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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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느 역에서 기차를 놓쳐야 할까.”

“비와 눈, 햇살과 안개는 과학적인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연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당신의 미래는 이미 망친 것도, 금빛으로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농부들이 따르는 날씨에 관한 격언이 일기예보보다 옳을 때도 있음을 깨닫는 기쁨은 무척이나 컸다. 농부들의 격언이 올해 맞지 않았더라도 다음 해에 다시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낸 게 기쁘다. 일기에보에서 비가 온다고 해도 눈을 기다리고, 날씨가 추워진다고 해도 따뜻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작년 겨울 뉴욕에 가서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는데, 이런. 밤 10시 11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는데 지하철이 오는지, 아니면 막차가 끊겼는지, 온다면 몇 분 후에 오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역무원도 없고 안내판도 하나 없다니 이게 무슨 경우지?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있어서 그럼 아직 지하철이 끊긴 건 아니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뉴욕 한 복판에서 발이 묶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 옆 사람에게 지하철이 언제 오냐고 물었더니. 세상에. 그 흑인도 잘 모른단다. 지하철이 오는지, 끊겼는지, 몇 시에 오는지. 몇 분 후에 지하철이 오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정보 정도는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서울 한복판에, 1분이라도 열차가 지연되면 역무원에 항의전화를 빗발치게 해대는 철저한 승객들에게 익숙해져 있던 나는, 흑인의 그 무대책이 참 황당했다. 이렇게 허술한 지하철 시스템을 용인하다니... 마음도 좋으셔라. 완벽에 가까운 한국 지하철 시스템에 새삼 감동을 했다.

 

지하철이 조금만 늦으면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느냐고 성화를 해대는 분위기 속에 살다보니, 일기예보가 틀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며칠 째 추위가 풀리지 않는다거나 하면 항의글로 기상청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것을 자주 보며 살다보니, 우리는 점점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가 된다. CGV에서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면 아마 CGV 홈페이지는 그 날로 바로 다운되고 여기저기 인터넷에 이에 대한 비판글이 마구 올라오고 CGV는 당장에 사과글을 올리고 이런 일이 있었다며 뉴스 기사가 나오고 CGV 주가는 곤두박질 치고, 휴, 아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겠지. 뭐 이 정도야 우리나라 여러 분야의 인프라 발전을 위해서라며 긍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봐 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삶을 대하면서도 완벽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조금은 슬픈 사실.

 

정확해야 하고,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항상 예측대로 결과가 나와야 하고, 모든 선택 중 최선의 방법을 선택해야 하고, 가장 효율적이어야 하고. 실수를 해서도 안 되고. 물건을 하나 사는 데도 인터넷으로 모든 조건과 가격을 꼼꼼히 비교하는 습관은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취업을 하든, 이직을 하든,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진로를 결정하든, 모든 선택은 완벽해야 하고 예측 가능해야 하고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고. 뭐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바라봐 줄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쳐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절망하고 자책하고 미련을 갖게 되니.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았을까? 지금 이 길이 최선이었을까? 그 때 A가 아닌 B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자책들. 정확히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 기상청처럼 우리는 자꾸 자신감을 잃고 위축된다. 나만, 그런가.

 

일기예보가 틀리기를 바라는 낭만. 오늘의 예측이 완벽히 비껴나가는 유머를 즐길 수 있는 여유. 이제 기차역에서 기차를 놓칠 일이 없다며 완벽한 철도 시스템을 원망할 수 있는 넉넉함. 이런 기대감으로 인생을 대한다면. 하하. 생각만 해도 너무 낭만적이야. 내일은 펑펑 눈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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