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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 영악한 자본주의 뒤집기
전병길.고영 지음 / 꿈꾸는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대안 세계화의 물결이 다소간 잦아든 느낌이지만 여러 갈래의 지류를 통해 그 물결이 지닌 함의가 관철되고 있음을 목도하는 일은 즐겁다. 본류와 지류의 관계는 본류가 시종 관철되는 중요한 장치로서 지류의 필요성이 인정되듯이 지류 또한 본류의 건강성을 그 먹이로 한다. 본류와 지류는 물리적 상호연쇄와 의미적 순환관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방위적인 세계화 추진의 위험성이 현실화된 현 상황은 분명 수혈이 필요할 정도의 긴급 상황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진단에 크게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예로든 수혈의 방식과 정도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담긴 함의, 그리고 그런 생각이 현실화된 예를 살펴보기 전에 앞서 언급한 본류의 문제와 지류의 문제를 목적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로 치환해서 우리 사회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생각 몇 가지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목적 또는 목표하는 바가 다를 때 구성원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기준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방법적 차이야 극복의 여지가 있지만 목적과 목표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조직 전체의 이상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이분법의 틀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없다. 목적과 목표는 그것에 뜻을 같이하는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법과 방식은 언급한 목적·목표와 차이점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전자가 구성원을 유인하는 장치라면 후자는 구성원의 결집된 의사를 근본으로 한다. 구성원의 일체화된 동의를 끌어내지 못한 방법이 실효성을 거둘지 의문이다. 조직이라는 틀 안에서 방법의 문제를 새롭게 가져가려는 지난한 노력이 잇따라야 하겠지만 동의를 끌어내지 못했다해서 조직이 사라지거나 구성원이 근본적으로 이탈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전자의 경우 일이 틀어지면 조직이탈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논란이 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실효성과 경제성이라는 지엽적인 사항이 문제가 될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우리 사회, 특히 정치계는 자주 본류 또는 목적과 목표의 문제가 아님에도 본류를 다루는 방식 또는 처방을 따라 가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보니 이합집산이 잦고 작은 일을 큰 일처럼 만들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우리 사회를 덧칠했던 '빨갱이 논쟁'도 무분별한 대응과 전혀 상관이 없지 않다. 나 또는 우리와 같은 생각이 아니면 전부 적으로 규정하고 단죄한 과거의 정치상황을 올바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편견을 배제한 정치적 관점의 올바름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된다. 비록 그 용어가 전적으로 이 경우에 합치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비과학적 태도를 앞세워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을 경계한다는 면에서 우리 상황에 유효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엄밀성을 그 용어가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류와 지류를 혼동하고 본원적인 문제와 지엽적인 문제를 혼용하는 무의식적이거나 모호한 태도를 경책하는 필요충분한 도구로 삼을 수 있다.
지엽적인 문제를 본원적인 문제해결방식에 따라 접근할 경우 전부 그렇지는 않더라도 극단적으로 갈라서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공산주의에 찬성하는 일로 단정하고 무섭게 단죄하던 때도 우리에겐 있었다. 오랜 시절 우스개 소리에 담은 ‘막걸리 보안법’이 그랬고,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일군의 사람들을 좌익으로 매도하는 일 또한 최근까지 있었다.
오늘 이곳은 그런 문제를 갖고 있지 않을까? 아니다. 최근 신해철의 발언에 모 정치인이 “그런 말 하려면 김정일에게나 가라”고 응수한 데서 우린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흰눈을 번뜩이는 ‘빨갱이 망령’을 보게 된다. 이 정치인처럼 특정 발언에 일일이 반응하는 양식을 앞서 언급한 내용으로 풀면 지엽적인 문제에 착근한다고 할 수 있다. 지엽적으로 접근하다보면 본류를 잃게 된다.
신해철의 이후 반박자료에 따르면 그 정치인은 발언의 취지라든가 그런 발언을 하게 된 배경과 그 배경의 진위를 우선 파악하지 않았다. 특정 발언을 떼어내 그것을 문제 삼고 그가 본래부터 공산주의를 동경했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를 본원적인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그를 배제하려는 하책(下策)과 같다.
이 책에 대해서도 같은 불안감을 가졌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것 아닌가? 하는 등등으로 엉뚱하게 불통이 뛰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당 국회의원이 추천사를 쓴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다. 이 책은 교과서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 전체적으로 ‘기업의 사회화’ 방안과 그 실제를 하고 논하고 있다. 경제적이 이익 추구를 기업의 본래적 목표로 알았던 다수에게 경제적 이익 외에 사회적 이익이 엄연히 존재하고 사회적 이익의 추구가 공공선을 이루는 데 유효한 수단임을 설파한 점이 신선하다.
밸런타인데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초콜릿을 생산하는 일에 동원되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그들이 받는 턱없이 낮은 보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공정무역제품에 대한 인식 또한 제고되어 왔다. 값은 조금 비싸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노동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취지가 좋았다. 넓은 의미에서 공정무역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도 ‘기업의 사회화’ 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외에도 협동조합 운동과 아프리카에서 태동되어 관심을 끈 무이자무담보대출 등은 좋은 예다.
지엽적인 문제를 본원적인 문제해결기업이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아도 생존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강점이 빛난다. 글의 이해를 돕는 도판의 적절한 배치와 깔끔한 내용 정리, 지루하지 않은 기술이 그 점을 더욱 강화해준다. 이 책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본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상수 안에서 자본주의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참고할만한 다양한 변수들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 변수를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으로 나누고 그 둘을 조화롭게 다루는 기업과 후자에 주안점을 둔 각종 단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것이 이 책의 근본 취지다. 따라서 독자나 이 분야 전문가들은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안을 현실에 맞게 변형하거나 일부 아이디어를 취해 각 업태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이'와 '차별'이 같지 않듯이 '다름'이 '틀림'과 같이 쓰일 수 없다. 다른 가치에 대한 탐구와 또 다른 가치의 추구가 비록 생소하게 보일지라도 그런 가치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것을 배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보다 나은 사회로의 발전은 생경하지만 의미 있는 첫걸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단초가 되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이상이 현실화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