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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잠시 기자 생활을 할 때, 한 부장이 들려줬던 평기자 시절 무용담이 생각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당시, 뉴스며 신문에는 희생자들의 가족사진이며, 수학여행 사진이며, 온갖 개인적인 사진이 보도됐다고 한다. 당시 평기자였던 부장은 자신의 부장으로부터 희생자들의 사진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평기자 였던 나의 부장은 희생자의 집 주소를 먼저 수소문하고, 그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단다. 그런데 다들 장례식장에 가 있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단다. 그래서 문을 따주는 사람을 불러, 손잡이를 부스러 뜨리고 신발을 신은 채 집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뒤져 사진첩을 손에 들었단다. 집은 도둑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었단다. 그 때 각 방송사, 신문사 기자들은 행여 타 신문사 기자가 먼저 사진첩을 입수할 까봐 앞다투어 문을 따고 집을 헤집었단다. 게다가 그 사진첩은 몇 년이 지난 후까지 원 소유주에게 돌아가지 못했단다. 피해자들이 제발 사진만은 돌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몇 년 동안 사진첩은 각 방송사와 신문사 자료실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단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추억인 사진첩을 말이다. 말해 뭣하랴. 언론의 힘과 권력에 대해서.
그 막강한 권력 앞. 그 앞에 서게 된 27살 밖에 되지 않은, 그것도 그럴듯한 명함이나 직책하나 없는, 그저 성실한 가정부에 불과한 어린 여자애. 그 여자애의 연약함이란. 언제든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길가 한 송이 꽃처럼 허무한 것이다. 밟기는 커녕, 손으로 툭, 치면 망가져 버릴 만큼이나 쉽다. 아무렇게나 불면 힘 하나 안 들이고 날려보낼 수 있는 민들레 씨처럼. 더 이상 말해 뭣하나. 힘 없는 자의 슬픔을.
카타리나와 같은 연약한 여자애. 동일한, 또 하나의 슬픔.
나도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말에 영향력이 생기고, 내 글로 사람들이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저 '성실하기만 한', 금세 무너뜨릴 수 있는 쉬운 존재가 아닌, 조금 더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힘으로 뭘 어찌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힘 있는 자가 함부로 내 삶을, 내 자존심을 망가뜨리지 않을 만큼, 그 정도는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그 만큼은 힘을 갖고 싶다. 언론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힘을 가진 존재는 너무도 많고, 그들은 항상 힘 없는 나를 마음대로 뒤흔든다.
카타리나와 같은 또 하나의 슬픈 눈. 또 하나의 불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