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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살이가 힘겹거든 잠시 쉬어가도 좋겠지요.
동행이 있으면 더 좋겠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이해해 줄 책 한 권이 손에 들린다면 적잖이 위로가 될 겁니다.
어느 때고 여행 한 번 떠나보자고 크게 결심할 때가 있습니다.
굳이 ‘크게’ 라는 부사를 결심 앞에 붙인 건 여행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데 있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면 왜 여태 이 좋은 걸 못했나 싶은 게 여행의 참맛인데요.
여행 맛이 들어도 또 다시 그걸 결행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여행 갈 마음을 먹으면 치이는 게 또 얼마나 많던가요?
남겨 질 아이들 걱정에 데려가려고 하면 턱턱 걸리는 게 일정이고,
간신히 직장에 말미를 얻어 놨다 해도 혹여 나로 인해 고생할 직원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지요.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이런 저런 생각에 치이다 보면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자는 말이 뱃속에서 스멀거리지요.
‘그래 아예 잘 됐어’ 하고 여행가지 않기로 한 결심을 대견해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마저 생기는 게 우리네 일상다반사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와 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요.
어느 부부가 집 팔아 세계여행을 다닌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네들이 낸 책이 제법 팔리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들이 주목을 받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부 관계가 소원했었나 봅니다.
돌파구가 필요한 던 게지요.
기억이 맞다면 아내가 먼저 짐 싸들고 집을 나섰더랍니다.
다시는 안 볼 요량으로 목적지도 안 알리고 떠났다지요.
몇몇 나라를 휘돌다 인도에선가 편지를 썼다네요.
편지를 받은 남편이 득달같이 날아갔답니다.
반 년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가졌겠지요.
크게 틀어질 뻔 한 관계가 회복된 건 물론이고요. 서로 주고받은 상처 또한 말끔히 씼겼다네요.
집 팔고 떠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집값 전부는 아니어도 인세가 제법 쌓였고요.
삶에 대한 의지도 몰라보게 솟구치더랍니다.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 보다 열심히 사느라 돈도 제법 모았겠지요.
무엇 주고도 살 수 없는 부부의 정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으니 뭐 다른 게 필요 있었을까,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뜨끈해졌습니다.
이 책 저자도 그랬다는군요.
부부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니고요.
집 팔아 여행에 나섰답니다.
유난히 겁이 많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저자는 여행을 통해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그가 살면서 제일 잘 한 것 두 가지를 꼽았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집 팔고 떠난 여행이랍니다. 참고로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을 받은 것이고요.
그의 여행 궤적을 따라 가보면 여행이 자기 치료의 과정이었음을 짐작하게 되는데요.
그건 작가인 그가 여행기를 쓰지 않으리라 결심한 여정에서
다름 아닌 자신의 과거를 깊게 돌아본 데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아기 때 형성된 자아가 실은 부모,
그에게선 특히 어머니의 영향이 지배적으로 작용한 ‘내면 아이’ 또는 ‘어른 아이’였음을 알아차리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그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느낀 감정과 과거 심리학서적을 탐독하며 쌓은 지식들이 덩어리져
그런 현실과 엮이더라는 고백에 이르면 남의 말 같이 들리지 않더군요.
그가 인용한 그 자신의 내면 아이가 실은 내 안에도 도사리고 있었음을 깨닫는 이유도
이 책이 지닌 ‘솔직한 자기 성찰’에 무게중심이 올려져있기 때문일 겁니다.
며칠 전부터 아내와 틀어져 있던 전 아내를 이해해주지 못한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자상함을 자주 내비치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이라 하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내를 몰아붙인 어제 일이 문득 생각이 났고요.
그런 저런 내 내면 아이가 이와 같은 책을 통해서든, 그것이 밖으로 나와 크게 터지는 과정에서든 여실히 드러나야
언제고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쯤이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크게 맞장구치는 생각 하나가 들곤 하는데요.
“지식아란 게 그렇더라”는 씁쓸함 같은 겁니다.
‘아는 지식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그 지식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도 하고,
’안다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이더냐!‘는 자못 의미심장한 말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요.
아마도 여행기도 아니면서 심리학 서적도 아닌 이 책이 사람 마음을 은근슬쩍 건드리는 묘한 구석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공감이 가능하게 말하면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독자가 쉽게 경계를 지울 수 없는 통에 저자의 의도에 말려드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많은 걸 보고 들은 사람도 실제 겪은 사람을 당하진 못하겠지요.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던 저자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상황에 자주 발길이 채여 넘어졌으리란 건
이 책을 조금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겝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조금 다른 행동과 그들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
그리고 그들이 남긴 뒷이야기와 느낌들이 아롱져 저자의 내면을 타고 깊이 흐르는 걸 알아채는 순간
“어어” 하며 한 발 물러서게 될 겁니다.
그런 행동은 경계의 표시지요.
속마음을 들킨 데서 온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곤 좀 더 살피게 되겠지요. ‘무슨 말을 하나?’ 하고요.
그리곤 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걸 잊어버리지요. 정확히 표현하면 더 이상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리만치 너무도 생생한 내 얘기더라는 공감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더 이상한 건 그런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더란 거죠.
그냥 젖게 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냥 그렇게 말이죠.
읽어야 할 경제 관련 서적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는데 이 책 읽는 게 아깝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한두 편 읽다보니 그새 만쯤 읽었더군요.
공감 한 표, 공감 두 표 하는 식으로 책장을 넘긴 게 그렇게 쌓였고 반대로 시간은 보통 책의 한 배 반이 걸렸습니다.
저자를 통해 옛날의 내 모습을 자주 마주보았던 탓입니다.
말을 걸 순 없었지만 ’그랬구나, 그랬어‘ 하고 다독거려 줄 순 있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이 책을 비껴서 있습니다.
생각의 끈을 좀 더 이어가자는 생각에서고요.
늘 일삼던 버릇처럼 야금야금 읽어가려는 요량 때문입니다.
아픈 상처 쯤 하나 둘씩 안 갖고 있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런 아픔을 꺼내놓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놀랍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참 행복한 경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속 깊이 공명하는 그의 이야기가
오늘 힘겨운 날을 나고 있는 세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듭 추천합니다.
위로는 상대방이 답을 줘서가 아니라
내 속사정에 공감한 데서 오는 걸 잘 알려준 이 책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