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 - 별난 화가에게 바치는 별난 그림에세이
카트린 뫼리스 글.그림, 김용채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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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인생은 희망이 없다, 꿈이 없다, 활기가 없다, 열정이 없다, 광기가 없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라고 지시하는 것은 꽤나 지능적인 고문이다. 조금이라도 튀게 되면 바로 구설수에 오르고, 남들과 조금 다른 면을 보이면 바로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을 당하니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자꾸 가면 뒤로 감추고 얼굴빛을 읽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본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모두 똑같은 연극을 한다. 기뻐도 크게 웃지 않고, 슬퍼도 엉엉 울지 않고, 화가 나도 안 난 척, 분해도 그렇지 않은 척, 그래야 어디서든 모나지 않고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그러다 보니 점점 얼굴은 회색빛으로 변한다. 자신이 감정을 숨기는 일을 연습하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감정이 정말 희미해진다. 하고 싶은 일도, 미친 듯이 몰입해야 할 일도, 이거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점점 사라져 간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무기력증에 걸린다.

 

나만 이렇다, 하면 조금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나만 부정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 같고, 그런 게 살짝 걱정되기도 하고, 우리 모두 이렇다며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야 안전한 것 같고, 그래서 부러 내 이야기가 아닌양, 현대인들의 문제인양,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무기력한 '우리' 현대인들과는 대조적인 한 사람의 인생이 여기에 있다. 들라크루아. 각 구절마다 들라크루아의 불같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평소처럼 성당에서 작업을 하면서 한 해를 시작했다. 연하장을 보냈을 뿐, 누구에게도 새해 인사를 가지 않았다. 오늘도 쉬지 않고 작업을 할 생각이다. 오, 행복한 삶! 내 외로움을 하늘이 보상해 주리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배고프고 특이하고 독특하고 범상치 않은 예술가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이 간다.

 

'그는 40여 년을 매일 같이 12~15시간 동안 작업에 몰두했으며 매일의 기도라고 부를 정도로 하루도 빠짐없이 데생을 했다.'

 

나는 매일의 기도라고 부를 무언가가 있는지. 매일 같이 내 시간의 전부를 투자하면서 매달리고 있는 무엇을 갖고 있는지. 내 속에 이거여야만 한다는 뜨거움을 삼키고 있는지.

 

'두둔하기 어려운 결점을 지녔던 만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장점을 지닌 사람, 단순한 재능을 뛰어넘어 천재의 반열에 도달한 별난 화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펼쳐냈을 들라크루아. 사람들의 조그만 돌팔매에도 금방 위축되고 마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좀 더 뻔뻔해지자 생각도 든다. 여러가지 감정이 지나가고 지나간다.

 

한 번인 삶인데. 누군가는 들라크루아처럼 들끓는 용암처럼 살고, 누군가는 다 식어빠진 맹물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하고.

 

들라크루아처럼 살았던 때도 있었다, 나도. 그 한 가지 목표가 아니면 안 되던 때, 그거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던 때, 이거 아니면 그만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때. 내 온 정신과 에너지와 시간과 열정과 마음과 능력과 신념과 정신과 노력을 마음껏 쥐어짜 내가 가진 것 이상을 쏟아내던 때. 그 때가 좋았던가. 힘들었던가. 그 때가 행복했던가. 쓰라렸던가. 그 때로 돌아가고 싶던가, 무기력한 지금이 낫던가. 어느 쪽이 인생을 더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던가.

 

너무 큰, 감당할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한 곳에 쏟아 붓는 것이, 무언가 한 가지에만 매달리고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나를 해치고 나에게 독이 된다,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너무 악착같이 하지 말고 힘을 빼자, 생각했었다. 너무 힘을 뺐는지, 이제는 멍, 하니 시간을 보내는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미치는 것과 힘을 빼는 것을 적절히 섞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은, 이런 뻔한 말을 알면서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내 성격이라. 뭐든지 하면하고 말면 마는 극단적인 성격이라. 그래서 유연하자 생각을 하지만 결국은 무기력증에 빠지는 나인지라. 힘 조절이 어렵다.

 

차라리 미치는 게 날 것 같다! 이것 저것 생각 안 하고 이꼴 저꼴 따지지 않고 이 말 저 말 귀기울이지 말고, 속이라도 시원하게 질려버리는 게, 아차. 그러다 상처도 많이 받았었었지. 인생을 보다 배웠으니, 이제는 미쳐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겠지. 이거,  미쳐버리고 말겠구나 야.

 

* 들라크루아와 메리의 시합


  들라크루아가 그려야 할 주제: 안테우스의 목을 조르는 헤라클레스


  메리가 써야 할 각운: 꽃배추, 다투다, 프롬프터, 루블화, 클레롱, 육지,  현관층계, 달, 소총, 팔꿈치, 진눈깨비, 불평, 연분홍색, 물통, 카드, 어떻    게든, 아르고, 곡마단, 카마르고, 손톱

 

  <메리의 시>
 
  회기 중에 다투지 않는 우리 입법의원들에게 꽃배추를
  대사를 잊어버린 배우에게 멋진 프롬프터를
  러시아에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돌같이 여기라, 루블화를
 
  빌로즈에게 화성과 클레롱에서 원대복귀를
  선원들에게 육지에서 사는 행복을
  성당에 고딕풍 현관 층계를
  사도 주베에게 달의 우정을

  시민군에게 소총의 포기를
  통속작가에게 팔꿈치를 바칠 쿠션을
  추위도 눈도 진눈깨비도 없는 겨울에게
  잿빛 하늘에서도 불평하지 않는 태양을

  떠돌이 유태인에게 연분홍색 벨벳 의자를
  사막의 아랍인에게 가득 찬 물통을
  운동선수에게 승리의 카드를
  권태로운 사람에게 어떻게든 고통을

  르 베리에에게 아르고 별자리 하나를
  곡마단 벨강호라이이에게 영국 사람 한 명을
  댄서들에게 카마르고의 발을
  공격받는 작가에게 날카로운 손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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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 그림 - 그림으로 꾸민 인테리어 30
조민정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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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해야만 했던 시절에 -생각해 보면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아니 오히려 공부를 하지 말았어야 했으나 굳이 나 혼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착각했던 멍청했던 시절- 공부는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다른 어떤 일보다.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할 때는 시간이 후딱 지나갔는데, 공부를 할 때는 시간이 너무 느리고 지겨웠으니까. 그래서 앉아서 꼬박 1시간 공부하는 것도 몸이 배배 꼬이고 하품이 나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괜히 서랍을 정리해야 할 것 같고 웬일인지 연필은 자꾸 부러지고 목이 자꾸 마르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머리를 다시 고쳐 묶고 얼마나 남았는지 책 페이지 수를 자꾸 세어보고, 어깨 운동을 해보고 낙서도 해보고 멍하니 몽상에 빠졌다가 다시 이러면 안 되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문제를 끄적거려 보고 한숨도 쉬어보고 답안지를 봤다가 공책을 봤다가 괜히 자 대고 밑줄도 그어도 보고, 이러면서 1시간을 간신히 보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적성은 만들기나 그림그리기였나 보다. 만들기나 그리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서 놀랐던 적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노래 부르기나 운동하기 할 때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는 기억은 없는데 만들기나 그리기 할 때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는 기억은 생생한 것을 보니 무언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내 집중력이나 몰입도가 제일 높았나 보다.

 

공부를 안 하고 그림을 그렸으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재능이 없으니 - 재능이 없는 건 확실하다. 다른 친구들의 그림에 비해 내 그림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 방면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흐흐. 그래도 시간은 무지 빨리 흘러,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 하고 생각하며 지금보다 더 속도감 있는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지루하다 못해 머리가 띵띵한 하루를 보내지는 않을 듯.

 

화가를 사랑한다.

 

그들의 광기, 그들의 고집, 그들의 무모함, 그들의 무대책성, 그들의 다혈질적인 성미, 그들의 정신분열적인 인생, 그들의 열정과 파괴력.

 

음악가나 작가 등 다른 예술 분야보다도 왠지 화가 중에는 미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더 뜨겁고 더 화끈하고 더 성질 더럽고 쉽게 미쳐버리는 것 같다. 자신의 그림과 자신의 열망과 자신의 재능에. 귀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고흐가,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렘브란트가, 되먹지 않은 성격에 그림에 미쳐서 섬으로 들어가 열정적으로 그림에만 몰두하다 나병에 걸려 죽어버린 고갱이, 끔찍하고 기괴한 묘사로 사람들의 욕을 먹지만 이를 꿋꿋이 묵살하는 들라크루아가. 이들을 사랑한다.

 

내 귀를 잘라버릴 수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뒷일을 생각지 않고 내버릴 수 있을까. 가난과 배고픔과 추위와 멸시와 냉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살 수 있을까. 한 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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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윈터
대프니 캘로테이 지음, 이진 옮김 / 시작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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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봐리 부인. 뜬금없는, 뚱딴지 같은 연결고리라고? 그렇지. 작가가 같은 것도 아니고 시대 배경이 같은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두 작가가 동일한 선 위에서 평가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해도 러시안 윈터에서 보봐리 부인을 논하는 것이 생뚱맞긴 하다.

 

니나가 빅토르와 베라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니나의 인생은, 이전에는 결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달려간다. 빅토르와의 사랑과 빅토르로부터 받았던 따뜻함, 그와 함께 있었던 행복했던 시간, 베라와의 어렸을 적 추억, 재회의 기쁨, 빅토르와 베라와 거쉬와 함께 차를 마시며 깔깔대고 웃었던, 단란한 오후의 한 때. 다 스러져 버렸다. 망명 이후 니나의 명성은 높아졌을지 모르나, 니나는 발레리나의 대모가 됐을지 모르나, 함께 했던 그들과의 사랑과 우정은, 버려졌다. 니나는 외로워졌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거고 참아주는 거고 인내하는 거고 믿어주는 거고 신뢰하는 거고 용서해야 하는 거고 내가 더 많이 이해해 줘야 되는 거라는... 사람들의 이야기.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더 성숙해지고 더 깊은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들...

 

그래도 사랑해 주세요.’

 

보봐리 부인을 읽고 내가 쓴 서평 제목이다. 보봐리 부인은 사치와 허영을 일삼느라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의 소중함을 모르고 바람을 피다 끝내 자살을 하고 마는 어리석은 여성이었다. 니나는 보봐리 부인처럼 남자의 사랑만을 바라는 전업주부는 아니었지만, 괜히 남편과 친구 사이를 의심해 스스로 자신을 고독한 처지의 할머니로 만들어 버렸다. 상대방의 진심을 믿어줬으면, 상대방의 사랑을 헤아릴 혜안이 있었다면, 니나가 그렇게 미성숙하지 않았다면 니나는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고 즐거운 토론을 나누며 그렇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행복을 깨뜨려 버리는 어리석음이란.

 

그래도 보봐리 부인도, 니나도 사랑 받았으면 한다. 그녀들을 보며 우리는 저래서는 안 되지.’, ‘그래서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받는 거지.’, ‘우리도 좀 더 성숙해져야지.’ 이렇게 교훈 삼고 위로 받고 그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부족해도, 미성숙해도, 어리석어도, 유치하고, 예민하고, 의심이 많고, 속이 좁아도, 그래도 그녀들도 누군가의, 한 남자의, 주변 친구들의, 세상 사람들의,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좋겠다.

 

아기였을 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부터 부모님의,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아기가 예의가 바르고, 사리 판단이 현명하며, 신중하고, 조신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배려심이 많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는 아량이 있고, 인내심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기를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잠시, 곧 아기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하면 미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지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되면 주변의 평가는 더욱 냉혹해진다. 절대적인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미소를 지어주지 않는다. 성과를 내야 하고, 보다 성숙하게 행동해야 하고, 어른답게 행동해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참아줘야 한다. 보봐리 부인처럼 허영에 빠져있다든가, 니나처럼 성실한 남편을 의심한다거나 하면 더 이상 보봐리 부인과 니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사회의 교훈이 될 뿐.

 

그래서 어른이 되는 일은 슬프고 잔인하고 쓸쓸한가 보다. 떼를 쓰고 악을 쓰며 울 곳이 없어서. 제멋대로 뛰어다니고 생떼를 부려도 귀엽다고 안아줄 품이 없으니. 어느 곳에 머리를 두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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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레시피 - 39 delicious stories & living recipes
황경신 지음, 스노우캣 그림 / 모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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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이 죽을 만큼 좋다고 표현한 달걀말이.

나에게 달걀말이는... 지긋지긋함, 이다.

 

어렸을 때, 그 때는 아직 학교에서 급식이 실시되지 않았던 때다. 그래서 무상급식이다 뭐다,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됐고, 학생들의 식사를 담보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볼썽사나운 일도 보지 않아도 됐고, 무상급식에 맞서 온 몸으로 저항하다 서울시장이 임기 내에 사퇴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지금보다는 세상이 훨씬 작고 단순하고 느렸던 그 때. 학교에서 점심을 주지 않으니 당연히 나는 매일 같이 큰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세상은 작고 단순하고 느렸는지 모르지만, 우리 엄마의 세계는 너무 넓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벅찼다. 드센 말처럼 쿵쿵 뛰어다니는 우리 셋을 휘어잡아야 했고, 한창 쿵쾅대다 배고프다며 악악거리는 우리들에게 밥을 해 먹어야 했고, 잠시라도 가만있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정신없이 어질러진 집안을 박박 닦아야 했고, 지옥의 지하철을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아빠 사무실에 출근까지 해야 했다.

 

지옥만큼이나 정신없는 하루다 보니, 내 도시락 반찬이 다양할 리가 없었다. 주로, 아니 거의 매일 콩자반 아니면 계란말이 아니면 오징어 말린 채 무침. 거의 이 정도였다. 가끔 장조림 계란을 싸주실 때도 있었지만 위 세 가지 반찬이 거의 번갈아 가며 내 도시락에 담겼다. 중학교 3, 고등학교 3, 초등학교 한 3년 쯤. 계란말이라면 치가 떨린다. 그 비릿한 냄새가 혀 끝에 닿으면 속이 다 뒤집히는 것 같다. 가뜩이나 입도 짧은데, 계란말이만 몇 년 동안 주구장창 먹었으니. 토할 만큼 지긋지긋해서 대학교를 입학해서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계란말이를 잘 입에 담지 않았다.

 

같은 반찬을 계속 먹어서 지겨웠을 뿐 아니라, 난 그 시절도 몸서리 쳐질 만큼 지긋지긋했다. 당시 느꼈던 답답함과 지루함. 내가 냈던 짜증과 신경질.

 

그래서 내게 달걀말이는 지긋지긋함이고 벗어나고픈 현실이었다.

 

달걀말이가 먹고 싶다. 이제는 엄마가 싸 주는 도시락을 먹을 기회가 거의 없다. 각자 힘이 넘쳤던 그 때, 서로 부둥켜 안아 버티던 그 때, 내가 누군가의 희망이었던 그 때, 피곤한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키며 그래도 꾸역꾸역 새벽에 부엌에서 부쳐 주었던 그 때. 잘 먹는 걸 최고로 여기며 반찬 없이도 아무 거나 입에 미어지게 디밀어 아구아구 먹었던 그 때. 으르렁 거리며 싸워도 곧 헤헤 거리며 거리낌 없이 뒹굴던 그 때. 엄마 아빠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던 그 때. 서로가 없으면 슬퍼서 어쩌나, 괜히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던 그 때. 지금보다 더 순박하고 깨끗하고 온전했던 그 때. 그 때의 달걀말이를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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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의 결 - 뷰티 다큐
고현정 지음, 조애경 감수 / 중앙M&B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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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런지, 서평 쓰기가 어렵다. 그리 어려운 책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쓸 내용들도 어느 정도 정리해 놓았는데 이렇게 썼다가 저렇게 썼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 지워버렸다. 오전에 무슨 서비스 교육인지 나발인지를 듣느라 완전 지겹고 가당치도 않은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들었더니 진이 다 빠져 버렸나 보다. 점심도 거의 1시에 겨우 도시락 따위로 떼우고. 아침도 못 먹었는데 말이다. 강사가 겨우 한다는 소리는 아이 컨택을 하고 안녕하십니까를 천천히 말하고 서서히 허리를 굽히고 다시 일어나서 아이 컨택. 참 나. 그렇게 인사하면서 일하다가는 일 빨리 하라고 욕이나 먹기 십상이다. 암튼, 그래서 오늘 오후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다. 조금 전 배가 고파서 먹은 베이글도 체한 것 같고.. 에고고..

 

서비스 교육을 들으면서 든 생각은, 고객은 왕이고 무조건 옳고 100을 잘해도 1을 못하면 전부를 못한 거라는 둥, 고객이 있기에 너희가 월급을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은 벨 꼬이고 드럽고 치사해도 먹고 살려면 닥치고 남 비위 제대로 맞추라는 거구나. 초, 중, 고등학교 교육이 결국은 인간을 회사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앉아 있는 훈련, 규율에 잔말 없이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처럼 이 교육도 그런 식이구나. 돈을 받으면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일도 참아야 하는구나. 그게 옳은가? 그러다가, 뭐 각자 자리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배운다고 좋게 생각하는 게 좋은 거지 뭐. 틀린 말도 아니니 열심히 배워보자, 이런 생각도 했었다. 그래도, 역시 갑(甲)으로 살아야 돼, 라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 배우는 확실히, 갑이다. 고 배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 덥지 않아요? 라는 고 배우의 아무렇지도 않은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창문을 열지, 히터를 끌지, 조명을 끌지 여기저기서 고 배우의 눈치를 살피며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유난히 까칠하고, 대하기가 어렵고, 예민하다는 평도 있다.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어도 되는 위치에 있으니 얼마나 좋을꼬. 실력도 있고 예쁘고 경력도 있고 어느 정도 짠빱도 있고 영향력이 있어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러면 지는 거라는데도 힝, 부럽다.



그러나 아무리 슈퍼 갑인 그녀라도, 그녀에게도 힘든 날도 있고 아픈 날도 있음이 확실하다. 마냥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것도 아닐 테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고 자잘한 것들을 품어주고 더욱더 냉철하게 자신을 평가하고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을 하니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일 테다. 그래서, 새삼 고 배우가 대단해 보인다. 예전에는 사실, 여배우를 무시하는 마음을 조금 갖고 있기도 했다. 별 생각도 없는 것들이 얼굴만 믿고 나와서 깝치는 꼴들을 보기 싫다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마 많은 것을 가진 그들이 사실은 조금 부럽기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요즘 보면 여배우들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여자이기 때문에, 그것도 예쁜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비와 모멸감과 치욕과 상처들. 비껴가지 않는 세월 앞에 내뱉어야 했던 깊은 한숨과 자괴감. 내가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일들을, 내가 상상도 못하는 시련들을 헤치면서 그들은 또래들 보다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녀들을 만나고 싶다. 만나서 조언을 들으면서 그들의 아량과 단단함을 배우고 싶다. 여배우 선배를 알아 언니 삼아 지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텐데. 엥엥 거리는 내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을 텐데. 사람 만나고 친구 사귀는 걸 귀찮아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새삼 사람이 욕심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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