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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 그림 - 그림으로 꾸민 인테리어 30
조민정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11년 11월
평점 :
공부를 해야만 했던 시절에 -생각해 보면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아니 오히려 공부를 하지 말았어야 했으나 굳이 나 혼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착각했던 멍청했던 시절- 공부는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다른 어떤 일보다.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할 때는 시간이 후딱 지나갔는데, 공부를 할 때는 시간이 너무 느리고 지겨웠으니까. 그래서 앉아서 꼬박 1시간 공부하는 것도 몸이 배배 꼬이고 하품이 나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괜히 서랍을 정리해야 할 것 같고 웬일인지 연필은 자꾸 부러지고 목이 자꾸 마르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머리를 다시 고쳐 묶고 얼마나 남았는지 책 페이지 수를 자꾸 세어보고, 어깨 운동을 해보고 낙서도 해보고 멍하니 몽상에 빠졌다가 다시 이러면 안 되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문제를 끄적거려 보고 한숨도 쉬어보고 답안지를 봤다가 공책을 봤다가 괜히 자 대고 밑줄도 그어도 보고, 이러면서 1시간을 간신히 보냈다. 휴.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적성은 만들기나 그림그리기였나 보다. 만들기나 그리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서 놀랐던 적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노래 부르기나 운동하기 할 때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는 기억은 없는데 만들기나 그리기 할 때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는 기억은 생생한 것을 보니 무언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내 집중력이나 몰입도가 제일 높았나 보다.
공부를 안 하고 그림을 그렸으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재능이 없으니 - 재능이 없는 건 확실하다. 다른 친구들의 그림에 비해 내 그림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 방면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흐흐. 그래도 시간은 무지 빨리 흘러,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 하고 생각하며 지금보다 더 속도감 있는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지루하다 못해 머리가 띵띵한 하루를 보내지는 않을 듯.
화가를 사랑한다.
그들의 광기, 그들의 고집, 그들의 무모함, 그들의 무대책성, 그들의 다혈질적인 성미, 그들의 정신분열적인 인생, 그들의 열정과 파괴력.
음악가나 작가 등 다른 예술 분야보다도 왠지 화가 중에는 미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더 뜨겁고 더 화끈하고 더 성질 더럽고 쉽게 미쳐버리는 것 같다. 자신의 그림과 자신의 열망과 자신의 재능에. 귀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고흐가,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렘브란트가, 되먹지 않은 성격에 그림에 미쳐서 섬으로 들어가 열정적으로 그림에만 몰두하다 나병에 걸려 죽어버린 고갱이, 끔찍하고 기괴한 묘사로 사람들의 욕을 먹지만 이를 꿋꿋이 묵살하는 들라크루아가. 이들을 사랑한다.
내 귀를 잘라버릴 수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뒷일을 생각지 않고 내버릴 수 있을까. 가난과 배고픔과 추위와 멸시와 냉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살 수 있을까. 한 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