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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순교도적인' 앨리스의 사랑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1. 배려하되 소심하지는 말 것
: 상대방의 입장이나 기분을 배려하되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자책하지는 말 것.
2. 노력하되 미련하지는 말 것
: 둘의 관계를 위해 애쓰되 부당한 대우나 무시를 아무렇지 않게 참지는 말 것
3. 존중하되 비굴하지는 말 것
: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갖되 결코 비굴하게 사랑을 구걸하지는 말 것..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앨리스의 사랑은 완전한 실패다.
-지금 만날까요?
-글쎄, 좀 피곤한데.
-그럼 내가 그 쪽으로 갈까요? 그건 괜찮겠어요?
-음 그럴까?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앨리스는 늦은 저녁, 에릭을 오게하기 보다는 자신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에릭의 집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에릭은 앨리스의 감정이나 기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만 떠들어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앨리스가 둘 사이의 관계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할 때마다 에릭은 뭐든 복잡하게 만드는 여자라며 앨리스를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에릭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시받고 입을 다물고 더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녀는 왜 그랬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신감의 결여에 있는 듯 하다. 그녀는 에릭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에릭이 화를 내지는 않을까, 그것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 같은 불안감의 깊은 바닥에는 자신이 버려진다는 것, 거절을 당할 수 도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사소한 것으로 상대방을 피곤케 하면 안 되지.' , '그래 이건 내가 잘못한 거야.', '그 사람 말처럼 내 성격은 정말 이상한가봐.' '배려해야지, 그게 사랑인걸.'
이런 생각들의 밑바닥에는 관계의 단절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자아는 비정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건강하다는 자신감.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거만한 태도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당당함. 설사 관계가 끝나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실함. 앨리스의 사랑에는 이런 요소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결국, 사랑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건강한 자신감과 자아가 전제돼야 하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따뜻한 애정.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합리적인 신뢰와 깊은 존중. 이런 것들이 뒷받침 되고 나서야 배려와 소심, 노력과 미련, 존중과 비굴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과정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부족한 면을 채워나가는 것. 당당하고 건강한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 스스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건강하고 당당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