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그림 여행
정지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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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뭐라고 뭐라고 쭝얼 쭝얼 그림에 대한 설명이며 작가의 감상이 씌여 있지만 머릿속에 남지 않고 모두들 휙휙 스쳐 지나간다. 너무 많은 작품과 화가에 대해 설명하려니 깊은 이야기가 나오지 못했다. 더 알고 싶다는 욕구로 인해 갈증이 더해간다. 더 세세히, 더 깊게, 더 자세하게. 그림이 아닌, 타인의 감상이 아닌, 화가 그 '사람'에 대해서...

닮고 싶어서... 그림을 그려낸 각각의 인생들. 간략하게 기술돼 있었지만 그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순탄치 않았다.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친구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 가난과 질병,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인한 좌절감으로 인해 방황의 시기를 거치기도 했다. 화가들의 인생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닮고 싶다. 그들을 힘겹게 했던 지독한 가난과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무지한 세상의 조롱을.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들의 억척스러운 고집과 뚝심을. 타인의 평가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을 미련하게 고집했던, 그들만의 결벽과 열정. 자기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애정,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밀려들었던 수많은 망설임과, 번뇌와, 고민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이겨냈는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자신을 다잡았는지. 자신만의 고집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었던 비법은? 한 작품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했을 그들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들이 궁금해졌다. 나도 닮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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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양장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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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이라는 담벽 안에 갇히게 된다면 어떤 게 가장 힘들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것. 자고, 입고, 먹고, 보고, 가고 싶은 이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하지 못 하다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과 신경질적인 짜증이 한없이 밀려온다.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더위'라는 녀석도 수감생활에 있어 만만찮은 적수인가 보다. 신영복 교수는 뜨거운 한여름, 숨이 턱턱 막히는 수증기 같은 불볕 더위는 함께 생활하는 타인을 증오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로 누군가의 증오를 산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넘치고 넘치는 시간도 삶을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 것 같다. 어느 공휴일.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무 할 일 없이 하루종일 멍하니 TV만 보다가, 문득 오늘 하루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그 메스꺼움과 어지러움. 하루도 이런데 1년, 2년, 10년은 오죽할까.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것? 그것도 못 견딜 것 같다. 재미있는 일도, 신나는 일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시간들. 헛되고 헛되다를 반복해도 덧없이 사라지기만 하는 그 지옥 같은 시간들...

그러나 신영복 교수는 생각만해도 끔찍한 그 시간들을 '성숙'과 '성장'으로 가득 채웠다. 평생을 하나에만 집중해온 장인처럼 묵직하고 깊은 사람.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거나 파르르 떨지 않는 사람. 화내고 비난하기 보다는 타인을 이해하고 그에게 공감하는 사람. 신 교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성찰을 이루었다.

'인간적 신뢰를 받지 못하면서 단지 형이라는 혈연만으로서 형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너의 형이 되기를 원하는 한, 나 자신의 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해본다.'는 고백이나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독백은 바쁘다는 핑계로 피상적인 사고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의 글을 보면 일상이 단조로워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니 신선한 글을 쓰지 못한다는 나의 푸념은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감옥에서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보고 느끼고 행하고 있지 않은가. 매일 눈을 떠 회사에 가고 퇴근을 하고 집에 오고 잠시 쉬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떠 회사에 가고 퇴근을 하고 집에 오고 잠시 쉬다 잠을 자고.... 하는 지루한 일상이라 화두가 없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매일 회사에 나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일들을 겪는다. 신문과 책을 통해, 하다 못해 친한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속에서도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되고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  타인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성찰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나의 생활이 단조롭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간에 그 하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나의 게으름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 보니 나는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을 하고 있어 깊은 사색에 잠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쁜 일상을 비우고, 내 마음에 가득한 욕심과 불만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떨쳐냈을 때, 그래서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신 교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이루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도 비우고, 욕지거리로 상스러운 수감자들에 대한 비난도 비우고, 여기서 뭐하는가 하는 자책과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워버렸기에 그는 많은 생각들을, 깊게 할 수 있었다. 천천히, 가만히, 조용히 혼자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비웠을 때야 비로소 채워질 수 있는 법인가 보다.

비워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아직 30살. 그리고 2009년도 아직 2월. 조급하거나 초조해 하거나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인생에 실패했다고 좌절하거나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낙심에 빠져 삶을 단정짓기에도 성마른 시기. '비움'이야말로 '채움'의 전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낸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럼 나만의 사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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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 스토리
알렉산더 워커 지음, 김봉준 옮김 / 북북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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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저자는 오드리 헵번을 깊이 사랑하게 됐나보다. 구절구절마다 헵번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녀의 작품 한 번 본 적 없는 나조차도 책을 덮고 나니 작가의 극히 주관적인 평가에 풍덩 빠져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를 나의 우상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녀에 대한 저자의 평가 그리고 그녀 측근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했으며, 그녀의 생기발랄한 웃음은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주었다. 순진한 눈망울은 그녀를 공주로 만드는 데 충분했고 전쟁과 불우한 어린 시절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줬던 낙천적인 모습은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 뿐인가. 그녀의 청교도적인 책임감과 성실함,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명성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는 헵번의 배려와 희생. 어떤 남자라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엉뚱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생각. 그렇다면 그녀에 반해 나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객관적인 자료조사를 위해 내 주변의 지인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런 평들이 나올 것이다.

까칠한 면이 있어서 사사건건 그냥 넘겨주지 않고 분쟁을 일으키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비롯해 화장실이나 주변 환경, 매연, 담배연기 등에 극도로 예민해 비위 맞추기 어렵다. 날카로운데다 고집이 세서 한 번 화가 나기라도 하면 지지 않고 끝까지 말대꾸를 하고 게다가 이해심이라든지 참을성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아마 이 정도 평이 공통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너무 내 추측만을 적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예전에 장난삼아 했던 성격 검사의 구절도 한 번 적어 본다. 정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대충 그 테스트는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 지나칠 정도로 확실하다.’는 정도로 나를 평가했던 것 같다. 한 번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으니까 이 평가도 인정한다. 한 친구가 나한테 했던 말도 생각난다. “야, 네 말이 다 맞아. 네가 옳아. 근데 너는 정치를 못해.” 그렇다. 이것도 인정하련다. 내가 옳아도, 내 주장이 타당해도 난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못해서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으니까. 
  

그래, 그렇다. 나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는 이러해서, 또한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나의 조직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달프다. 다른 이들은 ‘더러워서 참는다.'고 지나치는 일을 나는 꼭 맞서 싸워서 일을 크게 만든다. 그래서 미운털이 박혀 더 불합리한 일들을 당하고 그러면 또 싸우고 더 크게 미운털이 박히고... 악순환이다. 그래서 나도 노력 많이 해봤다. 주변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화나도 참아도 보고, 교언영색하며 웃어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지내도 봤다. 지난 몇 년 간 엄청엄청, 무진장 노력 해봤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시는, 절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조직에 순응하기 위해, 혹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가면을 쓰지는 말자!‘다. 100번을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는 못해주겠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면서 나만 유독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자책도 해보고, 난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우울함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알게 됐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세상이 잘못된 거고, 그런 것들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을 수 없는 사람도 존재함이 당연하고, 나는 단지 후자에 속해있을 뿐이란 사실을. 그냥 이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히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단지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스스로 나이가 들었다 생각하며 쪼그라드는 것이 서글프다.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몸을 사리게 되고,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소심해 지는 내 모습이 가련해 보인다. 아무튼 내 결론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연연해하지 말자다.

그래도 한 사람. 그 사람으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 그이가 내리는 평가는 부디 긍정적이었으면 한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기준 미달이지만 그 사람으로부터는 나의 삶이 의미 있는 삶이고, 옳은 삶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현실은 비록 고달프고 힘들지라도 그 사람 앞에서는 당당하고 떳떳하고 자신감 있었으면 한다. 당신은 나이를 먹어도 세파에 쓰러지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노라, 그런 칭찬을 듣고 싶다. 그 단 한 사람... 바로... 나... 한 치라도 속임없이 솔직하게, 모든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놓고, 마지막 날 나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을 때, 너, 그래도, 한 인생 멋지게, 아름답게 살았다고 자축하고 싶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음을 자부하고 싶다. 그 평가가 어쩜 이리도 힘든지. 그 한 사람의 그 평가를 위해 나의 방황이 이렇게 깊고 끝이 없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도 기로에 서 있다. 다시 예전 일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내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눅 들지 않기 위한 명함’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고 빨리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급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친구들과 비교해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서도 안 될 것이다.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각오도 해야 하고 이 어중간한 시점에 다시 곤두박질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버려야 한다. 밑바닥부터 시작하지만 10년, 20년 후에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이것이 나의 ‘결코 소박하지 않은’ 소망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는 선행도 더 쉽고 더 큰 법이라 생각한다. 마치 오드리 헵번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처럼... 나의 눈물은 누구를 적실 수 있을지...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았으면...’이라고 책 앞장에 적힌 문구는 아마도 내가 나의 이런 소망들을 무의식적으로 꺼내 적은 것이 아닐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부디 그 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할 수 있는 한 크게 숨을 몰아쉬며 간절히, 간절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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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드레스 2009-06-1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솔직해서 더 빛나는 글...글은 내마음의 호수와 같은 것...
나도 솔직하게 글을 쓰고 싶은데...군더더기 많고 미사용어가 많은 내글과 비교하면
더욱 솔직해서 멋져보이는 이 글을 추천합니다.^^*
 
나르시시즘의 심리학 -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샌디 호치키스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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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기 전 흰 종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읽는 것은 책장 넘기는 재미에, 또 다음 내용이 궁금해 성마르게 진행되는 반면 내가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자꾸 머뭇거려진다. 무언가 불안하기도 하고 수이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해, 시작하기 전 괜히 책상을 정리하거나 인터넷 신문기사를 기웃거리며 나답지 않은 산만함을 보인다.


그런데 글을 쓸 때가 아닌, 책을 읽을 때도 이런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때란 대개 작가와 나의 핀트가 맞지 않을 때인 듯하다. 예전에 <대화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을 때 처음 이런 감정을 느꼈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불합리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나는 '부드럽게 거절하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지혜롭게 표현하기' 등의 책소개 내용을 보고 그 책을 선택했다. 좀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아뿔싸. 그 책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책이었다. 나의 거칠 것 없는 표현을 유연하게 만들 방법을 찾던 내가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은, 읽어 내려가면서 글을 써야만 할 때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낀 두 번째 책이었다. 왜냐고? 슬프게도 나는 저자가 원하는 독자-나르시시스트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불쌍한 희생양-라기보다는 저자가 비판해 마지않는 '나쁜 놈'-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우리 주변의 나르시시스트들의 '악질적인' 특징들을 줄줄이 열거하고 그들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대안이라는 것도 '나르시시스트들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니 상종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는 식이다. 쳇, 나르시시스트인 내가 책을 읽는 내내 위축되고 자책하다 화까지 내는 등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실, 몰랐다. 내가 나르시시스트인줄... 나는 자신이 황제인 양 부하 직원을 종 부리듯 하는 상사들, 주변 사람 모두 자신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몰상식한 사람들,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 등 이런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라 해서 이 책을 선택했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파렴치들로부터 나를 탈출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말 책을 읽으면서 '어머, 이건 정말 내 이야기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그 '맞어, 맞어'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닌 나의 잘못이었고,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점이 나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인가를 설명하자면... 우선 '현실의 나는 보잘 것 없는데 스스로 나는 무언가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그렇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나르시시즘의 일곱 가지 '죄악' 중 첫 번째 죄악이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어느 정도 이런 착각 속에 빠져있는 듯하다. 지금의 직장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능력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원하기만 하면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고, 언제든 지금의 답답한 상황들을 훌훌 벗어던져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있다고 믿는다. 나는 스스로 나의 이런 점을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책에 따르면 나르시시스트들은 내면의 공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환상에 빠져들게 되고 그 환상이 조금이라도 무너지게 되면 수치심이 폭발하면서 그 밑바닥에 깔린 분노를 쏟아낸단다. 인정하긴 싫지만, 저자의 분석은 나의 허약한 자존심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오만하고 우월한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노력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것, 불편한 상황들을 조금도 참으려고 하지 않는 것 등도 나의 단점들이다. 경멸 뒤에 감춘 시기심이나 내 느낌과 내 욕구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기심도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으악! 슬프게도 나는 책에서 언급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의 특징을 참 골고루도 갖고 있다.


어쩌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된 걸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저자는 부모의 역할을 중요하게 꼽는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조숙한 아이였다. 첫째라는 부담감도 있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힘들게 하거나 슬프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박감도 갖고 있었다. 그게 원인이었을까? 저자는 그런 조숙한 아이들은 '다 큰 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당함으로써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분노, 모욕, 무력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그들은 '최고 지휘관' 역을 맡아야만 하고 어떤 경쟁에서든 남을 이겨야 한다는 공포에 휩싸여 나르시시스트로 변질된단다. 그런 걸까? 이 마당에 부모가 나를 잘못 키워서라고 책임을 떠넘기자는 게 아니다. 그저 원인이 무얼까 이리저리 생각해 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나 때문에' 그동안 힘들었을 주위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만이었음을, 당당함이라고 여겼던 것이 무례함이었음을, 그리고 솔직함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들이 뻔뻔함이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하련다. 나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했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맙다. 부족하고 서투른 나를 그래도 가족으로, 친구로, 구성원으로 받아주고 감싸주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이 나르시시스트는 어찌 됐을지.


그나마 저자가 간략하게나마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놀랄 것 없다.'라고 이야기 해주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발견하더라도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고 노력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위로와 격려. 따뜻하다. 책을 통해 나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또 다른 경지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순간들. 책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에 관한 문구가 있어 마지막에 덧붙인다. 부디 내가 건강과 병듦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현명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자신에 대해, 자기의 불완전함에 대해 웃어 넘길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감정을 온전하게 느끼고 타인의 삶을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질이며, 진실과 환상을 분리하되 여전히 꿈을 간직할 수 있는 지혜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 의심 없이 올곧게 성취를 추구하고 즐길 있는 능력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진정한 자존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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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ghazikim 2009-03-1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읽다보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저자들이 생각하는 것은(그책 지은이의 성향이 진보든 보수든-이것을 구분하긴 어렵지만 세속적으로 나누면) 자기자신의 성찰입니다. 그 성찰이 기본이 되서 책도 쓰고 책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읽어 보진 않았지만 그런 것에 관한 책인 것 같고 그리고 짧게 대충 읽어본 이 서평에 대한 서평(?)은 자아 성찰에 충실하신 듯합니다. 하지만 "나답지 않은 산만함을 보인다"이부분은 글전체에서 보인 자기성찰과는 전혀 맞지 않은 것같습니다.

옥이 2009-03-1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하하하*^^* 마지막 반전이 제대로 인데요?!!! ㅋㅋ 저를 잘 아시는 분의 평가이니 반박을 할 수 도 없고 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죄악'을 반성했습니다. ㅋㅋ 괜히 읽었어요~~ 나쁜 놈인 나르시시스트로서 한 줄 한 줄 읽기가 많이 괴로웠습니다.

12월 드레스 2009-06-1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르시즘이란 단어에 대해 한번 생각볼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보는 시간...책이라는 선물은 읽는이의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오아시스같은 존재라고 할까요?ㅋㅋ
부족하지만 마지막 구절에 나와있는것처럼 건강한 나르시즘을 위해...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늘 깨어있게 행동하는것이 아닌지...그런 건강한 생각을 항상 가지고 살아야겠어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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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언론과 수많은 작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긴장감이 넘치는’, ‘생동감으로 가득 찬’, ‘긴박감으로 눈을 뗄 수가 없는’ 등등 역동적인 단어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굉장한 내러티브로 독자를 사로잡는다는 평이 넘치고 넘쳤다. 묻고 싶다. ‘당신도 정말 이런 느낌이었는가’ 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책을 덮고 난 후 나의 감상은 많은 사람들이 남긴 평과 엇갈렸다. 급박하고 긴장감이 넘치기 보다는 밋밋하고 아득한 느낌이었다. 활기가 넘치던 거리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아 스산하고, 건물은 마치 부드러운 케이크를 누군가 손으로 짓누른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고 묘사돼 있어도 난 그저 그랬다. 현실이 아닌 소설로만, 그것도 나와는 관계없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때로는 무지가 인간성 상실을 초래하기도 한다.’

요즘 신문과 뉴스를 잘 보지 못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해 자세히 보고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소설과 비슷한, 너무도 같은, 가자지구의 현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장면 1

갑자기 총격이 시작됐다. 사춘기 소년들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한 소년이 다리에 총을 맞아 쓰러졌다. 그러자 같이 달리던 친구가 총에 맞은 친구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못해 친구를 안은 소년의 머리를 잔인한 총알이 관통했다.

#장면 2

몇 미터 앞 다리 위에 한 남자가 총을 맞고 숨져 쓰러졌다. 한 남자가 숨진 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리로 향한다. 아직 총구를 겨누고 있던 저격수들은 남자를 향해 총알을 발사한다. 시신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또다른 한 발은 50센티미터 차이로 남자를 비켜갔다. 어딘가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자는 식은땀을 흘린다.

무엇이 소설 속 이야기고 무엇이 가자지구의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위 장면 중 하나는 허구고 하나는 '엄연한 현실'이다.

가자지구에 낭자한 핏자국들과 많은 사람들의 오열을 눈으로 보고 읽으니 그제서야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책은 허구라기보다는 현실을 담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소설을 읽은 후 아득했던 나의 머리는 아찔함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내가 알지 못했다고 해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트라우마적 상황을 밋밋하다고 느꼈다니...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다면, 나 아닌 바로 내 옆 사람 앞으로 단 하나의 총알이 빗나가기만 해도 호들갑을 떨며 기절했을 텐데 말이다.  전쟁에 대한 무지가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이 인간의 감수성까지 증발시키는 순간.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분노, 민간인을 볼모로 한 각 이익세력에 대한 비판 따위는 무지로 인해 사라졌다. 허탈하다.

나와는 반대로 사라예보의 시민들은 공포로 가득찬 상황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을 노리는 총알 세례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다리 위에서 희생당한 이름도 모르는 자의 시신을 수습한다. 길거리에 시체가 나뒹구는 상황은 '정상적인 사라예보'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므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첼리스트는 <아다지오>를 연주하고,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듣고 꿈을 꾸며 각기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에 빠진다. 숨만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이 인간이기에...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다고 주저리 주저리 말하지는 않으련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말로 내뱉어 정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뿐이다.

이들처럼 스스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어느새 신경이 무뎌지고 둔해졌으니... 속상하다.  나이를 먹음이 슬픔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평생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외모를 가꾸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청춘의 싱싱한 지각과, 부조리에 대한 치열한 분노와, 그리고 세상을 향한 순수한 눈물 한 방울. 젊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50세, 60세가 되어도 '이런 젊은이'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이다. 평생 진정 살아있기를, 그리고 약한 자극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예민함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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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드레스 2009-06-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브라보!!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