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르시시즘의 심리학 -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샌디 호치키스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06년 10월
평점 :
서평을 쓰기 전 흰 종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읽는 것은 책장 넘기는 재미에, 또 다음 내용이 궁금해 성마르게 진행되는 반면 내가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자꾸 머뭇거려진다. 무언가 불안하기도 하고 수이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해, 시작하기 전 괜히 책상을 정리하거나 인터넷 신문기사를 기웃거리며 나답지 않은 산만함을 보인다.
그런데 글을 쓸 때가 아닌, 책을 읽을 때도 이런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때란 대개 작가와 나의 핀트가 맞지 않을 때인 듯하다. 예전에 <대화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을 때 처음 이런 감정을 느꼈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불합리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나는 '부드럽게 거절하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지혜롭게 표현하기' 등의 책소개 내용을 보고 그 책을 선택했다. 좀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아뿔싸. 그 책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책이었다. 나의 거칠 것 없는 표현을 유연하게 만들 방법을 찾던 내가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은, 읽어 내려가면서 글을 써야만 할 때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낀 두 번째 책이었다. 왜냐고? 슬프게도 나는 저자가 원하는 독자-나르시시스트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불쌍한 희생양-라기보다는 저자가 비판해 마지않는 '나쁜 놈'-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우리 주변의 나르시시스트들의 '악질적인' 특징들을 줄줄이 열거하고 그들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대안이라는 것도 '나르시시스트들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니 상종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는 식이다. 쳇, 나르시시스트인 내가 책을 읽는 내내 위축되고 자책하다 화까지 내는 등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실, 몰랐다. 내가 나르시시스트인줄... 나는 자신이 황제인 양 부하 직원을 종 부리듯 하는 상사들, 주변 사람 모두 자신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몰상식한 사람들,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 등 이런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라 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파렴치들로부터 나를 탈출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말 책을 읽으면서 '어머, 이건 정말 내 이야기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그 '맞어, 맞어'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닌 나의 잘못이었고,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점이 나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인가를 설명하자면... 우선 '현실의 나는 보잘 것 없는데 스스로 나는 무언가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그렇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나르시시즘의 일곱 가지 '죄악' 중 첫 번째 죄악이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어느 정도 이런 착각 속에 빠져있는 듯하다. 지금의 직장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능력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원하기만 하면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고, 언제든 지금의 답답한 상황들을 훌훌 벗어던져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있다고 믿는다. 나는 스스로 나의 이런 점을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책에 따르면 나르시시스트들은 내면의 공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환상에 빠져들게 되고 그 환상이 조금이라도 무너지게 되면 수치심이 폭발하면서 그 밑바닥에 깔린 분노를 쏟아낸단다. 인정하긴 싫지만, 저자의 분석은 나의 허약한 자존심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오만하고 우월한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노력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것, 불편한 상황들을 조금도 참으려고 하지 않는 것 등도 나의 단점들이다. 경멸 뒤에 감춘 시기심이나 내 느낌과 내 욕구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기심도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으악! 슬프게도 나는 책에서 언급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의 특징을 참 골고루도 갖고 있다.
어쩌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된 걸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저자는 부모의 역할을 중요하게 꼽는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조숙한 아이였다. 첫째라는 부담감도 있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힘들게 하거나 슬프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감도 갖고 있었다. 그게 원인이었을까? 저자는 그런 조숙한 아이들은 '다 큰 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당함으로써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분노, 모욕, 무력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그들은 '최고 지휘관' 역을 맡아야만 하고 어떤 경쟁에서든 남을 이겨야 한다는 공포에 휩싸여 나르시시스트로 변질된단다. 그런 걸까? 이 마당에 부모가 나를 잘못 키워서라고 책임을 떠넘기자는 게 아니다. 그저 원인이 무얼까 이리저리 생각해 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나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을 주위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만이었음을, 당당함이라고 여겼던 것이 무례함이었음을, 그리고 솔직함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들이 뻔뻔함이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하련다. 나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했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맙다. 부족하고 서투른 나를 그래도 가족으로, 친구로, 구성원으로 받아주고 감싸주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이 나르시시스트는 어찌 됐을지.
그나마 저자가 간략하게나마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놀랄 것 없다.'라고 이야기 해주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발견하더라도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고 노력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위로와 격려. 따뜻하다. 책을 통해 나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또 다른 경지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순간들. 책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에 관한 문구가 있어 마지막에 덧붙인다. 부디 내가 건강과 병듦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현명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자신에 대해, 자기의 불완전함에 대해 웃어 넘길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감정을 온전하게 느끼고 타인의 삶을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질이며, 진실과 환상을 분리하되 여전히 꿈을 간직할 수 있는 지혜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 의심 없이 올곧게 성취를 추구하고 즐길 있는 능력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진정한 자존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