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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다'
고종에게 러시아 커피를 끓여주었던 조선 최초의 여성.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신선하다. 게다가 술술 읽히는 쉬운 문체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버렸다. 속고 속이며 큰 판을 벌여가는 따냐의 배짱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 한 번 잡은 이 책을 도중에 덮기 힘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까지 갈증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빨아들이고 난 후에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래서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사기를 치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내친 그녀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그 곳에서 문학 까페를 열었다는 결말.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경쾌한 사기꾼의 쿨함? 따냐에 비해 매사에 질척거리는 나의 어리석은 감정들? 이에 대한 반성? 아니면, 아기는 아기고 사기는 사기죠, 라며 이반을 버린 따냐의 독하고 매정한 성격? 상황에 의해 형성된 개개인의 성격 고찰? 이에 대한 이해? 도대체 이 소설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꽤나 공허했다.
그러다 문득 소설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생각이 미쳤다. 소설은 항상 무언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어야 하고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 꼭 지혜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 그냥 소설은 재미있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인해 두어 시간, 현실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고 한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는 성공한 것은 아닐는지.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태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지만, 정작 나조차도 소설 속에 무언가 인생의 지혜나 교훈이 없다면 그 소설을 읽은 시간이 낭비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재미! 즐거움! 몰입! 상상력! 창조의 기쁨! 일상에서의 해방!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가벼움(가볍다고 치부할 것들이 아니지만)이 아닐까. 진의 파악이나 일상에 대한 고민도 좋지만 인생은 즐거운 것인데 나 혼자만 너무 진지하고 우울한 것은 아닌지. 아비를 잃고 사랑에도 속고 결국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따냐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들을 짜릿하게 즐기며 자유를 만끽한다.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울고 웃는 것도 다 나에게 달려있나 보다. 아니, 울고 웃는 것 사이에 그리 큰 간극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끔은 많은 생각의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앉은 자리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독자를 매혹시켰다면 소설의 작가는 그것으로 대성공이다. 커피에는 저마다의 다른 인생 이야기가 얽혀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커피를 소재로 따냐의 인생을 소설을 엮어냈다. 소설은 이야기고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의 이야기들을 펼쳐 보이는 작가다. 흠. 독자를 매료시킬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내 인생에 쓰는 것은 오롯이 작가인 나의 몫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