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동대문 밀리오레 앞 상설무대. 비쩍 마른 남자애가 뿌듯함을 애써 감추며 멋있는 척을 하고 있다. 그 앞에서 그의 손짓 하나 하나에 환호하는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기집애들.

몇 년만 지나봐라. 상황은 반전될 테니. 누가 삐쩍 마른 딴따라는 좋아하겠냐.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나는 눈높이의 이 엄청난 변화, 참. 기가 막히다.


결혼 적령기에 인기남과 비인기남의 기준은 단연 그 남자의 '능력'이다. 이에 비견되는 여성의 판단기준은 단연, 단연 '미모'다. 어떤 직업이 더 능력있는 직업이냐, 어떤 얼굴이 더 예쁜 얼굴이냐는 시간과 장소 등에 따라 변화하지만 능력이 있고 예뻐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여자들이야 알 만하다,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 지고 그에 따라 여성 인권이 과거보다 많이 신장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따라서 여성이 사회에서 능력을 갖기란 여전히 남자들보다 힘들다. 그래서 여자들이 능력있는 남성을 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생존이다. 집이 없다거나 먹을 것이 없다거나 자식 교육비가 없다거나 하는 그런 삶은 누구든 우너치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금세 시드는 외모를 여성의 평가 기준, 그것도 거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뭘까.


상상을 해 봤다. 복지가 완벽해 지는 거야. 그래서 돈이 없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완벽한 소비를 하며 풍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거야. 그럼 그 때, 남녀는 서로 무엇을 기준으로 사랑에 빠질까.


남녀를 불문하고, 아마 상대방의 외모에 따라 '호감도'가 결정될 것이다. 그것은 사실, 남녀 불문이다... 그런 것 같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좋으면 좋은걸 어쩌란 말이냐. 외모와 함께 그 사람의 성격과 인간성 등도 고려 대상이 되겠지만 그래도 일단 '호감 가는 외모' 정도는 돼야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생기는 거다. 키 큰 여자가, 얼굴은 못생겨도 되는데 자기보다 키 작은 남자는 싫다든지, 뚱뚱해서 무조건 마른 여자가 좋다는 남자. 어쩔 거냐. 싫다는데...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데...


무조건 외모만 보고 골빈 싸가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쌍꺼풀이 없다고 모두 돈 쳐들여 수술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외모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게, 그럴 수밖에 없는게, 우리 모든 인간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인정하긴 싫지만, 인간이란 그 정도 수준이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자기만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외모를 평가한다.)


작가는 이런 우리들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외모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세태를 시시하게 만들고 싶다 했다. 못생긴 외모와 가난한 무능력을 무시하고, 그 사람 본연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성숙함을 추구하고 싶다고 했다. 와! 그러면 세상은 참 따뜻해지고 행복해지고 안락한 곳이 되겠지? 와글와글, 바등바등, 아득바득 하는 들끓음이 사라지고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할 테다.


근데, 그럼 너무 시시해지는 거 아닌가? 우리의 본성인데, 그게 솔직한 심정인데, 그걸 시시하게 만든다면 우리 자신도 덩달아 시시해 지는 거 아닌가? 잔잔해지고 고요해지면 그거 너무 심심해 지는 거 아니야?


그래서 작가와 반대로 가기로 했다. 더 와글와글, 더 궁시렁 궁시렁, 美에 관해 더 시끄럽게 떠들기로 했다. 아름다움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능력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 거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따지고 잴 생각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서부터, 누가 아름답고 예쁜 사람인가 기준을 새로 만들자고 시끄럽게 떠들고 다닐 작정이다. 성형 부작용에서도 벗어나자고 사람들한테 강요하고, 성격 더러운 것들을 보면 치를 떨며 분개하고 욕해줄 거다.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을 적극 활용해 더욱 시끄럽고 인정사정 없고 엄격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


미안하다. 실컷 재미있게 소설을 읽고 나서 당신의 생각에 반박해서. 외모를 따지고 재는 우리들의 본성을 너무 자책하지 말고 죄스럽게 여기지 말자. 우리 스스로의 본성을 시시하게 만들지는 말자는 거다. 타인의 외모나 외적인 분위기, 상대방의 금전적인 능력. 이런 것들에서 당신 스스로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느냐. 차라리 더 득달같이 그런 것들에 달라붙어 현재의 선동된(누가 선동했는지 우리도 잘 모르는) 기준 자체를 통째로 바꿔 보자는 거다. 우리의 이 내기, 어떻게 결론이 날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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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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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 말이 많다.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을 맞이하기에 너무 젊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는 둥(에피쿠로스),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유치한 표현이라는 둥(세네카), 하루의 1/3을 열정, 친구, 책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사상가가 될 수 없다는 둥(니체). 각기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사람들이, 참 많은 말들을 했다.


그들의 말은 나를 위로하고 나를 감싸 안는다. 때로는 정신 차리라고 혼쭐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울고 있는 나를 질책하기도 한다. 바보 같다고. 당대 최고 지성인들의 지혜로운 말들은 그렇게 나를 기른다.


우리를 성숙케 하는 그들의 말. 이 많은 사람들의, 많은 말들 중 그들이 진정 내뱉고 싶었던 말은 뭘까? 왜 이들은 이렇게 많은 말들을 했을까. 왜 이들은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때로는 가르치며, 때로는 설득하며, 때로는 강요하며. 왜 그랬을까.


에피쿠로스는 '행복'에 집착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 직관적으로 대답하는데 서툴다며 어떤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인지 철저히 고민했던 그. 그는 그렇게도 행복하고 싶었나보다. 생각을 한 걸음 진전시켜 보면, 그렇게도 행복하고 싶었던 그는, 현실 속에선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사색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그래도 행복에 다다르지 못해 한 평생 어찌하면 행복한가에 그리도 골몰했나 보다.


세네카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나 보다.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걸."

그의 이 한마디 말에 마음이 아리다. 삶이 통째로 눈물을 요구했던 그의 삶. 매 순간 순간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치받아 올라왔을 목 메는 그의 슬픔. 한 고비 한 고비 넘기가 너무 힘들어 발에 채이는 자잘한 돌멩이에는 아예 초연해진 그다. 소송에서 패하거나, 가난하거나, 유배당하거나, 뭐 다를 바 있냐는 심정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쇼펜하우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짙은 고독이 물씬 배어나온다.

어떤 대화가 그 자신의 독백만큼 지적이고 유쾌하겠느냐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엔 그 어느 누구로부터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었던 그의 처절한 외로움이 깊게 담겨있다. 천박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값싼 동질감을 얻느니,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하라고 청년들에게 조언하던 그였다. 최고의 지성인으로, 철학자로 지금까지도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쇼펜하우어지만, 현실에선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천재는 불가항력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 괜한 세간의 무식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된 철학 흐름이다. 그의 철학에서 되려, 그가 얼마나 상처를 입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싶었을까. 대중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자들의 말은 지금까지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울림을 준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엔 쓰라림이 있고 고독이 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들. 그러나 그렇지 못해 몸부림치며 혼절했던 그들의 하루하루들. 그리고 그 순간들. 그들의 말은 역설적으로 너무도 불행했으며 힘겨웠고 외로웠던 그들의 인생,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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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2010-04-1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네카가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는 아마 현실에서의 실패도 있었을껄?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황제 네로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지 않음을 느꼈고,
무력이 동반되지 않은 학문에 대한 무력감도 느꼈을 것이고,
세네카 정도의 두뇌라면 자신의 죽임도 예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세네카는 네로에 의해 자살을 강요 받으니..

옥이 2010-04-20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세네카가 그렇게 삶에 초연한 철학을 갖게 됐나봐. 울구불구 해봤자 변화되는 건 없으니까 슬픔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웠나봐. 그 사람들 하는 말을 잘 살펴보니까 그 사람들의 처지나 상황이 보이더라. 어쩌면 철학자들은 우리보다 삶이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

오랫만에 댓글두 달아주구 고맙네~ ㅋㅋ 그동안 서평을 너무 안 써가지구~ 잘지내지? 밥 사러 가야되는데~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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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만 살면 그는 인격적으로 성공한 사람일 게다.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을 통해 제시한 것처럼 불행을 통해 성숙해 나가고, 소소한 일들에 감사하고, 친구에게 적당히 아첨할 줄도 알고. 이대로 행동할 수만 있다면 그는 성인(聖人)이다. 허나 뭐든 말은 참 쉽다. 이런 문제로 골머리 싸매며 고민했던 프루스트, 과연 그의 삶은 성공적이었으며 타인으로부터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칭호를 받았을까? 그는 과연 행복하고 넉넉한 삶을 살았을까?


배울 만한 구절들이 너무 많아 딱 한 가지 주제만을 뽑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서평은 자유롭게 써야지, 다짐했는데 처음부터 삐딱선이다. 그리 악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암튼 비틀어 보는 시각은 타고났나 보다.


그래도 귀엽긴 하다. 무의식적으로도 무언가 딴지를 걸고자 하는 나의 심술맞은 표정이. 걸리기만 해봐라, 기회만 엿보는 나의 준비된 표정이. 철없는 망아지처럼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리 미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눈꼴 시린 자아도취겠지?


이왕 어이없는 자아도취에 빠진 김에,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과 나를 감히 비교하자면, 우리는(우리라고 표현하니 재미있다. '우리'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이렇게 낯간지럽고 어색한 단어가 됐을까.)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 (와! 내가 이렇게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정제되지 않은 글쓰기는 때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사색의 깊이와 인식의 심오함은 천지차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친근하게 느끼고 '우리'라고 묶어버리면 아무리 대단한 프루스트라도 뭐 어쩌겠는가, 그냥 묶이는 수밖에. 갑자기 그들과 동일한 그룹에 속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지니 이는 무슨 조화인지. 역시 자유로운 상상은 신선한 창조물을 만들어낸다. 하하.


그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는 그에 걸맞게 더욱 분발해야 하겠구나.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어려울 거 있나!


p.s. 대단한 서평이 나왔구나! 나답지 않은, 나다운가? 가끔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도 좋다. 누가 볼 땐 뭐하는 짓인가,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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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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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다'


고종에게 러시아 커피를 끓여주었던 조선 최초의 여성.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신선하다. 게다가 술술 읽히는 쉬운 문체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버렸다. 속고 속이며 큰 판을 벌여가는 따냐의 배짱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 한 번 잡은 이 책을 도중에 덮기 힘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까지 갈증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빨아들이고 난 후에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래서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사기를 치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내친 그녀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그 곳에서 문학 까페를 열었다는 결말.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경쾌한 사기꾼의 쿨함? 따냐에 비해 매사에 질척거리는 나의 어리석은 감정들? 이에 대한 반성? 아니면, 아기는 아기고 사기는 사기죠, 라며 이반을 버린 따냐의 독하고 매정한 성격? 상황에 의해 형성된 개개인의 성격 고찰? 이에 대한 이해? 도대체 이 소설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꽤나 공허했다.


그러다 문득 소설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생각이 미쳤다. 소설은 항상 무언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어야 하고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 꼭 지혜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 그냥 소설은 재미있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인해 두어 시간, 현실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고 한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는 성공한 것은 아닐는지.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태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지만, 정작 나조차도 소설 속에 무언가 인생의 지혜나 교훈이 없다면 그 소설을 읽은 시간이 낭비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재미! 즐거움! 몰입! 상상력! 창조의 기쁨! 일상에서의 해방!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가벼움(가볍다고 치부할 것들이 아니지만)이 아닐까. 진의 파악이나 일상에 대한 고민도 좋지만 인생은 즐거운 것인데 나 혼자만 너무 진지하고 우울한 것은 아닌지. 아비를 잃고 사랑에도 속고 결국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따냐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들을 짜릿하게 즐기며 자유를 만끽한다.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울고 웃는 것도 다 나에게 달려있나 보다. 아니, 울고 웃는 것 사이에 그리 큰 간극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끔은 많은 생각의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앉은 자리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독자를 매혹시켰다면 소설의 작가는 그것으로 대성공이다. 커피에는 저마다의 다른 인생 이야기가 얽혀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커피를 소재로 따냐의 인생을 소설을 엮어냈다. 소설은 이야기고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의 이야기들을 펼쳐 보이는 작가다. 흠. 독자를 매료시킬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내 인생에 쓰는 것은 오롯이 작가인 나의 몫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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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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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치기 힘든 공을 치거나 잡기 힘든 공을 잡기 위해 똥줄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의 모토다. 두 가지에 대해 고민했다.


첫 번째 고민은, 그렇다면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인가, 라는 문제다. 마지막 팬클럽의 모토는 어찌 보면 그럴 듯하다. 과도한 경쟁이 문제라는 것이다. 인생을 즐기면서, 무엇인가에 내몰리지 않고 쫓기지 않으면서 살라는 거다. 팬클럽의 구성원들은 해변에서 달리기 훈련을 하면서도 전력질주를 하지 않는다. 50미터 짧은 거리를 완주하지 못한 채 바다로 뛰어든다. 바다가 아름다워서다. 올드스타즈 동호회와 경기를 하면서도 굴러간 공을 찾으러 간 수비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노란 들꽃이 아름다워서였다. 매사에 이런 식이라면 도무지 아무 일에도 욕심내지 않고,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옳은 삶일까.


인간은 누구나 게으름 피우길 원하고 나태해지길 원한다. 꼭 돈이나 승진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성취하려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견뎌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 국민요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김연아도 허리의 통증 때문에 신음하는 날들이 있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시각에서 보면 허리에 무리를 주면서까지 훈련에 임했던 김연아는 빵점짜리 선수다.


그러나 작가가 하려고 했던 말은 아마 모든 면에서 게을러라, 라는 것은 아니었을 게다. 열심히 무엇인가에 매진하되 그 무엇이 무엇인가, 에 대해 고민하라는 충고를 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남들이 전력질주하니까 나도 무작정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일 게다. 돈을 모으고 더 큰 집을 사고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지는 말라는 말이다. 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나 또한 그의 삶의 동의하며, 그의 충고대로 살기 위해 고민 중이고, 나름 실천 중이다.


여기서 두 번째 고민이 시작됐다. 나는 그렇다 치고, 나의 남편이 이런 삶을 산다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고 인간적인 여유를 누리고 싶다며 소설 속 주인공처럼 6시간 근무하되 월급은 적은 직장에 다닌다면. 나는 과연 그런 남편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삶을 살아도 되지만 남편이라면... 솔직히 참 고민된다.


여성이 능력 있는 남성을 만나 가정을 꾸려야 하는 이유는 그저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다. 집이 있어야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자식들을 공부시키려면 어느 정도 소득을 유지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여섯 개 학원을 보내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자식이 배우고 싶다는 피아노 학원 등을 보내려면 돈은 필요하다. 병이라도 걸린다면? 저축을 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예기치 못한 불상사에 대처하기 위함일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큰 병에 걸렸다는 자체로도 힘든 일인데 수술비 천만원이 없어 여기저기 손을 버린다면 인생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주거 공간이나 의료비, 교육비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복지제도가 마련돼야 할 텐데 우리나라의 수준은 아직 이에 미치지 못한다. 돈 많은 남자 혹은 여자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의 모습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그들은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 아니라,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현 사회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그를 나의 결혼 상대자로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사람은 나의 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의 이면에는 사실 그의 경제적인 능력이 전제돼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가치관이나 인격, 성숙의 정도 등을 운운하지만, 사실 더 솔직하게 까발리면 그의 연봉이 얼마냐가 더 중요한 판단기준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입에 풀칠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반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며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내모는 현 사회에서 그래도 꿋꿋이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양자 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안다.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를. 하지만 자꾸 흔들린다. 눈이 흐려진다. 그래서 추하고 비굴해진다.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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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가지 김 2009-10-2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간만의 방문, 오래전에 읽은 책, 하지만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연배가 저와 비슷해서 쉽게 공감할 수 있었고 치열한 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주는 책으로 기억하여 따뜻한 느낌이 었습니다. 경쟁....그 각박함... 외로움...하지만 소설은 소설이고 또 저는 일등은 아니지만 살기위해 발버둥 치야 하는 현실이 소설속 주인공 보다 못나 보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당당함.... 안치고 안받고...그럴 수 있을까요...

옥이 2009-10-2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댓글을 달까, 이 말을 썼다 저 말을 썼다 계속 지우고 그랬습니다. ㅋㅋ 주저리 주저리 이 말 저 말 늘어놓ㄷ가 괜히 겸연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지우고 또 지웠습니다.. 흐흐. 그냥 하고 싶은 말은, 벵가지 김님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고맙다는 거. 그리고 가을이 되니 또 뵙고 싶다는 거.. 그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