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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1. 처음 든 생각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미 보시오
집 안은 다 잘 정돈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오. 앤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일러두었으니 돌아오면 당신과 아이들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오.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소.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진 않겠소.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함께 한 사람에게. 돈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벌 수 있지만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주었던 시간과 신뢰와 애정과 노력들을 지긋지긋 하다는 듯 내동댕이치다니. 안주와 평안을 추구할 나이에 모든 것을 박차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그 모험심이야 높이 살 만하지만, 그럴 거였다면 애초부터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 따위는 만들지 말았어야지. 갚아줄 수도 없고 배상해 줄 수도 없으면서 타인의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락하다니. 다른 사람의 시간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야 말로 잔인의 진수다. 그래서 곱게 보지 않는다. 예술가라면 타인의 인생을 장난처럼 짓밟아도 되는 건지, 누가 이런 무례한 권한을 그들에게 주었는지. 제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란 말이지.
2. 매력.
내가 피해자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는 매력적이다.
- 아주 몰인정하군요
- 그런가 보오
- 전혀 창피하지도 않고
- 창피할 것 없소
- 세상 사람들이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 그러라지요
-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 상관없어요
타인의 시선이나 세간의 평가에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칠 수 있는 저 고집.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도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저 자신감. 춥고 배고픈 거지 꼬락서니를 하고서도 튼튼한 당나귀처럼 펄펄 뛰어다닐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에너지. 거기에 더해진 천재성. 꼬질꼬질한 여관에 안락의자 하나 없는 빈곤함 속에서도 미(美)를 볼 수 있는 심미안. 문둥병에 걸려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력적이다.
3. 꼭 그래야만 하는가.
예술가들은 항상 그래야만 하는지. 당대에 찢어지게 가난해야 하고 춥고 배고픈 암담한 현실을 감당해야 하고 더러운 옷이나 형편없는 음식을 아랑곳하지 않아야 하고. 어딘가 아파야 하고 물감과 종이 살 돈도 없어야 하고 끼니는 밥 먹듯 굶어야 하고 제대로 된 가정은 꾸리지도 못하고. 그들도 새 옷과 따뜻한 빵, 벽난로의 온기가 온 방에 퍼지는 안락한 집을 원하면 안 되는 건지. 그들도 조금은 편안한 삶을 살면 안 되는 건지. 가난과 예술이 동격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4. 그래서
벌레 하나에도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고, 동네 강아지나 들고양이, 쥐나 지렁이, 이런 류의 모든 생명들과 결코 친하지 않은 나는, 더위나 추위에 무지 민감하고, 배고프면 아무 일도 못하고, 도시의 깨끗함과 편안함을 떠나 더럽고 불편한 시골에서의 생활은 상상도 하기 싫은 나는, 그래서 화가가 되지 못하나 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안락함이나 안정감, 편안함이나 깨끗함, 결벽증과 까탈스러움 등을 모두 박차고 일어나 허허벌판에서 쥐들과 뒹굴며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고집도 엄청 세고 사람들이 예의라고 부르는 것, 인간적인 존중 같은 것은 가뿐히 무시해주고, 미친놈 소리 들을 정도로 제멋대로여야 하는데. 색다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달리 보고, 자신이 본 세상을 위해 하루 아침에 자신만의 세상에 뛰어들고, 사소한 것들에는 무신경하고 가난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털털하게 넘기고. 대신 그림을 위해 미친 듯 몰입하고 집념을 불살라야 하는데. 그런 '깡'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나는 화가가 될 수 없는 거다. 화가는 꼭 그래야만 될 수 있는 거다. 평범함은 곧 끝장이니까. 내 인생에 한 번 나도 미쳐보는 날이 있을까.