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1 (양장) - 제1부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틀을 깨는 일에는 항상 고통이 따른다

클라푸니 여왕의 결혼 비행이 그랬고, 103호의 손가락 원정이 그랬다. 각종 전투에서 새로운 전법을 시도하는 일도 그랬고 개미왕국에 도랑을 만드는 일도 그랬다. 모두 죽을 고비를 넘겼고 실제 많은 개미들이 죽었다. 개미들의 역사는 끊임없는 도전과 그 도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죽음들로 점철돼 있다.

실은 인간도 마찬가지. 벽에 낭자한 핏자국, 갑자기 몰려드는 쥐떼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널려있던 해골들. 지하동굴로 내려간 사람들은 모두 밀폐와 어둠에 대한 두려움,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던 이들이다.

자기 벽을 깨야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

103호는 인간들이 애지중지하는 특별한 개미가 되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도망가고 싶었고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틀을 무너뜨렸기에 그는 인간에게 특별한 '혁명개미'가 되었다. 조나탕도 그랬다. 어두움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기에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발견했고 '리빙스턴 박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개미의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좁은 현실에 안주하며 나름 안락한 생활을 할 것인가,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 더 풍부한 삶을 살 것인가? 이 대답에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겠다, 고 말하려던 찰나. 아차차... 잊은 것이 있다. 성공한 주인공이 아닌... 실패한 희생자들... 내가 103호가 아닌 그를 따르던 23호나 24호, 9호나 큰 뿔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들은 모두 원정 과정에서 아쉽게도 사그라진 이들이다. 클라푸니 여왕이 아닌 교미 여행에서 죽은 수많은 암컷들처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도전하겠는가?

인생은 선택이다.

그래, 인생은 선택이다. 현 세계의 안락함이나 익숙함, 반면 새로운 세상이 주는 풍부함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겠다. 그렇다면 나는... 혹 실패하거나 죽임을 당하더라도 후자를 선택하겠다. 후훗, 그러나 나의 이런 선택은 내가 혁명적인 기질을 타고 났거나 남들보다 도전정신이 더 강하고 호기심이 풍부해서가 아니다. 현재의 틀이 답답해서. 아무 생각없이 주어진 루트대로 움직이는 개미의 지하동굴 세계가 지루하고 숨 막히다. 개미의 본능을 갖지는 못한 채 그저 모습만 개미로 태어났나 보다. 태어났으면 그저 본능을 따라 일개미면 일개미, 유모개미면 유모개미의 일을 하면 될텐데 어찌된 일인지 나라는 개미는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진다. 추상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 개미의 본성인데 나는 개체를 인정하지 않고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는 개미집단의 전체주의가 끔찍하다.

문제는... 아쉽게도, 아뿔싸, 내가 103호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 나는 아쉽게도 원정대에서 낙오한 이름도 없는 개미였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결국 해답은 현재에 있다.

결국 해답은 실패냐, 성공이냐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성패를 떠나 한 걸음 한 걸음에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을 때, 새로운 탈출 그 자체로 즐거울 수 있을 때, 모든 이의 도전은 그것으로 이미 '완성' 아닐까.  나부터, 그리고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해, 아니 깨달았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해 좌절하고 절망하고 주저앉아버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몸소 이런 열정과 즐거움을 실천했다. <개미>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무려 12년을 투자하면서. <개미>의 성공 이후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 작가는 '달라진 것은 없다. 오직 지금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에만 열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결국 작가는 작품을 통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 '현재를 사는 법'을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작가가 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내가 특별히 이 점을 주의 깊게 들은 것일까?

<개미 세계 전설> 

가장 중요한 순간은? 

-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현재에서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과 맞서는 것이다. 만일 여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병정개미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여왕이 죽었을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 살아서 땅위를 걷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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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언니 2009-04-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중이사랑..
 
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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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순교도적인' 앨리스의 사랑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1. 배려하되 소심하지는 말 것
    : 상대방의 입장이나 기분을 배려하되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자책하지는   말 것. 


2. 노력하되 미련하지는 말 것
    : 둘의 관계를 위해 애쓰되 부당한 대우나 무시를 아무렇지 않게 참지는 말 것 


3. 존중하되 비굴하지는 말 것
    :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갖되 결코 비굴하게 사랑을 구걸하지는 말 것..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앨리스의 사랑은 완전한 실패다.  

-지금 만날까요?  

-글쎄, 좀 피곤한데.  

-그럼 내가 그 쪽으로 갈까요? 그건 괜찮겠어요?  

-음 그럴까?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앨리스는 늦은 저녁, 에릭을 오게하기 보다는 자신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에릭의 집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에릭은 앨리스의 감정이나 기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만 떠들어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앨리스가 둘 사이의 관계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할 때마다 에릭은 뭐든 복잡하게 만드는 여자라며 앨리스를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에릭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시받고 입을 다물고 더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녀는 왜 그랬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신감의 결여에 있는 듯 하다. 그녀는 에릭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에릭이 화를 내지는 않을까, 그것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 같은 불안감의 깊은 바닥에는 자신이 버려진다는 것, 거절을 당할 수 도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사소한 것으로 상대방을 피곤케 하면 안 되지.' , '그래 이건 내가 잘못한 거야.', '그 사람 말처럼 내 성격은 정말 이상한가봐.' '배려해야지, 그게 사랑인걸.'  

이런 생각들의 밑바닥에는 관계의 단절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자아는 비정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건강하다는 자신감.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거만한 태도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당당함. 설사 관계가 끝나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실함. 앨리스의 사랑에는 이런 요소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결국, 사랑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건강한 자신감과 자아가 전제돼야 하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따뜻한 애정.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합리적인 신뢰와 깊은 존중. 이런 것들이 뒷받침 되고 나서야  배려와 소심, 노력과 미련, 존중과 비굴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과정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부족한 면을 채워나가는 것. 당당하고 건강한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 스스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건강하고 당당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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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ghazikim 2009-03-17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늘 참는다고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래 같이 있다보면 그것은 마음에 병이되고 그 마음에 병은 혼자만 병이 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언젠가는 점염되거나, 아니면 한사람이 그병으로 감정이 폭발하여 서로의 관계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존중한다는 것과 인내한다는 것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고 말씀하신대로 서로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믿음은 스스로의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댓글은 저만달고 아무도 안다는 군요....쩝.. 방문자도 저 밖에 없고...

옥이 2009-03-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존중과 인내의 차이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배려와 비굴함의 차이도 이제야 깨달았구요. 그래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주눅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 방문자는 벵가지김님 밖에 없어요~~~ 호호 댓글두 유일하구요~~ 제 서재에 유일한 활력소 입니다. 벵가지김님은~~ 자부심을 가지세욧 !! 호호호

꽃순언니 2009-04-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중이사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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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을 해서, 산다는 것.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행복하기는 커녕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살을 할 만큼이나... 책이 너무나 많은 일을 한꺼번에, 그것도 이런 상처 쯤이야 온 대한민국 여성의 일상이라는 식으로 쏟아내 사실 결혼에 대한 큰 회의가 든다. 철없는 소녀처럼 결혼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인공들의 고통만은 비껴가련다.

이들의 아픔에서 비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자살을 선택한 영선의 결혼생활부터 살펴보자. 희생. 그녀의 문제는 '희생'에 있었다. 자신의 공부를 포기하고 남편의 성공을 뒷바라지한 그녀의 헌신. 희생과 헌신? 그래,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덕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먼저 상대가 그만한 희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나 한결같이 상대의 헌신에 대해 마음 깊이 고마워 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성공에 비해 초라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세상 누구보다 소중히 여길 사람. 그래야만 헌신을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상대를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은... 희생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억울해 하지도 말고, 보상받으려 하지도 말고, 그저 줬으면 준대로 끝나야 한다.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라면 절대로 자신의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훗날 허무한 자기 마음을 추스리기 어려울 테니까. 더욱이 그 희생이 도피처가 돼서도 안 될 것이다.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가 힘겹다고 해서,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을 병행하기가 힘에부치다고 해서, 혹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뒷바라지의 길로 들어선다면 그것은 평생 더 큰 한을 가슴에 떠안는 꼴이다. 나는 여자니까 당연히... 라며 무개념의 진공 속에 자신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상대방의 헌신에 한결같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또 자신의 희생을 희생이라 여기지 않을 만큼의 넉넉함'

이혼? 그래 이혼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다. 유학생 부부들이 다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부인이 생계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하다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왜 여자만 가사일과 육아를 책임져야 하냐며 왜 여자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냐며 당당하게 싸운 혜완의 선택이 훨씬 용기있다. 애초에 여성을 가정부로 여긴 남자와 결혼하지를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하지만 싸움에도 대상과 방향이 중요한 듯 하다. 불합리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은 때때로 자신을 힘겹게 만든다. 혜완이 잘 정돈돼 있는 경혜의 집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가정'을 그리워하듯 말이다. 여자는 집에 들어앉아 살림이나 하기를 바라는 남편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기 위해 싸웠으면 어땠을까. 그 변화에는 물론 자기 자신의 변화와 양보가 포함됐어야 했고. 혜완이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였다. 상대방만 잘못됐다 비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도 불완전한 존재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품을 수 있는 그런 넉넉한 사람이었다면... 물론 이런 아쉬움이 혜완은 이혼당해도 싸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우가 혜완을 향해 '왜 그가 이혼하고 싶어했는지 알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마치 주먹으로 때려놓구서, 상대방이 아파하며 신경질을 내니까 신경질을 낸다고 나무라는 꼴이다. 우리 모두는 성숙한 인간이 아니며, 그래서 결국 각 개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한다.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하는, 동시에 자신도 양보할 줄 사람. 그리고 각자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힘껏 애쓰는 사람.'

허영 덩어리 경혜는 어떤가. 그녀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조건에 치우쳐 선택한 결혼이었고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황폐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게다가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은 경혜를 재미없어하며 바람을 피기 시작한다. 경혜도 외로움을 못 이겨 같이 맞바람을 피운다.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위자료를 받을 수 있고 법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확보했다 해도 경혜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황폐할 것이다. 결혼을 할 때 더욱더 고민해 봐야 할 사항은 능력도 조건도 아닌, 사람 그 자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 진다.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고 쭈그러져 가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타인의 눈이 아닌 자신들만의 행복을 열심히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나 또한 상대에게 이런 사람일 수 있을까? 여성 해방이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거룩한 개념들을 떠나 남과 여 모두 이런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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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언니 2009-04-1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힘내여성 다중이사랑..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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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 일까? 그녀는 바람처럼 자유로운데 반해 나는 철창안에 갇힌 사자처럼 힘이 빠진게. 용기? 난 용기가 없어서 이 모든 것들을 훌쩍 벗어놓고 떠나지 못하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떠나기 위해서는 무슨 대안이 있어야 하니까. 대안이 아니더라도 계획은 있어야 하니까. 지금 내가 당장 외국으로 떠난다 하더라도 난 지금 마땅히 무엇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다 때려치고 여행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니까. 그 발판을 만들기 위해 난 오늘도 인내의 시간을 보내는 것 뿐이다. 현실이 싫다고 도망치듯 짐을 싸 떠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긴,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그 발판을 위해 현재를 꾸역꾸역 보내는 것 자체가 용기가 없는 걸까? 허허. 그렇게 비난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세운 나의 법칙이다. '다른 시간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볼모로 잡아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말이나 '내가 투자할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한 인생은 한 순간도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그녀의 충고도 결코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난 지금의 것을 잃어버리기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아니니까. 언제든지 털어버리고 날아갈 수 있지만, 그리고 지금껏 그래왔지만, 지금 내가 이 시간을 버티는 것은 그것이 꿈을 위한 투자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버리는 것은 쉽다. 오히려 싫은 것들을 부등켜 안고 있는 것이 더 큰 훈련이다.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에게 있고 나에게 없는 그것은 뭘까. 뻔뻔함. 나는 뻔뻔함을 꼽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뭐라고? 뻔뻔함 이라고? 야! 넌 충분히 지금도 뻔뻔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의 말처럼 '관습에 저항한 자에게 끊임없이 날아들 전방위 공격이 내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게 할 뻔뻔한 자아를, 완전히 다름 궤도의 삶을 구축했는지 여부가 선택의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다.' 아팠다. 날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자들의 깐죽거림이. 너는 왜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딴지를 걸어서 분란을 일으키냐는 '평화주의자'들의 못마땅한 눈빛이. 날 향한 돌팔매와 웅성거림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심지어 자책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난 '모난 돌'이다. 계속 뚜들겨대는 망치가 아파서 나는 모난 돌인데 동그란 돌인척 그들 사이에 끼어앉아 있었다. 나의 모남을 감추느라 이불을 뒤집어 써보기도 하고 목도리를 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띌 뿐이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이불과 목도리로 인해 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냥 스스로 나 자신을 인정해주자고... 괜히 어설프게 그들인 척 하지도 말고, 나의 모습을 혐오해 다른 이가 되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냥 내 모습을 받아들여주자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었던가, 내가? 타인의 시선과 질책에 그렇게 신경쓰던 사람이던가? 우습다. 어짜피 그런 손가락질은 '한심한 것들'하며 콧방귀 뀌고 넘어가던 난데, 갑자기 왜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나도 이런 면이 있구나, 그 인간적인 모습에 따뜻한 시선이 머문다. 하지만 감성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은 여기까지! 어짜피 동그라미가 못될 바에야 모난 돌은 모난 돌임을 깨끗하게 인정하자. 오히려 더 날카롭고 더 까칠하게 날을 세우며 내 뒤에 올 모난 돌들을 위해 망치를 맞아야지. 신경 날카로운 고슴도치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빵빵해진 복어처럼. 그래, 나는 모난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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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언니 2009-04-16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뻔뻔한 다중이사랑..♡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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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글을 쓰고 싶어할까?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일. 그리고 이제 진짜 시작해야 할 일. 글. 그런데 정작 본질적인 문제, '왜' 내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지에 대해 그동안 차분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듯 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 본다.

첫번째 이유는 자유로움이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종속되지 않고 누군가의 눈치볼 필요도 없는 무한한 자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은 것을 느끼고 그것들을 거리낌없이 말하고 싶다는 욕망. 말도 안 되고, 심지어는 한심하다고 까지 생각되는 온갖 구속과 규제와 억압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 '규격화'된 모든 포장들, 겉에서 보기에는 번지르르 하지만 안에서는 질식하기 직전의 내가 담겨 있는, 꽉 막힌 상자에서부터 탈출하고 싶다. 그 탈출구가 바로 글이다. 결국 나에게 있어 글이란, 단순히 글 자체가 아닌,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그래, 이것 저것 꾸미지 말고 뼛속까지 솔직히 뒤집어 보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현재의 삶, 집과 회사를 오가는 이 한심한 나날들을 뒤집고 싶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버스를 타고, 똑같은 곳에 나와,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재미없는 일로 시간을 떼우며 괴로워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쳇바퀴. 학창시절에도 그랬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똑같은 자리에 앉아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로보트 같은 비인간성. 그런 비인간성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으나 결과는 '회사'라는 더 끔찍한 쳇바퀴로 옮겨왔을 뿐이다. 난 아무래도 남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삶에서는 완벽한 부적응자인가 보다.

단순히 '자유를 찾고 싶다'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바람직하다', '성공적이다',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다른 면에서 바라보면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진보나 발전이 퇴보나 후퇴일 수 있다고 소리치고 싶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성공하기 위해, 혹은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미리 만들어진 터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터널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을 실패자로 여기는 시선들. 게다가 환기도 안 되는 그 터널 안에서도 조금의 답답함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 외쳐보고 싶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내 생각만 맞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에는 옳고 그름이 없는 법이니까. 다만 그저 답답해서 말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 뿐이다. 인간과, 사랑과, 애정과, 예의와, 물질 이외의 소중한 가치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는 사람들로 인해 나같은 사람들이 받는 상처들에 대해서 말이다. 혹 모른다. 터널 밖으로 튕겨져 나온 나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에 대한 저항하고 싶은 걸지도. 온갖 '규격'에서 벗어난 것을 이상한 것으로, 별난 것으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의 그 이상한 고집이 진저리쳐지게 무섭다. 싫은 것은 싫다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다. 같은 내용을 말해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천양지차로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저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고집쟁이', '다루기 힘든 아이', '까칠한 불만투성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글로 말하면... 아마 나에게 다른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내 생각이 너무도 낱낱이 밝혀지기에. 너무 솔직해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제대로 까발려지는 낯선 떨림과 수치심. 하지만 이에 대한 공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다. 그런데 이것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평생에도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울림'을 주고 싶다는 욕심. 가능할까? 근대 미술의 어머니,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는 "내 작품이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실천했다. 나는 그녀처럼 거창하게는 아니더라도 내 글로 인해 눈물짓는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내 글로 인해 따뜻함이 전해졌으면... 이렇게 조악한 끄적거림으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을지, 아니 무언가를 쓸 수나 있을지 사뭇 걱정이 된다. 자유롭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서 타인의 감동을 구하는 엄청난 욕심까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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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언니 2009-04-1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쓰는 똘똘이사랑..

김수지 2009-06-1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글을 술술 내뱉는 ...글을 쓰는 중간중간...예리하게 쏟아지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대단해욧!!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