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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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이 불편하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매연으로 머리가 아프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는 것도 답답하다. 대부분 쓰레기 정보다. 눈도 아프고 속은 메스껍다. 지금까지 많은 시험을 치르고 경쟁을 해 왔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다. 회사에 가든 사람을 만나든 여자에 대한 편견은 높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며 내 숨통을 조여 오는 무례한 인간들은 넘치고 넘친다. 이런 엉망진창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잘도 참는다. 난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런 불만을 쏟아내려고 하면 사람들은 또 시작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매사가 불만투성이고, 또 시작이라며 나를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비난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사람들과 자신의 허약함을 권위로 밀어 붙이려는 사람들이다.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을 해 보지 않은 위정자들이야말로 냉정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이명박의 청계천부터 이야기 해보자. 청계천은 이명박의 자랑이며, 성과의 상징이다. 청계천을 복개했듯이 대운하도 만든단다. 무조건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다. ‘무식한 노동쟁이’여서 그런지 이명박은 무조건 깡그리 밀어내고 삽질을 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 그것이 발전이요 생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 많은 것들을 파헤쳤고 너무 많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공해다. 높은 빌딩과 아파트, 많은 자동차들은 이제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긴 커녕 피곤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지구를 살리고 인간을 살리는 시대가 왔다.


한국이 IT 강국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즐긴다는 현실도 다시 한 번 따져보자. 시각장애인들은 여기서 예외다. 시각 장애인이 인터넷을,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아이콘을 클릭하며 자신이 원하는 블로그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들을 인터넷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기술이 앞서고 인터넷 보급률이 높다고 해서 IT 강국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인터넷을 즐길 수 있어야 그제서야 강국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노인 계층, 저소득층, 벽촌의 아이들, 그리고 시각 장애인까지. 와이브로니 U 씨티니 하는 말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뱉어낸다.


‘밀양’이 영화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줬다. 한국 영화의 빛이다. 하지만 영화 산업 비정규직은 한국 영화의 어둠이다. 처음 영화에 발을 들인 카메라 맨은 1년 연봉이 100만원정도란다. 쉬는 날도 없고 국민연금, 산재보험 등 기본적인 혜택도 없다. 휴일도 없는 강행군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단다. 비단 카메라 맨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보조 스탭들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푼 꿈을 안고 영화 산업에 뛰어들고 많은 젊은이들이 인간 이하의 생활에 실망을 안고 이곳을 떠난다. 인재가 점점 더 중요해 지는 이 시대에 우리 영화산업은 거꾸로 가고 있다. ‘밀양’의 영광을 이어가려면 이에 대한 논의와 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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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표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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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실패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나는 충분히 부끄럽다. 그리고 나의 어리석은 방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항했고 사람들과 부딪쳤다. 그렇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좀 더 차분하지 못했고 나의 격렬한 감정들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현 방법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불합리함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의 미숙함이었다. 지금의 나는 좀 더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성숙함에는 완성이 없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알게 됐다.


내가 걷고 있는 길도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현실이다. 따라서 거창한 이념과 신념 따위로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점을 생각했을 때 현재 나의 현실을 매우 불안하다. 어쩌면 이것은 큰 도박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인생 전체를 건 도박이다.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원숭이 조련사, 리코딩 엔지니어, 정육 기술자, 매사냥 기술자 등 이들의 청춘도 지금의 나처럼 험난했다. 그리고 그 청춘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들도 처음부터 지금의 명성과 기술,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양아치 생활을 한 자도 있었고 돈이 없어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가진것은 오로지 자신의 열정과 젊음뿐이었다.


내가 과연 그런 뜨거움을 갖고 있는지 회의가 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뜨겁기만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능력 없는 열정, 대책 없는 이상은 자살과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다.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나의 열정을 뒷받침 해 줄 탄탄한 스펙과 박식한 지식, 그리고 감탄할 만한 필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청춘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앞만 보고 나아가고 있다. 과연 잘 하는 짓인가. 이것은 청춘의 특권도 아니요 무식함으로부터 연유하는 허망한 배짱이 아닐까.


만일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나의 청춘은 싱그럽게 빛날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이 도박에서 지더라도 ‘그래 나는 내 청춘을 후회 없이 보냈어’라고 자신할 수 있을지 나는 장담할 수 없다. 저자는 청춘에는 모든 가능성이 있지만 실패의 가능성도 또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는 청춘, 즉 정해진 길을 무난히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질타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실패한 청춘이 방황 없던 청춘보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현실이다.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상은 허무에 불과하다. 우리가 현실에 허덕이면 우리의 이상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답을 알았다 해도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연로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는 분명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내 안의 불만을 좀 더 당당하게 표출하고 싶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뒤집어 지길 바란다. 이것은 저자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요, 철없는 꼬마의 철부지 반항도 아니다. 정답 없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겠다는 나의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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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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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나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것은 내 후배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쉽게도 앞으로 한동안은 이 땅에서 이런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교육을 받고 많은 것을 배워야 사고할 수 있으며 자신의 권리도 주장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클레멘트 코스를 마친 후 한 수강생이 ‘나는 이제 나 자신이 명예롭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말이 나의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 교육은 생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며 이것은 곧 가난한 사람들을 정치 영역,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얼 쇼리스가 말하는 정치란 선거와 같은 단편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즉, 빈곤층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이들을 위험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사회 구조를 비판할 것이며 억압받고 있는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하려 들 것이다. 혼란과 분란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빈곤층도 단지 불필요하고 무용한 덩어리가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은 이런 성찰로 인해 어떻게 빈곤을 탈출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인문학 교육이 빈곤층의 자존감과 자기 통제력을 높이며 정신적인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이 물질적 풍요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저자는 클레멘트 코스 수료 후 정식 대학의 진학을 추진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한 이들은 공적인 영역으로 편입된다고 말한다. 이들이 빈곤에서 탈출하는 데는 오히려 대학이라는 제도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대학이라는 제도의 힘이 없다면 인문학의 힘으로만 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하고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다. 책에서는 코스 수료 이후 학생들의 삶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아 아쉽다.


인문학 교육 후 빈자들은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들은 위험한 사람이 됐고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와 정부에 복지제도나 보조금 따위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들이 가난을 탈출하기란 역부족이다. 경쟁사회에서는 역시나 기술과 같이 경쟁력 있는 노동력을 갖춰야 돈을 벌수 있다. 얼 쇼리스는 수강생들이 자기 통제력을 갖게 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미래를 위해 노력하며 범죄의 유혹에서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라며 그들을 또다시 치열한 경쟁의 현실로 내모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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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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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글을 써본다. 원래 글재주가 뛰어난 친구가 아닌데다 펜을 놓은 지도 오래돼 오늘 글쓰기는 더욱 어렵다. 머릿속에는 갖가지 생각들이 넘쳐나지만 이것들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기 보다는 세탁기 속의 빨래처럼 뒤엉켜 있다. 마술사가 모자에서 만국기를 술술 풀어내듯이 단번에 이 혼란들을 줄에 꿰어 차례차례 끄집어내고 싶지만 마술은 눈속임일 뿐. 결국은 내가 하나하나 털어내 일일이 널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빨래와 엉켜있어 끄집어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장 수월하게 꺼내든 빨래는 위로. 나만의 길을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그러나 결국 흙먼지만 뒤집어 쓴 채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나를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그저 인내심이 부족한 철부지가 아니었을까, 나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회부적응자에 불과했을까’라는 절망감이 나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죄책감을 깨부시고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는 일이 급선무였다. “네가 이 시기를 좀 잘못 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돼. 너는 아직 젊고 또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공지영의 이 말을 통해 나는 사회의 잣대가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나를 ‘청년’으로 되돌려 놓았다. “안정된 직업, 안정된 직장, 안정된 가정과, 실패 없는 인생을 노래하는 친구들 틈에서 내가 돌연변이는 아닐까 걱정할 때,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안정된 것이라고는 마음 하나뿐인 당신이 거기 있습니다.”라는 위녕의 고백은 어느새 나의 진심이 돼 버렸다.


하지만 그 뒤를 잽싸게 따라 나온 것은 뿌리칠 수 없는 불안감. 공지영은 “사랑하는 딸, 도전하거라. 안주하고 싶은 네 자신과 맞서 싸우거라.”며 나를 격려했지만 그래도 불안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다.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혹시 이대로 내 삶은 꼬일 대로 꼬여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초조하기만 하다. 이런 걱정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빨리 또 다른 조직에 편입되거나 아니면 잠을 자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잠을 많이 잔다는 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벅찬 문제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암시다. 나는 요즘 허리가 끊어지도록 잠만 잔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놓아버리고 불안정의 상태에 빠져들고, 다시 그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나의 모순 때문이다. 사회와 조직이라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잔인하게 짓밟는 ‘안정 아닌 안정’을 거부하면서도 나는 그 ‘안정’을 누리지 못할까봐 전전긍긍이다. 잡지도 놓지도 못하는 어정쩡함. 어디로 가야할지 확실한 목적지를 잡지 못하니 나는 계속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전진하지 못한다.


역시 현실과 이상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마지막 딸려 나온 옷은 괴리. “당신이 제게 했던 말처럼, 사랑이 나에게 상처 입히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넓은 사막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방황하겠습니다. 넘치도록 가득한 내 젊음과 자유를 실패하는 데 투자하겠습니다.”라는 위녕의 말을 따라 나도 목이 터져라 소리쳐 보지만 상처와 방황에서는 누구나 고통스러운 법이다. 이런 고통을 내가 자초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많은 고민들이 잠시도 나를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든다. 나 역시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살듯 집과 회사를 오가며 그저 그렇게 사는 인생을 원하는 것이 아닌지 의아스럽다. 아니, 이제는 그런 삶이 멋진 삶, 성공한 삶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나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공지영은 이렇게 말했다. “네 앞에 수많은 길들이 열려 있을 때, 그리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되는대로 아무 길이나 들어서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라. 네가 세상에 나오던 날 내쉬었던 자신의 깊은 숨을 들이쉬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네 마음속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다가 마음이 네게 이야기할 때 마음 가는 곳으로 가거라.”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금 더 기다려야 할 때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울림이 퍼지는지 나는 찾아내야만 한다. 세상의 손가락질과 내부로부터의 자책에서 벗어나 나는 내 영혼의 간절한 소망에 집중해야 한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리고 설사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해도 그것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이란 결코 만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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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마음을 놓다 - 다정하게 안아주는 심리치유에세이
이주은 지음 / 앨리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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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반 고흐.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작품은 고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엽기적이고 자극적이다. 18세, 교통사고로 인해 쇠파이프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관통한 후 평생 장애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프리다 칼로. 사고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천장에 거울을 달아줬고 그녀의 아버지는 프리다 칼로에게 유화물감을 선물했다. 그녀의 작품세계는 그렇게 잔인하게 시작됐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강렬하고 고통스럽다. 결국 사고 후유증으로 47세의 나이에 다리를 자르고도 끝내 처절한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녀다 .  

 프리다 칼로  

극렬한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아픔은 때론 예술로 승화되는가 보다. 예술가의 피눈물을 머금고 탄생한 작품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바라만 보아도 위로와 힘을 얻는다. 고흐의 작품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밤의 까페테라스]. 방에 걸어놓고 멍하니 들여다본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왁자지껄함 속에서 외로움을 날려버리기도 하고, 노란 빛 조명을 바라보며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책에서 본 에드워드 번 존스의 [밤]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내 모습을 발견했고 [거울 앞에 선 여자 모델]을 통해서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부드러움 속에서 마음껏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게 됐다.

 

밤의 까페테라스

작가의 한숨과 갈망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일까. 그림에 문외한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괴로움과 폭발할 것만 같은 답답한 시간들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그림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유명하고 인기있는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서울시립미술관의 작은 작품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작가들의 요람인 인사동을 정신없이 쏘다니는 내 모습을 보게된다. 세상살기가 힘들다고 느낄 때면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떤다. 그래도 상처에 새살이 돋지 않으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힘에 부쳐 휘청거릴 때면, 나는 친구들도 여간해서는 만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도 음악 소리조차도 시끄럽고 귀가 따갑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러면 미술관으로 향하게 된다. 그림 앞에 서서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나를 보듬는다.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요즘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쓰고 발버둥을 쳐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억지로 웃고 괜찮은 척 넘어가는 것이 힘든 그런 때는, 그저 마음껏 지나친 고독에 허우적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빨리 침묵의 시간을 지나 예전의 나로 돌아가기를.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림을 바라보며 화가들의 위로를 받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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