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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책을 구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책을 살까 말까, 꽤 오랜 시간, 몇 달 됐었나.... 아무튼 긴 시간을 고민햇었다.) 책을 다 읽는데도 오래 걸렸고(음.. 이 때는 다른 책을 한꺼번에 많이 사서 이것 저것 읽느라 그랬나... 원래는 한 권 책을 붙들고 그 책 다 읽고 다른 책으로 옮겨가고 하는데 이 때는 마구잡이로 이 책 읽었다가 저 책 읽었다가 그랬다. 이유는 역시, 잘 모르겠다.) 그리고 서평을 쓰는 데도 아주 오래 걸렸다.(아마 2주 정도 이 서평을 붙들고 있었나... 어떤 말을 써야 할지 확 다가오는 주제가 없어서. 붕붕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무질서하게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요즘 무언가 머릿속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들이 피곤해져서 그런가.) 어쨋든 모든 것이 오래 걸리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것이 책 때문인지, 아니면 그 때 그 때 나에게 맞딱뜨려진 상황 때문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며칠 째 서평을 쓰려고 붙들고 있었는데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떠오르는 대로 감상을 써볼까 한다.
우선 책 전반에 관한 전체적인 느낌. 이 책에 대한 호평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구매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저자가 자살을 했다는 데 있다.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운 사연들이야 모두 갖고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자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자살이라는 씻지 못할 죄를 범한 자의 책을 내가 굳이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때문에 오랜 시간 이 책을 구매리스트에만 올려놨었다. 그리고 저자의 우울한 감정이 고스란히 책에 담겨져 있을 것 같아, 그 우울함이 나에게로 고스란히 옮겨질 것 같아, 그 우울함을 나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더더욱 구매를 망설였다.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가 왜 이 책을 구입했는지 이유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생전에 우울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완벽히 빗나갔다. 그녀는 세상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소녀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었고, 뜨겁게 타오르고 싶은 열정으로 온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팽팽한 시선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그녀는 왜 생을 접어버리고 말았던 걸까. 그녀가 궁금해 혹시 평전 같은 것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만족할 만한 서적은 없었다. 그녀의 글들은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기 보다는, 여리여리하고 세심하고 풋풋한 질감이다. 딸에 대한 애정도 그렇고, 청년들에 대한 기대도 그렇고, 낯선 땅 독일에 대한 호기심도 그렇고. 왜 극단적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 나도 그런데... ㅋㅋ 강남 쪽 사무실은 입사지원 시 자체 배제한다고 말했더니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었지.
•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 이럴 때가 있는데. 괜히 힘들고 서러울 때. 누가 말시키면 으앙, 바로 울어버릴 것만 같을 때. 누구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입을 열면 바로 후회될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할때. 내 짐만 유난히 더 무거운 것 같고 발은 부르트고 배는 고프고 날은 덥고 짜증도 못 부리고 그렇게 걷다가 돌부리에 발가락을 찌었을 때. ㅋㅋ
•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호수에 던져버렸나. 난 어디에 버렸었었나. 어느 구석에 내 청춘을 함부로 내던졌었나. 딱히 좋은 장소에 버리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도시 쓰레기들과 나도 모르는 새 버려진듯 하다.
• 눈이 내리는 소리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들을 수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소리.
•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지?
• 자유, 청춘, 모험, 천재, 예술, 사랑, 기지..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천재? ㅋㅋㅋ
• 온갖 물질의 결핍과 가난과 노동, 식사부족, 수면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 촌음을 아끼고 인식에 바쳐지는 정열과 성의, 조금도 외계나 속물과 타협하려고 들지 않 는 자기 유지의 노력, 정말로 이러한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팽팽한 세계.
패기와 오만. 타협하지 않는 고집. 지금 내게 필요한 것들이다.
• 아늑한 고요
• 마침내 약간의 안정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어. 그것은 진짜 안정은 아니었어. 물론 그렇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이라도 괜찮았어.
나도, 그랬어... 그런데 그 안정도 나는 가질 수 없었어. 진짜가 아니라는 걸 당시에도 알고 있었지만 난 그거라도 필요했어. 거지 같은 알량한 안정. 그런데 결국 갖지 못했어. 때론 가짜라도 괜찮을 때가 있는데 말이지.
부러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전혜린은. 부러우면 지는 건데. 좀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조금 아프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