 선정적인 주간지에 빠졌던 쓴뿌리를 거절하지 못하고 한켠에 놓여있던 포르노잡지를 사들었단다. 그날 찬양사역과 다음 찬양사역 모두 나쁜 일기로 큰 곤란을 겪었다. 그제서야 그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았다고 썼다. 당시로서도 이름난 사역자였던 그가 보인 어리석은 행동은 우리가 흔히 빠지는 것이기도 해서 반면교사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도록 훈련하시며 종내 그를 떠나지 않으신다. 이 책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크리스천의 신앙고백이자 크리스천을 섬세하게 인도해 가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접사(接寫)다. 사도행전은 멈추지 않았다. 저자가 찬양사역을 통해 사도행전 29장을 쓰고 있다면 우리 크리스천들 또한 그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각양 은사로 그 장을 써 내려가야 한다. 자원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자신을 헌신해 그분께 드려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잃은 바 된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오는 꿈이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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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몸 만들기 4주 혁명
마츠모토 히토시 지음, 박재현 옮김, 한동길 감수 / 아우름(Aurum)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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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자전거에 중독된 적이 있었다. 주말이든 평일이든 틈만 나면 자전거를 끌고 산과 들을 누비던 때, 계절이 그렇게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좋았다. 계절이 오고 가는 걸 실감나게 경험하던 때이기도 해서 주위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자전거 예찬론을 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전거가 표상하는 건강 이미지도 물론 좋았지만 무엇보다 자전거를 타며 마음껏 자연과 호흡하고 자연과 더불어 한 몸이 된 것 같은 벅찬 기분이 무척 좋았다. 아마도 그런 기분이 이후 수년 동안 자전거 타기에 몰두하게 된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자전거 타기는 의사들이 운동 종목으로 권장할 만큼 남녀노소 무리 없이 체력을 증진하기에 좋은 대중적인 운동이다. 이 책의 저자는 2004년 다카마츠노미야 G1 우승, 최고령(45세) 우승 등 경륜선수로서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고 있다. 더욱이 저자는 현직 스포츠 트레이너로서 다년간 쌓은 경력과 노하우를 '파워 체인지 트레이닝'이라는 독자적인 이론과 실기로 집대성했을 만큼 자전거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이 책,〈자전거로 몸 만들기 4주 혁명〉에서 자전거에 갓 입문했거나 어느 정도 맛을 들인 라이더들을 대상으로 자전거에 관한 총체적인 정보를 아낌없이 전달하고 있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식습관이 서구화함으로써 체내에 지방 함유량이 과다한 현대인들의 주관심사로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 '살빼기'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살빼기에 관한 일반의 오해와 운동 후의 변화 등을 세세하게 안내함으로써 당위와 다분히 감성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운동 이론과 실제 전반에 대해 점검하고 전문적인 이해와 이성적인 식견을 갖추도록 이끌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 부분을 통해 그릇된 상식과 세간에 널리 퍼진 편견을 어느 정도 벗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부는 자전거가 대표하고 있는 유산소 운동을 되짚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유산소 운동인지, 나에게 꼭 맞는 안전한 유산소 운동은 무엇인지를 가려운 곳을 용케 긁어주는 효자손처럼 구석구석 의문사항을 말끔히 해결해준다. 1부와 2부를 전부 숙지했다면 이제 실전이다.

 

3부와 4부는 자전거 타기가 아무리 좋다해도 무턱대고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느 운동과 마찬가지로 자전거 타기도 준비 운동과 마무리 운동이 필수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운동하면 좋을까 하고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궁금증을 짚는 저자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하고 나면 이내 4부, '자전거로 근육을 단련하는 방법'과 맞닥뜨린다. 이 파트는 자전거의 종류별 특징, 나에게 꼭 맞는 자전거 선택법, 자전거를 탈 때 사용하는 근육, 자전거를 위한 근육 트레이닝 등을 다루고 있는 만큼 무척 실제적이다.

 

5부는 일종의 심층학습이다. 자전거를 이용한 '서킷 트레이닝' 방식을 다루고 있다. 두산백과사전은 '서킷 트레이닝'을 체력 트레이닝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더하여 근육·호흡·순환기능의 점진적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트레이닝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서킷 트레이닝을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제자리 걷기(20회) → 스쿼트(6회) → 제자리 걷기(20회) → 버드독(20회) → 제자리 걷기(20회) → 사이드 브리지(좌우 10회) → 제자리 걷기(20회) → 바비(6회) →제자리 걷기(20회) → V자 복근(10회) →제자리 걷기(20회) → 프런트 런지(12회) →제자리 걷기(20회) → 팔굽혀 펴기(6회) → 제자리 걷기(20회) 순이다. 만만치 않은 운동량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지방률을 획기적으로 낮춰주는 방법이라고 하니 관심을 가질만하다.

 

6부는 자전거와 각종 장구에 관한 입문 성격이 짙다. '자전거를 구입할 때 알아야 할 것', '자전거의 안장과 페달 세팅법', '그립과 핸들 세팅법' 등 자전거를 선택하고 그 자전거를 자신의 몸에 맞게 조율하는 각종 방법을 친절하게 풀어놓았다. 10년 전 만해도 제대로 된 자전거 안내책자는 많지 않았다. 수십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내 몸에 맞는 자전거 사용법을 읽힐 수 있었다. 이 책과 같은 교과서가 있었다면 그런 시행착오는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전거 구입과 사용법을 익히는 필수코스인 만큼 꼼꼼히 챙기길 권장한다. 7부 또한 페달링법을 소개하는 등 6부를 쓴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좋은 운동이라도 제대로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 트레이너를 곁에 두었다고 생각하고 자주 꺼내 읽으면 또 다른 운동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문답 형식의 내용전개와 간단한 그림들이 이해도와 시각효과를 강화하고 있어 읽는 데 큰 부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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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 영악한 자본주의 뒤집기
전병길.고영 지음 / 꿈꾸는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대안 세계화의 물결이 다소간 잦아든 느낌이지만 여러 갈래의 지류를 통해 그 물결이 지닌 함의가 관철되고 있음을 목도하는 일은 즐겁다. 본류와 지류의 관계는 본류가 시종 관철되는 중요한 장치로서 지류의 필요성이 인정되듯이 지류 또한 본류의 건강성을 그 먹이로 한다. 본류와 지류는 물리적 상호연쇄와 의미적 순환관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방위적인 세계화 추진의 위험성이 현실화된 현 상황은 분명 수혈이 필요할 정도의 긴급 상황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진단에 크게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예로든 수혈의 방식과 정도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담긴 함의, 그리고 그런 생각이 현실화된 예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언급한 본류의 문제와 지류의 문제를 목적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로 치환해서 우리 사회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생각 몇 가지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목적 또는 목표하는 바가 다를 때 구성원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기준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방법적 차이야 극복의 여지가 있지만 목적과 목표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조직 전체의 이상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이분법의 틀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없다. 목적과 목표는 그것에 뜻을 같이하는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법과 방식은 언급한 목적·목표와 차이점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전자가 구성원을 유인하는 장치라면 후자는 구성원의 결집된 의사를 근본으로 한다. 구성원의 일체화된 동의를 끌어내지 못한 방법이 실효성을 거둘지 의문이다. 조직이라는 틀 안에서 방법의 문제를 새롭게 가져가려는 지난한 노력이 잇따라야 하겠지만 동의를 끌어내지 못했다해서 조직이 사라지거나 구성원이 근본적으로 이탈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전자의 경우 일이 틀어지면 조직이탈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논란이 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실효성과 경제성이라는 지엽적인 사항이 문제가 될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우리 사회, 특히 정치계는 자주 본류 또는 목적과 목표의 문제가 아님에도 본류를 다루는 방식 또는 처방을 따라 가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보니 이합집산이 잦고 작은 일을 큰 일처럼 만들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우리 사회를 덧칠했던 '빨갱이 논쟁'도 무분별한 대응과 전혀 상관이 없지 않다. 나 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이 아니면 전부 적으로 규정하고 단죄한 과거의 정치상황을 올바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편견을 배제한 정치적 관점의 올바름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된다. 비록 그 용어가 전적으로 이 경우에 합치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비과학적 태도를 앞세워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을 경계한다는 면에서 우리 상황에 유효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엄밀성을 그 용어가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류와 지류를 혼동하고 본원적인 문제와 지엽적인 문제를 혼용하는 무의식적이거나 모호한 태도를 경책하는 필요충분한 도구로 삼을 수 있다.

 

지엽적인 문제를 본원적인 문제해결방식에 따라 접근할 경우 전부 그렇지는 않더라도 극단적으로 갈라서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공산주의에 찬성하는 일로 단정하고 무섭게 단죄하던 때도 우리에겐 있었다. 오랜 시절 우스개 소리에 담은 ‘막걸리 보안법’이 그랬고,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일군의 사람들을 좌익으로 매도하는 일 또한 최근까지 있었다.

 

오늘 이곳은 그런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을까? 아니다. 최근 신해철의 발언에 모 정치인이 “그런 말 하려면 김정일에게나 가라”고 응수한 데서 우린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흰눈을 번뜩이는 ‘빨갱이 망령’을 보게 된다. 이 정치인처럼 특정 발언에 일일이 반응하는 양식을 앞서 언급한 내용으로 풀면 지엽적인 문제에 착근한다고 할 수 있다. 지엽적으로 접근하다보면 본류를 잃게 된다.

 

신해철의 이후 반박자료에 따르면 그 정치인은 발언의 취지라든가 그런 발언을 하게 된 배경과 그 배경의 진위를 우선 파악하지 않았다. 특정 발언을 떼어내 그것을 문제 삼고 그가 본래부터 공산주의를 동경했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를 본원적인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그를 배제하려는 하책(下策)과 같다.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불안감을 가졌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것 아닌가? 하는 등등으로 엉뚱하게 불통이 뛰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당 국회의원이 추천사를 쓴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다. 이 책은 교과서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 전체적으로 ‘기업의 사회화’ 방안과 그 실제를 하고 논하고 있다. 경제적이 이익 추구를 기업의 본래적 목표로 알았던 다수에게 경제적 이익 외에 사회적 이익이 엄연히 존재하고 사회적 이익의 추구가 공공선을 이루는 데 유효한 수단임을 설파한 점이 신선하다.

 

밸런타인데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초콜릿을 생산하는 일에 동원되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그들이 받는 턱없이 낮은 보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공정무역제품에 대한 인식 또한 제고되어 왔다. 값은 조금 비싸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노동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취지가 좋았다. 넓은 의미에서 공정무역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도 ‘기업의 사회화’ 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외에도 협동조합 운동과 아프리카에서 태동되어 관심을 끈 무이자무담보대출 등은 좋은 예다.

 

지엽적인 문제를 본원적인 문제해결기업이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아도 생존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강점이 빛난다. 글의 이해를 돕는 도판의 적절한 배치와 깔끔한 내용 정리, 지루하지 않은 기술이 그 점을 더욱 강화해준다. 이 책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본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상수 안에서 자본주의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참고할만한 다양한 변수들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 변수를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으로 나누고 그 둘을 조화롭게 다루는 기업과 후자에 주안점을 둔 각종 단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것이 이 책의 근본 취지다. 따라서 독자나 이 분야 전문가들은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안을 현실에 맞게 변형하거나 일부 아이디어를 취해 각 업태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이'와 '차별'이 같지 않듯이 '다름'이 '틀림'과 같이 쓰일 수 없다. 다른 가치에 대한 탐구와 또 다른 가치의 추구가 비록 생소하게 보일지라도 그런 가치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을 배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보다 나은 사회로의 발전은 생경하지만 의미 있는 첫걸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단초가 되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이상이 현실화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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