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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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 수정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개념도 나오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되지만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는 21세기.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왜 '감정'도 돈이 지배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을까.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데. 나의 희노애락도 누군가가 돈으로 살수도 있다. 나 역시 나의 기쁨을 돈으로 살 수도 있는 거다. 오프라 윈프리 쇼처럼 개인의 감정을 내러티브화 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정상의 범주였던 분노, 슬픔, 불안 등을 00 증후군, 00 컴플렉스라고 정의해 치료를 해야하는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팔려나가고, 심리학 상담이라는 새로운 수익 모델이 창출된다. 제약회사, 보험회사 등은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 이익을 얻는다. 평소에 자기계발서를 잘 읽지는 않지만, 뭐 필요한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한 단계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좋지,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감정을 자본화 하는 현상이라는 저자의 발상이나, 가부장적 권위주의 탈피나 페미니즘의 확산 으로 심리학이 강조되면서 감정이 자본의 타겟이 됐다는 저자의 설명이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든다. 아동학대로 인한 왜곡된 인격 형성, 왕따를 당한 경험에서 비롯된 아픔 부모나 이성친구로부터 학대받았던 상처들, 장남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했던 어마어마한 무게이 의무들. 이런 여러가지 슬픔을 심리학적으로 치료를 받고 안정감을 되찾고,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렇다면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이 대중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적인 위로를 받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어쩌면 긍정적인 것은 아닐까. 과거에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바람부는 벌판에서 시달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는데, 이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까. 서점에 범람하는 지나치게 많은 자기계발서에 관해 혹시 저자가 너무 예민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선택이 그러하듯,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를 감언이설로 꼬시는 상술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사실. 반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역시 감정에도 적용된다. 저자가 말했듯, 근면, 성실, 청결함 등은 쉽게 정신분석학에 의해 강박증으로 둔갑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둔갑술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자신을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때론, 슬픔이나 불안, 우울의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위로를 주고 안정을 주는 심리학 책이나 자기계발서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둘 사이를 적절하게 취사선택하면 된다.

그래도 어째, 입 한 구석이 씁쓸하다. 혼자 간직하고 싶은 생각도 있고, 이제는 빛바랜 아픔도 있고,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슬픔, 뭐 이런 다양한 가지각색의 감정들이 있는데, 이런 나만의 소중하고 은밀한 것들이 자본의 타겟이 된다니. 어쩐지 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방학 때나 백수 생활을 할 때 재미있게 보았던 아침마당도 알고 보니, 타인의 아픔을 상품화 한 것이고,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시간에 질질 짜면서 TV 화면에 멍하니, 내 시간, 내 감정을 내주었던 거라니.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 돈으로 울고 웃을 수 있는 시대. 나는 명백히 뼛속까지 자본주의에 물든 시대에 살고 있다.

엉뚱한 생각이 또 든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나도 내 감정을 세일즈 해보자는 생각. 다른 사람보다 10배는 예민한 내 감정을 팔면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을 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내다 팔 수 있다. 모든 것은 자원이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난 나는, 산유국 부럽지 않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나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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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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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취해 by 파블로 네루다


소나무와 오랜 키스에 취해,

여름처럼 나는 장미들의 쾌속 항해를 조종한다,

야윈 날의 죽음을 향해 몸을 구부리고,

내 순전한 해양성 광기에 붙박인 채.


창백한 채 내 굶주린 물에 매질하며,

나는 발가벗은 분위기의 시큼한 냄새 속으로 순항한다,

여전히 어둡고 괴로운 목소리로 그리고

버려진 작은 가지의 슬픈 술로 꾸미고.


열정으로 굳어, 나는 내 하나의 파도 위로 오른다,

동시에 달답고 태양다우며 타오르고 차가운 거기,

서늘한 히프처럼 희고 달콤한

행운의 섬들의 협곡에서 진정시키며.


축축한 밤 속에서 내 키스의 옷은 떨린다

미칠 만큼 전류로 충전되어,

꿈과, 나를 몸에 익히는 열광하는 장미들로 영웅적으로 나뉘어.


바깥 파도의 한가운데서, 그걸 거슬러

네 평행하는 몸은 내 품에 든다

내 영혼에 한없이 달라붙는 물고기처럼,

빠르고 또 느리게, 하늘아래 에너지 속에서.


파블로 네루다처럼, 뒤라스의 연인들처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나만의 틀을 모두 깨뜨려 버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어쩌자고 by 최영미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놓는,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이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또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땅

줄줄이 피멍든 가슴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 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냐


또 봄이 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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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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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자 생활을 할 때, 한 부장이 들려줬던 평기자 시절 무용담이 생각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당시, 뉴스며 신문에는 희생자들의 가족사진이며, 수학여행 사진이며, 온갖 개인적인 사진이 보도됐다고 한다. 당시 평기자였던 부장은 자신의 부장으로부터 희생자들의 사진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평기자 였던 나의 부장은 희생자의 집 주소를 먼저 수소문하고, 그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단다. 그런데 다들 장례식장에 가 있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단다. 그래서 문을 따주는 사람을 불러, 손잡이를 부스러 뜨리고 신발을 신은 채 집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뒤져 사진첩을 손에 들었단다. 집은 도둑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었단다. 그 때 각 방송사, 신문사 기자들은 행여 타 신문사 기자가 먼저 사진첩을 입수할 까봐 앞다투어 문을 따고 집을 헤집었단다. 게다가 그 사진첩은 몇 년이 지난 후까지 원 소유주에게 돌아가지 못했단다. 피해자들이 제발 사진만은 돌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몇 년 동안 사진첩은 각 방송사와 신문사 자료실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단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추억인 사진첩을 말이다. 말해 뭣하랴. 언론의 힘과 권력에 대해서.

그 막강한 권력 앞. 그 앞에 서게 된 27살 밖에 되지 않은, 그것도 그럴듯한 명함이나 직책하나 없는, 그저 성실한 가정부에 불과한 어린 여자애. 그 여자애의 연약함이란. 언제든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길가 한 송이 꽃처럼 허무한 것이다. 밟기는 커녕, 손으로 툭, 치면 망가져 버릴 만큼이나 쉽다. 아무렇게나 불면 힘 하나 안 들이고 날려보낼 수 있는 민들레 씨처럼. 더 이상 말해 뭣하나. 힘 없는 자의 슬픔을.

 카타리나와 같은 연약한 여자애. 동일한, 또 하나의 슬픔.

나도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말에 영향력이 생기고, 내 글로 사람들이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저 '성실하기만 한', 금세 무너뜨릴 수 있는 쉬운 존재가 아닌,  조금 더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힘으로 뭘 어찌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힘 있는 자가 함부로 내 삶을, 내 자존심을 망가뜨리지 않을 만큼, 그 정도는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그 만큼은 힘을 갖고 싶다. 언론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힘을 가진 존재는 너무도 많고, 그들은 항상  힘 없는 나를 마음대로 뒤흔든다.

카타리나와 같은 또 하나의 슬픈 눈. 또 하나의 불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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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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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이 문구가 작품의 백미인 듯하다. 선뜻 저질러 버리지는 않는, 그러나 그러기에 더 아슬아슬한 이 둘의 아찔한 사랑. 위 문장이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절대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은유적이었던 작가의 선율이 묘한 흥분감을 자아낸다. 시각적인 작가의 목소리가 하얀 달빛 아래, 화사하게 빛나는 목련꽃을 영상으로 창조한다.

그러나, 나는 '백미이다.'가 아닌, '백미인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이렇듯 애매하고 자신없는 말투를 사용한 이유는, 책을 읽을 때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조심스러운 작품의 매력을, 책을 읽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단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은 내내 무슨 소리지? 왜 이러는 거야? 왜 자꾸 피아노를 강요하지? 라는 생각을 계속 했다. 결국 책장을 다 덮고난 후에도, 이게 뭔소리냐.... 한숨만 내쉬었다. 오히려 해석을 읽고, 관련 서평을 읽고서야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내 이해력이 부족해서인지, 행간을 꿰뚫어보는 심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작가가 글을 너무 애매하게 풀어나갔는지, 독자가 뚜렷이 파악하기 어려운 글이 훌륭한 글인지 아닌지, 이런 식의 고민은 여기서 하지 않기로 한다. 위와 같은 논란을 모두 잠식시킬 만큼, 작가의 필력은 흡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필체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가 당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일어나는 호기심 때문인지, 작품에 대한 나의 몰입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적어도 작가는 독자를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한 셈이다.

아슬아슬, 끊어질 듯 이어지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자신의 욕망을 이어가는 안 데바레드. 신경질 날 정도로 절제되고 폭발할 만큼 감질나는 안 데바레드의 일탈 욕구. 아찔한 향에 취해 홀린 듯 그녀는 매일 쇼뱅을 찾아가고, 나도 그녀를 따라 그녀의 은밀한 밀애에 묘하게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 흠뻑, 마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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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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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예전에, 이런 글을 끄적거려 본 적이 있다. 이런 글, 이라 함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자세하게 글의 내용을 기술하기는 좀 어렵지만, 암튼 내 글에도 별별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했었다.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의 비정상적인(통상의 사람들이 함부로 정해놓은 기준에 따르면 비정상적인) 면을 비정상적이라고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특이사항을 지적하면서 서로를 비난했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욕하면서 뿔뿔이 흩어진다. 좀 씁쓸한 이야기다.

음,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사실 그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무던해지려고 노력해 봐도 절대로 무던해 질 수 없는, 선천적인 나의 예민함. '정상'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도저히 우겨넣을 수 없는 나의 독특함.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보기도 하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보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나를 자책해 보기도 하고 보듬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끄적거려 봤다.

작가도 이 글에서 그렇게 자기를 투영시킨 걸까? 가끔은 책상을 시계라고 불러보기도 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사다리를 들고 여해을 떠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작가는 정상은 아니지만 독창서이 넘치는 주변인들의 창의력을 높이 평가한 걸까. 아니면 작가는 '정상'의 특에서 벗어나 홀로 힘겹게 세상과 대적하는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던 걸까.

이 책과 관련된 서평에는 유달리 '소외'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니, 소외된 인물에 대한 관대한 인정이니, 뭐 이런 말들 말이다. 작가는 안정적인 궤도에서 한 치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꼬집고 싶었나 보다.

허나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이런 의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한 편 한 편의 글이 재미있었다. 시계에 앉아 책상을 바라보다가 양탄자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싶은, 장난기 가득한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다. 그래서 키득거리면서 후루룩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어릴 적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듯 말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이런 변칙적인 행동들이 그저 '재미'로 받아들여지면 얼마나 좋을까. 미친사람도 아니고, 특이한 사람도 아니고, 신기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재미있고 유쾌한 기분전환 정도로 받아들여진다면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좀 더 과감해 질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우리들은 좀 더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나조차도 위와 같은 상황들이 현실 속에서 벌어진다면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나는 특이해도 괜찮지만 상대방의 돌발행동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한 것이 모순적인 나의 잣대다. 학교를 다닐 때나 직장을 다닐 때 조금 유별나고 특이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고, 나 역시 사람들과 함께 이상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봤다.

이런 실정이니,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는다는 것이 어렵고, 그래서 나는 엄격한 평가를 받고, 그래서 나는 자꾸 세상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모두 타인의 기준과 잣대 속에 자신의 삶을 우겨넣는 인생을 살고야 만다. 참 슬픈 일이다.

모든 초등학생들에게 이 책을 가르쳐야 한다는, 갑자기 무지 뚱딴지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책의 등장인물처럼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마음이 내키면 그를 실행에 옮겨도 되고, 그리고 누군가가 그런 행동을 하더라도 재미있다고 격려해 줘야 한다고.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비웃음 가득 찬 시선은 이제 그만 거둬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쳤으면 한다. 갑자기, 선생님이 돼야 겠다는 또 무지 생뚱맞은 생각이 퍼뜩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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