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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평점 :
이런 책은 잘 안 읽는데. 이런 책이라 함은 페미니즘의 냄새가 나는,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보면 조금 별나 보이는 드센 여자들 이야기. 왜 안 읽냐면 이런 책들에서는 신선함을 발견할 수 없어서.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어서.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외침이 지긋지긋해서. 알아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끊임없는 항변은 언제나 나에게 상처로만 돌아와서. 그래서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보지 않는 것이 속 편해서,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런데 왜 이 책이었냐고? 왜였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함을 확인하고 싶어서.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 땅 어느 한 구석에서 멀쩡히 숨 쉬고 있음을 상기하고 싶어서다.
요즘 내 주변은 세상의 상식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본인은 그런 주제이면서 틀을 벗어난 사람들을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는 한심이들로 가득하다.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어색하게 앉아 있으려니 그들의 경멸의 눈빛이 따가워서. 자꾸 소심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 더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과 함께 공감을 형성하고 책으로나마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야겠다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의 기준이나 잣대, 가치관은 한 개인에게 무지막지한 무게로 영향을 미치니까. 그래서 친구가 중요한 거고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겠지. 그래서 책 속에서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이 책을 집었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내 친구들은 씩씩하고 당당했고 근사하고 멋있고 자신만의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걷고 있었고 어느 누구의 힐난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래서 나도 이런 점을 배워야 돼! 라고 친구들을 따라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확인하고 싶은 모든 것을 확인 받았다. 이들과 함께라면 나도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안심도 얻었다.
그런데, 내 친구들은 모두 아팠다.
부모의 이혼, 아버지의 폭행, 장녀로서의 의무와 책임,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사회의 편견, 노처녀 딱지가 주는 결핍 등등으로 친구들은 힘들어 했다. 아직도 가족을 믿느냐며 결혼을 믿느냐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그들의 외침 속에서 나는 그들의 여린 살결에 깊게 박힌 상처가 보였다.
억지다, 비약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살고 있는 누군가를 아프다고 진단내리는 무면허 의사다, 라고 누군가는 나를 비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자행됐던 폭행이 한 개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이야 말로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정 내에서의 폭력이 비혼을 선언하게 된 단 한 가지 원인은 아니겠지만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개인 각자의 불완전했던 어린시절이나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경험들이 비혼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의무와 책임들, 동등한 인간으로가 아닌 남성의 부속품으로 정의되는 사회적 분위기, 합리적인 주장을 할라치면 쏟아지는 드세다는 인신공격들, 이런 것들이 내 친구들로 하여금 비혼을 선언하게 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친구들이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 뿐이다.
물론 내 친구들은 내 친구들답게 과거의 상처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먼지 털듯 탁탁 바지를 털고 아무렇지 않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친구들을 아프네 어쩌네 하는 것이 무례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한 켠에서는 아프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친구라서.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아서. 나 또한 친구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이 되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무렇지 않은 척 활기차게 아침을 맞이하는 게 가끔은 힘에 버거운 줄을 익히 경허한 바 있어서.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고 물리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타인을 괴롭히는 불상사도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업었으면 좋겠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은 척 있는 힘껏 살아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고 어차피 선하지만 않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모두들 평안한 인생을 보장받았으면 좋겠다. '
아무도 아프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