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삶 김우현의 팔복 시리즈 3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말이 어눌하고 몸마저 부실하다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실마저 가릴 순 없다.




나이 탓일까?
요즘 들어 특히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올라오는 격정을 삼키는 일이 잦다.
다큐멘터리와 수필에 촘촘히 박힌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또 읽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목젖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대목이 나올 쯤 되면 우선 준비부터 하고 본다.

글은 기승전결이 있기 마련이라 어느 부분에서 심금을 울릴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 직전에 마른 침 한번 크게 삼키고 눈을 보통 때보다 조금 더 부릅뜨면 된다.
희한하게도 그런 장면이나 대목이 나올 때면 곁에 누군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눈물을 보이거나 잠시 말을 잊지 못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면 낭패다.

하지만 준비한 대로 잘 넘어간 적은 없다.
헛기침으로 시선을 돌리긴 했어도 목젖까지 올라온 놈을 누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때론 헛기침이 괜한 주목을 끌어 붉게 충혈된 눈을 보였을 수도 있다.
감정이 복받쳐 울컥 하고 올라온 그걸 아예 없던 일로 잘 틀어막았단 소리를 들은 적 아직 없다.

통제되기 않는 감정기제 앞에 이성은 그저 무기력하기만 한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화문에서 액자와 부채 등 잡동사니를 좌판에 널어 파는 정재완 씨와
그를 ‘늘 광화문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친구, 허허로운 시간을 때워줄 친구로 20년을 알고지낸 김우현 감독 때문이다.
정재완 씨는 어릴 적 병치레로 손이 곱았다. 걸음도 힘들고 표정도 남다르다.

그를 주인공 삼아 영화를 만들기로 한 날 정재완 씨가 김우현 감독에게 출연료로 얼마 줄 거냐고 물었다.
다음은 그 이야기의 전문이다.

“넌 ... 얼마 받고 싶은데?”
“한 백 억 정도는 받고야 말테다.”
"형, 장동건, 이병헌 보다 더 많이 받을 거야?”
도현이가 곁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도현이도 영화를 만들면 음악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반드시 백억은 받아야 해!”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인상까지 쓰면서 난리다.
“우리의 영화는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겠군.”
“이 영화의 출연료는 너 한테 안 받고 하나님께 받겠다는 말이야.”
우리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감동했다.
“어이! 친구 ... 그런 거였어? 역시 우리 영화사 대표 배우답다.”
“우리 영화는 하나님이 제작자이시니까 하늘에서 상급을 받아야 해.”
재완이는 가끔 이런 예상치 못한 멘트로 나를 감동시킨다.

입이 걸걸하고 때론 고집불통인 재완씨가 출연료로 백억을 받겠다고 하는 말은 억지였다.
영화사라고 해봐야 김우현 감독이 제작자 겸 감독, 편집자로 1인 3역을 하는 말이 좋지 보잘 것 없는 1인 영화사다.
제작비가 넉넉할 리 없고 배우 출연료를 줄 입장도 아니다.
그걸 잘 아는 재완씨가 생각지도 않은 출연료를 부르니 하도 어이없었을 게다.
농담으로 그런 줄 알았다 고집스런 요구가 진짜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당혹감이라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몹쓸 뻔했다.

말투가 어눌하고 표정이 남 답지 않고 몸가짐이 껄렁껄렁하다고 사람 속마저 그러리라고 예단해선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꼴값(얼굴값) 안 하니 제대로 안다. 깊다. 정확하다. 
                                    
 
김우현 감독은 〈부흥의 여정〉과 〈하늘의 언어〉, 〈하나님의 이끄심〉 등 성령체험과 성령의 역사를 담은 저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영상물에서 비롯됐다.
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최춘선 옹이다.

김우현 감독은 그를 장장 7년을 좇아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고루 담았다.
그런 노력이 영상에 담겨 마침내 최춘선 옹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났다.
그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은 신앙인이자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려 바삐 걸었던 복음 전도인이었다.

이력도 화려했다.
일본 유학을 하고 5개 국어를 너끈히 소화했으며 독립 운동가였다.
더욱이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자신에게 속한 부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고 스스로 신발조차 신지 않을 만큼 가난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일반인들은 그를 맨발로 지하철 구석구석을 쏘다니는 광인(狂人)으로 이해했었다.
그만큼 김우현 감독의 안목은 여느 사람과 달랐다는 얘기다.
그러했기에 최춘선 옹을 7년을 따랐고 오늘 정재완 씨를 20년 동안 만나고 있을 터였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은 사람을 ‘본래’ 사랑하지 않고는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랬듯 비천한 곳에서 비천한 몰골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발 다가서는 일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상한 행동은 둘째 치고 색다른 냄새부터 처리하기가 난감하다. 
                                                                
 

20년 쯤 됐다.
학생회에서 몸이 불편한 아동을 보육하는 소망원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다.
봉사한다는 마음에 발걸음이 상쾌했던 날.
걱정이라곤 잘 해낼 수 있을까가 전부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고작 네다섯 시간 정도로 예정된 봉사였으니 그까짓 힘든 것쯤 참아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곳 상황은 전혀 몰랐으므로 그 외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몹시 괴로웠다.
뒤틀린 그들의 몸 때문이었거나 그런 그들의 상태가 나의 마음을 아리게 했기 때문 이 아니었다.
참기 힘든 냄새, 방 안 곳곳에서 풍겨 나오는 형용할 수 없이 고약한 냄새를 참아낼 도리가 없었다.
배정받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밥을 먹이는 걸 가까스로 꼬박 의무감으로 버텼다.
비례해서 흘끗흘끗 시간 쳐다보는 일이 늘어갔다.

나오긴 했다.
그것도 중요한 약속을 깜빡했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한동안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같은 부류와 섞이길 좋아하는 심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과 ‘거리두기’와 ‘편가르기’는 일상적이 되기 쉽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이 책,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정재완 씨를 직접 발로 찾은 기록이다.
여느 기록과 다른 점은 한 사람을 더도 덜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사정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낸 데 있다.
그것이 예기치 않은 진한 감동과 자주 마주치는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몸으로 가르친 것만 남는다’고 일갈한 분이 있다.
말이 어눌하고 몸마저 부실하다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실마저 가릴 순 없다.
누구나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한 분 그리스도를 만나 보다 아름다워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향긋하며 자주 도전적이다.
정재완 씨가 보여준 사랑의 시어와 행동이 더욱 그리스도로 풍부해지는 걸 보는 데서 우리 마음을 다잡지 않을 수 없다.
‘무엇하고 사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끌림〉 :

자신의 폐부를 옅게 찌르는 성찰과

정한 기간과 목적지 없는 주유(周遊),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여민 애정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

 

여행지의 정경과 소회를 담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전 그 힘을, 여행지의 정경이 바쁜 일상에서 놓여난 듯 한 대리만족을 준다면

소회는 가슴에 쌓아둔 응어리를 꺼내놓은 '더도 덜도 말고 내 얘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직접 가진 못해도 저자와 함께 산을 오르고 들을 거니는 것 같이

생동감 넘친 글을 만나는 일에서야 그 글에 대한 내남의 평가에 높낮이가 있을 리 없고,

더욱이 그 글이 가슴에 직접 와 닿는 글임에야 켜켜이 두른 마음의 장벽이 무장해제 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 또한 전혀 없을 겁니다.

그 탓에 아예 책을 들고 여행지를 향해 짐을 싸기도 하고 일상을 뒤로하고 호젓한 산길을 거듭 거니는 것이겠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몸과 마음에 공히 작동할 때 느끼는 감동으론 사진과 활자가 공교하게 얽힌 글편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 글이 지닌 감성에 날개를 달아준 〈끌림〉은 책의 제목이 아니어도 끌릴 만합니다.

 

저자 이병률은 등단 시인입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었고,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표지 안쪽에 실린 다소 병적으로 보이는 그의 사진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 여러 곳에 그가 나눈 낯선 사랑과 죽음 근처에 이른 가난한 초상이 새겨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폐부를 옅게 찌르는 성찰과 정한 기간과 목적지 없는 주유(周遊),

상처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여민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덥석 베어 문 탓에 옥수수 행상을 하는 청년도 그도 잔돈이 없어 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역으로 가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다 잡지 못한 시인은

거스름돈을 챙겨 자리로 돌아와 청년에게 그 돈을 건넵니다.

며칠 후 시인은 우연히 마주친 그 청년이 가는 길에 먹으라고 옥수수 두 개를 담은 봉지를 건네자 사라는 줄 알고 지갑을 꺼내듭니다.

무안해진 시인은 자신을 나무라며

행상을 만나면 ‘언제든 두 개를 사서 그 중 하나를 건네야 한다’고, ‘그러는 게 맞다’는 말로 갈무리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채근하는 성찰을 만난 대목입니다.

 

서너 달 전에 받은 편지를 따라 이집트로 날아간 시인이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편지 주인공이 오라던 곳에서 그와 조우할 수 없음을 알고도 아쉬워하는 장면이나

그와 동행하지 않고는 피라미드를 감각적으로 감상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도 비싼 택시값을 치른 채 역시나 감흥 없는 피라미드를 본 것이나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즉시 이역만리 페루로 방향을 틀은 것에서

'생의 마지막을 사르기 위해 여행지를 떠도는 남루한 시인'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리의 밤에 찾아든 숙소에서 ‘다음 사람에게’라고 수신처를 정성스럽게 적은 선물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섣불리 뜯지 못합니다.

다음 날 숙소 주인을 만나고서야 선물의 유례를 전해들은 시인은

그 방에 묵을 다음 사람을 위해 배고프지 말라고 파스타 묶음을 선물로 준비합니다.

이 부분에선 시인의 눈에 고인 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미인이지만 매력은 그닥 없는 한 여성과 메마르게 살을 섞고 또한 건조하게 헤어지는 장면에선

그가 다다른 애정의 깊이와 저변을 쉽게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작품이 널리 읽히는 이유가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딱히 ‘이것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

다다를 만하면 저만치 물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가없는 심연,

침울하지 않은 슬픔 같은 것.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여백이 많다는 의미와도 통하지 싶습니다.

그렇다고 휑하게 찬바람 불거나 후텁지근하지 않은 여백은 아닙니다. 한두 번쯤 발 편히 뻗고 쉬었다 가도 좋을 여백이라고 말해두고 싶습니다.

 

 

사족

 

여행기의 맛을 몇 번 본 후론 나름대로 정한 ‘읽어야 할 목록의 책’을 밀치는 일이 보다 수월해 졌습니다.

사정이 그렇다고는 해도 읽어야 할 책이 쌓여있다는 부담감을 버리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큰 맘 먹어야 그런 일을 감행할 수 있나 봅니다.

 

이번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제학 서적을 읽는 속도와 그것에 비례해서 양마저 현저히 떨어진 요 며칠 동안

책을 손에 쥐고만 있거나 눈 가까이 두는 일로 위안 아닌 위안을 삼는 일이 잦았습니다.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마치 남 주기엔 아깝고 내 곁에 두기엔 그저 그런 애인처럼 읽긴 읽어야 하는데 싹 잘 읽히진 않는 배반의 흐름이 벽처럼 막아선 꼭 그런.

 

이 책으로 그 벽에서 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노을빛 기슭에서’ 잘 놀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살이가 힘겹거든 잠시 쉬어가도 좋겠지요.

동행이 있으면 더 좋겠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이해해 줄 책 한 권이 손에 들린다면 적잖이 위로가 될 겁니다.

 

 

어느 때고 여행 한 번 떠나보자고 크게 결심할 때가 있습니다.

굳이 ‘크게’ 라는 부사를 결심 앞에 붙인 건 여행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데 있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면 왜 여태 이 좋은 걸 못했나 싶은 게 여행의 참맛인데요.

여행 맛이 들어도 또 다시 그걸 결행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여행 갈 마음을 먹으면 치이는 게 또 얼마나 많던가요?

남겨 질 아이들 걱정에 데려가려고 하면 턱턱 걸리는 게 일정이고,

간신히 직장에 말미를 얻어 놨다 해도 혹여 나로 인해 고생할 직원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지요.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이런 저런 생각에 치이다 보면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자는 말이 뱃속에서 스멀거리지요.

‘그래 아예 잘 됐어’ 하고 여행가지 않기로 한 결심을 대견해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마저 생기는 게 우리네 일상다반사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와 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요.

어느 부부가 집 팔아 세계여행을 다닌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네들이 낸 책이 제법 팔리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들이 주목을 받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부 관계가 소원했었나 봅니다.

돌파구가 필요한 던 게지요.

기억이 맞다면 아내가 먼저 짐 싸들고 집을 나섰더랍니다.

다시는 안 볼 요량으로 목적지도 안 알리고 떠났다지요.

몇몇 나라를 휘돌다 인도에선가 편지를 썼다네요.

편지를 받은 남편이 득달같이 날아갔답니다.

반 년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가졌겠지요.

크게 틀어질 뻔 한 관계가 회복된 건 물론이고요. 서로 주고받은 상처 또한 말끔히 씼겼다네요.

 

집 팔고 떠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집값 전부는 아니어도 인세가 제법 쌓였고요.

삶에 대한 의지도 몰라보게 솟구치더랍니다.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 보다 열심히 사느라 돈도 제법 모았겠지요.

무엇 주고도 살 수 없는 부부의 정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으니 뭐 다른 게 필요 있었을까,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뜨끈해졌습니다.

 

이 책 저자도 그랬다는군요.

부부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니고요.

집 팔아 여행에 나섰답니다.

유난히 겁이 많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저자는 여행을 통해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그가 살면서 제일 잘 한 것 두 가지를 꼽았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집 팔고 떠난 여행이랍니다. 참고로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을 받은 것이고요.

그의 여행 궤적을 따라 가보면 여행이 자기 치료의 과정이었음을 짐작하게 되는데요.

그건 작가인 그가 여행기를 쓰지 않으리라 결심한 여정에서

다름 아닌 자신의 과거를 깊게 돌아본 데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아기 때 형성된 자아가 실은 부모,
그에게선 특히 어머니의 영향이 지배적으로 작용한 ‘내면 아이’ 또는 ‘어른 아이’였음을 알아차리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그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느낀 감정과 과거 심리학서적을 탐독하며 쌓은 지식들이 덩어리져

그런 현실과 엮이더라는 고백에 이르면 남의 말 같이 들리지 않더군요.

그가 인용한 그 자신의 내면 아이가 실은 내 안에도 도사리고 있었음을 깨닫는 이유도

이 책이 지닌 ‘솔직한 자기 성찰’에 무게중심이 올려져있기 때문일 겁니다.

 

며칠 전부터 아내와 틀어져 있던 전 아내를 이해해주지 못한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자상함을 자주 내비치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이라 하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내를 몰아붙인 어제 일이 문득 생각이 났고요.

그런 저런 내 내면 아이가 이와 같은 책을 통해서든, 그것이 밖으로 나와 크게 터지는 과정에서든 여실히 드러나야

언제고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쯤이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크게 맞장구치는 생각 하나가 들곤 하는데요.

“지식아란 게 그렇더라”는 씁쓸함 같은 겁니다.

‘아는 지식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그 지식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도 하고,

’안다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이더냐!‘는 자못 의미심장한 말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요.

아마도 여행기도 아니면서 심리학 서적도 아닌 이 책이 사람 마음을 은근슬쩍 건드리는 묘한 구석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공감이 가능하게 말하면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독자가 쉽게 경계를 지울 수 없는 통에 저자의 의도에 말려드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많은 걸 보고 들은 사람도 실제 겪은 사람을 당하진 못하겠지요.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던 저자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상황에 자주 발길이 채여 넘어졌으리란 건

이 책을 조금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겝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조금 다른 행동과 그들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

그리고 그들이 남긴 뒷이야기와 느낌들이 아롱져 저자의 내면을 타고 깊이 흐르는 걸 알아채는 순간

“어어” 하며 한 발 물러서게 될 겁니다.

 

그런 행동은 경계의 표시지요.

속마음을 들킨 데서 온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곤 좀 더 살피게 되겠지요. ‘무슨 말을 하나?’ 하고요.

그리곤 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걸 잊어버리지요. 정확히 표현하면 더 이상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리만치 너무도 생생한 내 얘기더라는 공감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더 이상한 건 그런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더란 거죠.

그냥 젖게 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냥 그렇게 말이죠.

 

읽어야 할 경제 관련 서적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는데 이 책 읽는 게 아깝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한두 편 읽다보니 그새 만쯤 읽었더군요.

공감 한 표, 공감 두 표 하는 식으로 책장을 넘긴 게 그렇게 쌓였고 반대로 시간은 보통 책의 한 배 반이 걸렸습니다.

저자를 통해 옛날의 내 모습을 자주 마주보았던 탓입니다.

말을 걸 순 없었지만 ’그랬구나, 그랬어‘ 하고 다독거려 줄 순 있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이 책을 비껴서 있습니다.

생각의 끈을 좀 더 이어가자는 생각에서고요.

늘 일삼던 버릇처럼 야금야금 읽어가려는 요량 때문입니다.

아픈 상처 쯤 하나 둘씩 안 갖고 있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런 아픔을 꺼내놓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놀랍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참 행복한 경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속 깊이 공명하는 그의 이야기가

오늘 힘겨운 날을 나고 있는 세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듭 추천합니다.

위로는 상대방이 답을 줘서가 아니라

내 속사정에 공감한 데서 오는 걸 잘 알려준 이 책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시민의 〈대한민국개조론〉: 사람이 희망인 민주적 리더십의 회복 선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장 제1조다. 국민은 권력의 창설자다. 따라서 여하한 권력도 국민의 승인이 없는 한 민주공화국 내에서 합법성을 지니지 못한다.




더욱이 현대헌법은 국민이 불법적 국가권력을 실력행사로 저지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으며 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헌법에 저항권이 내재되어 있다고 봄이 통설이다. 그만큼 권력의 창설자로서의 국민의 지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이 책,〈대한민국개조론〉의 저자는 남명 조식의 단성소(丹城疏)를 서문에 인용함으로써 우리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55년 남명 조식은 단성현감 자리를 제수 받는다. 그 때는 12세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섭정한지 10년이 흐른 때였다. 파평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연이어 사화를 일으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살벌한 시대였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남명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당시 최고 권력자인 문정왕후를 과부로, 임금을 고아로 표현하고 있다. 이쯤 되면 목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어 남명은 어린 임금이 학문에 힘을 쓰고 인재를 두루 등용하여 선정을 베풀기를 간곡히 간청한 후 그때가 되면 미관말직이라도 관직에 나가겠다는 말로 단성소를 끝맺고 있다.




왕과 견해가 다를 때 거침없이 직언하는 풍토가 살아있던 시대. 그 시대는 적어도 초야의 선비가 군주에게 직언하는 것을 처벌하면 언로를 막아 국사를 위태롭게 한다고 진언한 용기 있는 언관들이 살아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덕택에 남명은 죽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다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시대는 1987년에 끝났다.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을 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방송을 장악한 데 이어 당연한 귀결로 관제보도가 횡행하고, 정부공식발표 외 모든 통신을 유언비리로 규정하고 처단하겠다고 나선 토목정권과 그 하수인들에게 과연 조선시대만큼의 언로개념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을 남명을 따라 오늘날 왕인 국민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먼저 이 책의 쓴소리를 들어야 할 이들이 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무단방기하고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는 현 정권과 그 하수인들이 그들이다.




1997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은 출간시기로만 따지면 벌써 구시대의 소리로 치부되어야 마땅하다. 1년이 다르게 변화되는 세상에서 3년이나 지난 말은 우선 설득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재탕한다면 쓸데없는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




진보가 계속되는 한 과거의 말은 과거의 임무를 끝내고 잠드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요즘 구시대 유물이 현 장권에 의해 자주 출토 또는 재생되는 통에 과거의 일로 잊혔던 쓴소리가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책은 16개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꼭지의 소제목만으로도 그 시기의 굵직한 이슈를 들여다볼 수 있어 전부 인용한다. 이렇다.




성공한 나라, 불행한 국민

선진통상국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

사회투자국가, 지구촌 경쟁에서 이기는 전략

비전 2030, 사람이 희망이다.

대한민국, 진화는 계속된다.

전통적 복지정책과 사회투자정책

사회 서비스 시장과 일자리 창출

책임성 없는 진보, 일관성 없는 보수

의료급여제도 혁신

약제비 적정화와 한미 FTA

건강투자정책

파랑새 플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국립서울병원

시한폭탄 국민연금

공적개발원조

민주적 리더십




제목만 일별해도 촌철살인이 느껴질 정도로 1997년, 그리고 오늘 우리 현실을 가늠하는 주요 화두로 손색이 없다. 씁쓸한 화두이기도 하다. 전혀 앞서가지 못한 우리 현실. 우리가 선택한 정권이니 그 대가마저 우리의 몫이라면 할 말은 없다. 권력획득의 원천이 국민투표라는 데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해서 정권이 권력의 창설자인 국민에 대한 봉사와 국민을 위한 국정운영이라는 행정적, 법적 행위마저 정당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6.2 지방선거가 국민이 결코 준 적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태클을 걸 호기이며, 멀게는 2012년 대선에서 결정적 퇴장명령을 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우리가 ‘불행한 국민’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권이며 ‘민주적 리더십’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아울러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이 희망’인 ‘파랑새 플랜’이 시동을 거는 시초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태교동화
오선화 글, 김은혜 그림 / 강같은평화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성경태교동화》: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포근한 감성의 동화

                                              - 태아는 물론 어른에게도 좋은 동화 -

 

90년대 초반 ‘모차르트 이펙트’라는 말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모차르트 이펙트’는 항간에 소리와 음악에 관한 인간의 선천적인 청각능력을 개발하면 창의성과 학습효과를 높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EQ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때라 정서를 고양하고 태교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발매회사의 광고카피는 파급효과가 대단해서 고객들을 연일 레코드점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레코드점은 모차르트 음악 CD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CD는 레코드점에 갖다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태교 음악으로 클래식을 들은 산모의 자녀가 건강하고 정서적으로 더 안정됐다는 심리학자들의 보고가 이어지자 임산부들까지 클래식 CD 사재기에 앞 다퉈 나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회는 모자르트 열풍에 휩싸였다. 이후 효과성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모차르트 이펙트’는 차츰 잊혀져갔다. 그렇다고 태교에 대한 관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태교는 태교음식, 태교동요, 태교운동, 태교동화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빠르게 시장을 확대해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관련 자료에 관한 콘텐츠가 성경에 많음에도 여태까지 이렇다 할 성경태교서적 하나 제대로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경은 그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또한 인물들을 장단점에 따라 선별하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 곳곳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건들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순도 높은 노하우를 손쉽게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추구할 바와 장래계획에 관해 그들이 선택한 것을 유심히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추구와 계획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사전에 검증해 볼 수 있다. 더욱이 가정과 직장 또는 그 외 조직생활에 필요한 신의와 성실, 그리고 우애 등의 덕목의 완전한 형식과 내용인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가깝게 마주할 수 있다.




태교에 흐르는 원초적인 형식이 사랑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그 완전체인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무조건적이라고 해도 죄 없는 자기 아들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내준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사람에게 불어넣기를 좋아하셨다. 죄로 인해 사람 안에 심겨진 사랑이 희석되고 그만큼 희미해졌지만 그럼에도 그 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근본 뿌리가 되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길이 닫히지 않는 것이다.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둘씩 알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마치 야곱의 맹목적인 사랑, 요셉의 너그러운 사랑, 모세의 웅대한 사랑, 리브가의 애틋한 사랑 등으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이 책 《성경태교동화》의 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사람 안에 얼마나 아름답게 수놓았는지를 섬섬옥수로 자상하고 온화하게 형상화해 놓았다. 이미 저자는 〈영재태교동화〉를 썼을 정도로 태교동화에 관한 한 검증받은 작가다. 베다니교회의 태아교육 사역팀장 및 영아부교사로 다년간 태교에 헌신한 저자는 임산부와 영아를 섬기는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을 여성의 섬세한 감각과 부드러운 눈매에 담아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총 25편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남다른 점이 있다. 읽다보면 어느새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포근한 감성에 젖어들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연신 보채는 눈망울로 할머니를 응시하는 어린아이가 떠오른다. 물론 어린아이는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이다. 책을 읽으며 잠시라도 아이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당시 심정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경이를 이 책이 선사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는 곧 저자가 구체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글로 엮은 저자의 솜씨가 결합돼 익히 들은 이야기마저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한 결과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태교동화의 같은 점은 화자가 무한한 사랑으로 청자를 대한다는 데 있다. 화자와 청자의 그와 같은 관계는 근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청자는 어떤 이야기든 들을 준비가 돼 있으며 화자는 청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이때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이야기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야기는 상호의 친밀감 확대를 넘어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가 된다. 가정을 사회의 최소한으로 정의할 때 그것이 가정의 중요성을 내포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야기가 가정의 사회성을 증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동화를 통해 우리 아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선다는 것은 크게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는 이후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식을 부추기고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을 재생산하는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귀한 자녀로 자라나는 데 성경동화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




둘째, 할머니의 이야기와 태교동화는 그 이야기에 각각 교훈이 들어있다. 본질적으로 교훈은 이야기 자체에 심겨져 있기도 하지만 화자가 청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바가 담겨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은 화자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한데, 그것은 청자의 입장이나 수용능력을 어느 선에 두느냐와 관련이 있다. 결국 교훈의 각색은 오롯이 화자의 몫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성경태교동화》를 할머니 무릎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운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할머니의 손자사랑에 버금가는 애정으로 거듭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저자는 특히 성경동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녹아있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건강에 필요한 ‘약’이 되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각각의 이야기 속에 담긴 성경적 교훈을 자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베다니교회에서 태아교육팀장을 맡고 있는 교사로서 저자는 성경동화가 아이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침을 임상적으로 잘 알고 있을 터다. 아마도 그와 같은 임상 경험이 저자를 성경에 관한 한 드문 이야기꾼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부분 엄마 손에 폭 잠기는 포근한 느낌처럼 귓전을 울리고 봄볕처럼 포근하게 가슴에 아련하게 포말을 일으킨다. 




아울러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 주변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해 지면에 불러냄으로써 각각의 인물들을 살아 숨쉬는 동시대인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그것이 《성경태교동화》의 인물들을 마치 눈앞에서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독자가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선택에 함께 공명하는 기회를 부여하는 주요인일 것이다. 태아 또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가 궁금증이 너무 들어 ‘세상 밖으로 나가면 물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 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태아시절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태아에게는 어떤 세상이야기보다 사랑과 소망이 가득한 성경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좋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이야기는 그 안에 경쟁의식 고양, 상하관계 조장, 상승욕구 과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모가 세상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반대의 의미로 아이에게 전달될 개연성이 높다. 부모가 이야기와 달리 나누고 다소 손해 보는 듯 살아서는 안 되는 세상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다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그칠 뿐 아이의 삶 속에 공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은 화자의 이야기에 대한 긍정적 동의와 청자의 공감이 결합될 때 증폭된다. 저자가 각각의 이야기 말미에 엄마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 당부의 말에는 태어날 아이가 꼭 기억해주길 바라는 엄마의 심정이 깊이 담겨있다. “어때, 요한은 정말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이지? 엄마 아빠도 우리 아가한테 많은 사랑을 줄 거야.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정말 많이 사랑하도록 노력할게. 그러니까 우리 아가도 버럭버럭 화내는 사람보다는 신중한 사람이 되어야 해. 요한처럼 보아너게(천둥의 아들이란 뜻)라고 불리면 안 되잖아. 엄마 아빠도 너에게 천둥보다는 구름이 되도록 노력할게.” 이런 말을 들고 자란 아이가 건강한 품성과 곧은 심성을 갖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세상은 태아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종 매체를 이용해 빠르게 부모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태교동화에서부터 태교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교육기자재 개발에 앞 다퉈 나서고 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태교동화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성경 관련 동화의 수 또한 크게 낫지 않다. 이는 성경교육 전반에 대한 인식이 세상의 그것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태아 및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실질적으로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84 2010-05-1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